책과 함께

제목너의 하늘을 보아2024-06-11 10:21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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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박노해
ㆍ출판사 느린 걸음
ㆍ작성일 2023-06-23 11:10:20

 

박노해의 “너의 하늘을 보아” (느린 걸음 간, 2022년)를 읽고


저자가 2010년에 출간한 시편인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읽고 2014년에 쓴 북 리뷰를 필자의 첫 번째(『시골 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 동연 간, 2016년) 책에 담았다. 워낙 받은 감동이 진해서 그랬다. 서재의 서고 한 공간에 박노해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신작까지 포함하여 전권이 꽂혀 있는데 오늘 서평을 쓰고 있는 본 時를 섭렵했으니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사진 에세이 『아이들은 놀라워라』 를 읽으면 작가의 모든 글을 읽게 되는 셈이다.
어, 내가 작가의 글을 이렇게 좋아했나!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대상, 가까이 하면 왠지 모르게 손해 볼 것 같은 그 사람을 나는 왜 그리 천착했나를 조용히 복기해 보았다. 그리고 얻은 결론이 있다.
그가 갖고 있는 아픈 자들을 향한 심장이 내 심장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군사독재 시절, 가장 기본적인 인권 사수를 위해 저항했던 작가의 과거 이력을 트집 잡아 여전히 2023년에도 그를 정치적인 마녀 사냥으로 편향적 덧붙이기를 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본다. 더불어 참 아쉽고 아쉬운 것은 작가는 권력 중심에 있는 자를 두둔하고, 산헤드린 공회의 기득권 유대 종교주의자들처럼 가장 예수 그리스도 답지 않은 변질되고 타락했고 병들어 있는 교회를 비평할 뿐, 그의 중심에 낮은 자와 함께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있는 아름다운 신앙을 사수하고 있건만, 그를 사상이 불온한 자로 낙인찍어 영적 사생아로 매도하는 자들이 아직도 수두룩하다. 하지만 필자는 작가의 사람 사랑, 아픈 것에 울고 있는 아름다운 심장, 정상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 하지만 여릿한 갓난아이의 손가락 같은 품음을 작가의 글에서 느끼기에 그의 글을 놓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안식월 2주 기간 중에 라 카페 갤러리에 다녀왔다. ‘아이들은 놀라워라’ 사진전이 열리고 있기에 응원 차 다녀왔다. 작가의 흑백사진 속에 담겨 있는 아픔을 당하고 있는 제 삼 세계의 아이들, 왜 그러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여 전쟁을 일으킨 자들에 대한 미움조차도 등 돌리기하고 있는 그 아이들의 아픔이 있는 곳을 배경 삼아 살고 있는 죄 없는 아이들의 일상을 순백한 모습으로 담아 놓은 사진들을 보면서 권정생 선생이 토로했던 아이들 사랑을 다시금 복기하는 행복한 시간을 가져 보았다. 더 중요한 것, 아이들이 곧 하나님일 수 있다는 마음의 고백도 다시 한 번 되짚었다.
안식주간, 작가가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이후 다시 12년 만에 내놓은 『너의 하늘을 보아』 여행을 마쳤다. 동해안 바닷바람과 파도소리를 친구 삼아 목회 현장에서 삭막해진 내 심장에 다시 사랑하기라는 불을 놓아 준 작가에게 머리 숙여 감사했다.
500면이 넘는 지면에 524편의 시를 읽는 것도 녹록하지 않은 글 여행이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독서 일과가 詩라는 점을 감안할 때 시 이해는 고도의 사유함이라는 노고를 요구하는 작업이기에 더 진지한 성찰하기가 나를 짓누른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많은 시의 편린(片鱗)들의 면면은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단 하나의 어구(語句)들이 없었기에 내게는 버릴 것이 없는 옥고들로 다가왔다. 500여 편이 넘는 수많은 시어 중에 벼락으로 다가온 것은 단연 이 시구다.

생각이 있는 자는 어찌할 수 없다
생각한 대로 사는 자는 어찌할 수 없다 (p,285)
       
필자나 독자들이나 익숙해져 있는 경구가 하나 있다.
cogito ergo sum

학부 시절, 세뇌당하다시피한 이 명제를 당시에 그리 깊이 성찰하지 않았던 이유는 신학적인 지식이 일천했던 시기에 갖고 있었던 나의 무지 때문이었다. 데카르트가 이 철학적 마그나 카르타를 선언한 것은 중세가 너무 극단적 종교성에 함몰되어 있었기에 전혀 질문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던 인간의 이성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물론 데카르트의 이 도전은 신본주의적인 세태를 인본주의적인 틀로 바꾸는 혁명적인 역할을 한 게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성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주군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신학과 신앙은 하나님께서 이성을 배제하거나 도외시하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올바른 신앙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점을 간과해서 안 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결국 데카르트의 ‘생각하기에 존재한다.’는 철학의 내용을 그리스도인들은 ‘생각하는 신앙’을 유지해야 한다는 당위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목회 현장에서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내오면서 정말로 덕지덕지하게 관습화되고, 세뇌 된 그릇된 신앙의 자화상을 만날 때마다 치열하게 싸워왔다. 물러서지 않은 것 같다.
‘질문하지 않는 신앙’의 강요다.
이런 폭력은 결국 세간의 영역에서 대화가 되지 않는 기독교라는 괴물을 만들어냈다. 대화 자체를 불온한 일이자, 불경한 일로 치부하여 질문하는 신앙, 생각하게 하는 신앙‘을 원천 봉쇄한 기독교를 대화상대로 여기지 않는 치욕을 당했다. 필자는 이 점이 대단히 수치스럽다. 그러기에 작가의 이 시구가 자꾸만 나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타격한다.
“생각이 있는 자는 어쩔 수 없다.”
나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가를 時分秒 질문해야 한다. 그래야 병들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로마서 8:18절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정수이자, 성숙한 신앙의 결론인 이 이 구절은 자칫 잘못하면 현실에서 도피하여 유토피아적인 내세 신앙만을 추구하도록 유인하는 구절로 악용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구절이다. 하지만 필자가 이 구절에 대해 걱정하지 않은 이유는 이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결국을 이루기 위한 전단계가 있음을 바울이 피력했기 때문이다.
‘생각하건대’
헬라어 ‘로기조마이’의 번역이다. 바울이 ‘로고스’를 중심에 두고 심사숙고(그래서 영어성경 전반에 consider 로 번역되어 있음)하는 생각의 결과물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결론을 가져온다고 역설한 이 구절을 나는 사랑한다.
작가는 이렇게 읊조렸다.
“생각이 있는 자는 어쩔 수 없다.”
엄청난 사유의 결과물이다. 

지는 게 이기는 거란다 (p,338)

꽃이 아름다운 건
지는 때가 있기 때문이란다
꽃이 지면 그 자리에
눈부신 열매가 익어간다

그악스레 지지 않으려 하면
스스로 짓이겨질 뿐이란다

이제 져야 할 때이다
한 번 비워야 할 때이다

교회 앞에 있는 주택은 내가 사는 동네에서 제일 먼저 목련이 피는 집이다. 하얀 목련이 필 때면 생각나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참 좋다. 그 수려함과 도도함 그리고 자태마저 너무 도도하기에 그렇다. 근데 말이다. 지는 목련은 보기가 싫다. 그냥 싫은 게 아니라 너무 싫다. 그 추함은 여타 다른 꽃들에 비해 압도적이다. 목련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불과 5일 안팎이다. 내가 사는 동네 하천이 걷는 둘레 길로 변신되자 자치단체에서 금계국을 심었다. 왕복 3km 구간에 25만 포기를 심었다. 한 송이 가지에 6개의 꽃이 만발하는 것이 금계국이라 한다. 그러니 금계국이 만발 할 시기가 되면 얼마나 엄청난 장관을 연출하는지 안 봐도 비디오다. 자료에 의하면 금계국은 5월에 만발하여 7월까지 무려 3개월을 생존한다고 한다. 이에 비해 전술한 목련 꽃의 생명 연한은 수일에 불과하다. 꽃이라는 생명은 각양에 따라 금계국처럼 오래 피는 것이 있는가 하면, 목련처럼 그 수명이 길지 않은 것도 많다. 하지만 공통분모는 꽃은 질 때 추해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예외가 없다. 하지만 작가는 이 점을 역전시켰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지는 때가 있기 때문이란다. 시인은 이 시의 말연(末聯)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나 기꺼이 떨어져
가없이 피어온 저 꽃들처럼

지는 꽃이 돋아 눈부신 결실을
그 열매가 묻혀 새로운 꽃들을

그렇다. 지는 게 추해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지 않으면 다음 해에 또 다시 피어오르는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 져야만 다시 핀다. 이건 금언과도 같은 생태적인 철학이다.
시인의 시어를 목사로 살면서 항상 이기려고만 했던 나를 사정없이 내려치는 죽비의 소리로 이 聯을 들었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명제가 어찌 꽃에만 적용되는 것이랴!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시인의 읊조림이 내 귀에 들리니 나는 참 못난 사람이다. 지금도 이기기 위해 독사의 혀를 날름 이는 수많은 군상들을 보면서 아프기 그지없는 것이 내 삶이 반추되어서 일 게다. 

좌우(左右)에서 (p,369)

어제의 적폐인 보수는
오늘 나의 적이다

오늘의 노폐된 진보는
내일 나의 적이다

그래서 지금
좌우 양쪽에서 비난받고 있다면

그 순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난

이 시를 만났을 때, 왠지 울컥했다. 외롭지 않게 내 삶의 한 부분을 격려해 주는 이가 있어서 말이다. 작가는 누가 뭐라 해도 진보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전 인생에서 ‘진보’라는 단어는 운명과도 같은 거다. 하지만 작가는 무섭게 성찰한다. 노폐(怒閉) 된 진보는 나의 적이라고. 아마도 타협하는 지성, 굴종하는 진보는 적폐인 보수보다 더 나쁜 부류라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나는 ‘노폐’라는 단어를 ‘노하기를 그만두기’ 라는 뜻으로 읽었다.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怒’는 신경질적인 怒가 아니다. 불의에 굴복할 때 나타나는 怒다. 그렇다. 이 ‘노’를 폐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이며, 막 살겠다는 선언이기에 아주 질이 좋지 않은 행위다. 주군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내장이 끊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갖고 저 죽어가는 자들을 품어야 하는 것과 더불어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자들에게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을 치시며 상을 둘러엎는 분노가 동시에 여전히 있어야 한다. 이로 인해 비난을 당하고 있다면 주눅 들지 않으련다. 왜? 작가의 말대로 제대로 가고 있는 증거이기에 그렇다. 이것 역시 치열한 사유함의 결과물이다. 생각하는 삶을 사는 자를 어찌할 수 없는 이유다. 글이 길어졌으니 하나의 시어만 더 다루어보기로 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든 것은
땅에서 비롯된다.

‘비는 땅에서 내린다’에서 (p,404)

가만히 생각해 보면 범인들은 이런 표현에 접근하지 못한다고 정의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이전에 김기석 목사의 글에서 옛 어른들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신다.’고 표현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하늘 섭리에 대한 경외함을 전제한 표현이리라! 작가는 시어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비는 땅에서 내린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바꾸며 패러디해 본다.
‘비는 땅에서 내리신다.’
하늘이 존중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땅이 그것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든 것은 땅에서 비롯된다.’면 땅은 곧 하늘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대지다. 이런 이유로 인디언들은 땅을 ‘어머니의 젖이 나오는 유방’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동의한다.
땅이 버려지고 있다. 땅이 훼손되고 있다. 땅이 수치를 당하고 있다. 땅이 울고 있다. 비가 땅에서 내려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행한 악행을 그대로 앙갚음하고 있는 땅을 보면서 서늘해진다.
언젠가 고속도로 휴게실에 들렸을 때 보았던 화장실에 적혀 있는 이 문구가 기억난다.
“고객님, 한 발만 앞으로 다가서 주세요. 고객님이 배려해주신 그 배려의 혜택은 곧 고객님께 돌아옵니다.”

땅을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이 마음일 수는 없을까. 내가 내 아들과 손자손녀에게 건네줄 땅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다. 땅에서 비가 내리실 수 있도록 땅을 사랑하자.

작가는 1957년생이다. 필자보다 4년 연배가 있으니 2023년을 기점으로 67세에 닿아 있다. 이전 글에는 이런 종류의 글을 본 적이 없다.

시간, 쏜 살이다
청춘, 순간이다 (p,516)

작가는 또 哀歌로 노래한다.

늙음은 새로운 죄목(罪目)으로
젊음의 법정(法廷)에 세워져
처형(處刑)되기 직전(直前)이니

한 생(生)의 노고(勞苦)와 성취(成就)가
부정(否定)되고 조롱(嘲弄)받고
냉대(冷待)받는 죄(罪)가 된 늙음이여
가혹(苛酷)한 노년(老年)이여 (p,436)

세월 앞에 장사가 누가 있으랴! 고문으로 인해 갖고 있는 육체적 트라우마가 아마도 노년으로 들어서는 작가의 삶을 더 흠 짓 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어떤 이가 말했다. 늙음은 천형이라고. 왜? 그래야 죽을 수 있으니까. 근래, 나 또한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하곤 한다. 아내도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죽어야 행복할까?
12년 만에 무대에 등장한 작가의 시를 만났기에 아내의 질문에 답해 보려 한다.

“여보, 앞으로도 생각하며 살자. 그러면 행복하게 죽을 거야!”
 

무감각, 무기력, 무능력, 무희망이라는 쪽팔림(?)은 당하지 말자. 고문 후유증으로 많이 힘들어 하는 작가가 끝까지 건강해 주기를 화살기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