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김판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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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동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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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2-11-26 21:55: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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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임 교수의 “천재 예수, 그 생각을 탐하다.”(동연 간, 2022년)를 읽고
“그녀에게서 거침없는 지성을 본다. 사정없이 내려치는 지성적 죽비에 정신이 바짝 든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언제나 저자는 나에겐 신약 선생님이다. 2022년, 11월 24일 오후 7시 40분 사랑의 교회 안성 수양관에서” (책 뒷면에 남긴 사족)
매년 이 맘 때면 기도원을 찾는다. 또 1년을 준비해야 하기에 그렇다. 조금은 엄살 같지만, 이제는 사무총회 준비를 위한 기도원 行도 숨이 차다. 더 더군다나 펜데믹 3년차에 접어든 교회는 무언가를 역동적으로 준비하거나 계획을 세울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기에 15회 사무총회 준비가 즐겁지만 않다. 기도원에 올라오면서 세 권의 책을 캐리어에 담았다. 本書가 그 중 하나다. 저자가 11월 중순 보내준 ‘walking with Jesus’와 함께 본서를 챙겼다. 사무총회 안을 준비해야 하는 빠듯함이 부담이기는 했지만, 세밀히 정독하며 여행했다. 저자는 지금 암 투병 중이기에 왠지 모를 ‘같지 않은’(정신병 수준의 누군가가 썼던 말이라 피하고 싶었지만 딱히 다른 표현이 없어 쓰기로 했다.) 격려 사명감 때문이라도 열심히 독서했다. 저자는 본서를 출간하면서 ‘천재 예수, 그 생각을 탐하다’로 정했다. 글을 읽는 내내, 저자의 의도가 적확한지에 대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유를 굳이 대라고 한다면 저자도 인용한 불트만의 말처럼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p,207)에 대한 이해 구조에 있어서 ‘천재 예수’라는 용어가 전자의 경우에는 별 거부감이 없이 자연스럽게 관통되겠지만, 후자의 경우에 용어 사용 자체가 적절한가에 대한 질문 때문이었다. 독서 이후 결론적 소회는 적어도 필자에게는 두 경우 예외 없이 정의될 수 있겠다는 점이었다. 길게는 1998년, 짧게는 2016년에 저자가 학계에 발표한 小論文들을 정리한 페이퍼들인데, 시간적인 갭이 있어도 적어도 내겐 참 소중한 공부 자료들이었음을 밝히고 싶다. 총 4부로 만들어진 본서는 1부에서 종교적 천재라고 명명한 저자가 예수와 연관된 안식일에 대한 담론을 추적했는데 뛰어난 성찰로 집요하게 저자가 붙든 것은 안식일이 시행되는 방법이 아니라 그 법을 제정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예수가 파악한바 안식일법의 원래 의도는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함이다. (중략) 이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당시 유대 종교의 모순을 지적하며 안식일에 담긴 진정한 하나님의 법 정신을 제시하는 놀라운 통찰이다.”(p,34) 저자의 말대로 법을 만들어 시행하는 데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유대교도들과는 달리 천재 예수는 법의 정신에 더 천착했다는 해석이 필자에게도 성큼 다가와 동의했다. 저자의 안식일 접근은 월터 브루그만이 말한 대로 안식일은 불안, 강요, 배타주의, 과중한 일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정신이라는 갈파와 그 맥을 같이한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의 지적대로 “안식일은 갈가리 찢어진 삶을 수선하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하는 날”(헤셀, “안식”, 복 있는 사람, p,65)이라는 정신의 회복이 무엇보다도 예수께서도 생각하신 정신이지 않나 싶어 머리에 새겼다. 2부에서 저자가 주목하게 만든 할 천재 예수와 관련한 담론 중에 하나는 누가복음 10:38-42절에 기록되어 있는 마르다, 마리아에 관련된 삽화다. 마리아와 마르다에 얽힌 예수의 내레이션은 언제나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편파적이다. 물론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해석자들의 도발이 그렇다는 말이다. 필자가 보았던 이 삽화에 관한 보수주의적인 해석 중에 인상 깊게 남아 있는 해석은 이런 것이 있었다. 누가복음 10:40절에 대한 해석을 소개한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해석자는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도발했다.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등한시하고 일에만 분주했던 마르다는 결국 주님에게 명령하는 명령자고 변질되고 말았다.” 마르다 두 번 죽이기 같았다. 복음주의적인 해석으로 흠잡을 데가 없어 보이는 이 해석은 한국교회 대형교회 목회자의 설교에서 등장한 해석이기에 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해석을 따랐다. 교회 사역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 해석이었기에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해석에 대해 십분 동의하기를 주저했다. 이유는 마르다의 요구가 과유불급이었는가에 대해 머리를 끄덕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르다의 말이 타당한 요구가 아닐까에 더 많은 방점을 두었던 필자였기에 수긍하기 어려웠다. 언제나 성서해석의 방법은 운동장 기울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러 선생님들께 배웠다. 특히 이 본문 해석이 그런 면에서 오류가 있음도 배웠다. 이런 차원에서 저자의 해석은 내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다. “마르다의 유형은 사회, 외부의 평가 기준에 따라 살면서 남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자의 모습인 반면, 마리아 유형은 사회와 같은 외부 기준에 따라 맞추어 살기보다는 자기 내면의 욕구에 따라 살아가는 모형이다.” (p,180) 저자의 해석이 편벽되어 있지 않아 좋다. 마르다에 대해 극단적인 비난을 보내는 세간의 해석이 아니라 예수만이 갖고 있는 균형 리듬으로 해석한 것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예수의 이러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현대적인 어감으로 적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여러 음식을 하려고 고달파하지 말고, 그저 일품 요리 하나라도 혹은 김치 하나라도 족하니 불평하지 마라. 내가 원하는 것은 너의 기쁨이지 불평이 아니니라” (p,181) 마르다를 폄훼하지 않은 예수, 마리아의 선택에 대해 응원해준 예수를 가리켜 저자는 페미니스트 예수라고 불렀다. 3부에서 눈여겨보았던 텍스트는 예수가 바라본 사마리아인에 대한 해석이었다. “예수가 처음 가졌던 견해를 바꾼 것은 분명하다.”(p,238) 이 단순한 평가와 솔직한 저자의 해석이 불편했던 필자의 담을 여지없이 부수어 버렸다. 저자의 직설은 이렇다. 유대인 남성이었던 예수도 사역의 초기에는 사마리아에 대하여 민족적인 응어리를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예수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던 사건이 바로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만남이었다고 피력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대화(막 7:24-30)에서 변화의 모티브를 얻은 듯하다.”(위의 페이지 동일) 언제나 불편했던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독자들은 어떻게 해왔나 질문하고 싶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7) 정말 많이 듣고 본 이 구절에 대한 궁색한 변명은 시험하기 위함이라는 해석이었다. 압박해도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예수의 행동은 아무리 미화해도 일반 상식과 엇나가는 극단적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주는 독설이었기 때문이다. 해서 필자는 항상 이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했다. 잘 모름. 하지만 신약성서학자인 저자는 이렇게 타진했다. “예수에게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났다.” (p,239) 저자의 신학적 전개를 들어보자. “구원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작용하실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 세계에 그의 구원의 힘이 미쳐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구원 활동 영역에서 제외될 사람은 없는 것이다. 구원이란 주제와 관련하여 예수의 새로운 인식이 이처럼 창조 사상에 근거하여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p,239) 나는 저자의 이 글을 만나면서 저자의 정직함과 거침없음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저자가 필자에게 보내준 또 하나의 책, ‘워킹 위드 지저스’ (서평을 곧 쓰려고 한다. 개봉박두)에서 불트만의 고전적인 갈파였던 ‘역사적 예수’의 테두리 안에서 유대인이었던 예수,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던 예수, 놀라운 이적을 보여준 예수, 유대 기득권자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게 한 예수,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 정도로 국한하였음을 보고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역사적 예수의 인식 변화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인식은 신앙적 그리스도 예수를 고백하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이기에 신학의 성향이 보수나 진보로 갈라치기할 것이 아니라, 인정해야 하는 신학도의 정직성 문제라고 진단하기에 나는 저자의 해석에 전적인 지지를 보내고 싶다. 4부는 책 제목을 정하게 된 담론 전개다. 천재 예수의 생각을 탐하게 된 동기들의 구체적 사안들이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특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부침했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는 무엇을 의미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과연 누구인가와 더불어 그 나라의 백성들이라면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의미 있게 독서했다. C.H Dodd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개진한 ‘이미 왔으나’(schon jetzt), ‘아직은 아닌’(noch nicht)의 긴장관계가 형성되는 하나님 나라에 저자는 나름 진지하게 본서에서 피력했다. 저자의 종합적인 결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 나라는 지상에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나라, 하나님이 통치하시기에 지금도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 어떤 곳이며,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다고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고 운영하는 나라이며, 몇 몇 사람만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그 나라에 들어온 모든 사람이 살 수 있게 운영되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다.”(pp,273-275) 통쾌한 통찰이다. 김기석 목사가 ‘잘잘법’에서 강의했던 내용이 오롯이 기억에 담지 되어 있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가? 하나님 나라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땅에서 행하고,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지 않는 자가 들어가는 곳이 하나님 나라이다.” 빼박의 촌철살인이다. 더 이상 무슨 부연 설명이 필요할까 싶다. 나는 저자의 하나님 나라 해석에 원론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지지한다. 그러나 100%는 아니다.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저자의 유보는 유감스럽다. 신학자들이 확신하고 있는 신념이 신앙이 아닌 신념으로 머물고 있는 것에 대한 그 확신이 때론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필자는 저자가 강조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실 하나님 나라의 일체의 일하심에 대해 머리를 숙여 동의한다. 그런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자가 ‘워킹 위드 지저스’ (동연 간, 2022)에서 피력한 대로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보고할 그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한다. 그 나라는 내 존재의 정체성을 유지해 주는 실마리이기도 하다. 이제 조금은 편안하게 사적인 이야기를 남기고 글을 맺는다. 저자의 회복과 강건해짐은 필자의 중보 내용이다. 한 동안 소통이 막혔을 때, 매우 염려했다, 그런 일이 다시는 없기를 소망한다. 이기적이지만 저자가 건강해야 그분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원에서 내려와 서재에서 진행하는 서평 쓰기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또 하나의 사역이다. 마무리해서 행복하다. 내일 주일이 아름답기를 기도한다.
2022년 11월 25일 오후 9시 43분 제천세인교회 서재에서 이강덕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