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박재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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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분도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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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3-02-08 17:51: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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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찬의 『토머스 머튼의 수행과 만남』, (분도출판사, 2021년 간)을 읽고 ‘궁극적 자기초월’ 혹은 ‘자기변형’이라고 저자가 밝힌 용어는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한 독자들에게 대단히 낯설게 여겨진다. 이 책에서 저자는 줄곧 연구의 대상인 토머스 머튼의 관상적 핵(the contemplative core)을 대체한 용어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개신교회 지체들은 이 단어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있기에 그렇다. ‘관상(觀相)’이라는 어원 자체가 대단히 가톨릭 적이라고 믿기에 거부한다. 하지만 유진 피터슨 목사에 의해 개신교회에도 보편화된 렉치오 디비나 독서와 관련하여 묵상은 기도의 차원으로 승계되어 초기보다는 익숙해진 편이다. 지난 주간에 김기석 목사와 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존경하는 선배이고, 개인적으로 그의 목양과 신학적 정체성에 대해 적지 않은 동의를 하는 후배이다 보니 그와의 만남은 언제나 설렌다. 최근 발간한 졸저이지만 직접 드리는 것이 예의인 것 같아 대면해서 부끄러운 저서를 드렸다. 졸저를 받은 김 목사께서 내게 건네준 책이 본서다. “이 목사님에게 좋은 독서가 될 것 같아서 가지고 나왔어요.” 기실, 토머스 머튼의 저서는 내게 애독하는 가톨릭 분야의 한 영역이다. 『칠층산』을 감동으로 읽었고, 설교에 빈번하게 『토머스 머튼이 길어낸 사막의 지혜』와 『고독 속의 명상』에 담긴 금과옥조와 같은 글들을 교우들에게 전하곤 한다. 김 목사께서 전해 준 본서는 내게는 그 동안 읽었던 단편들과는 조금은 성향이 다른 불교, 그 중에서도 선불교와 달라이라마를 중심으로 수도적인 종교로 맥을 이어오고 있는 티베트 불교가 다루고 있는 관상에 대한 연결고리를 찾아 혼합주의적인 차원에서 담을 쌓는 격 두기가 아니라 소통의 채널을 만들어나가는 작업이라고 논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런 총체적인 글의 아우라가 이모저모의 이유로 동의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서 집중하려고 했던 것은 토머스 머튼의 영적 엔카운터가 교리적인 카테고리 안에서 집착되고 있지 않았다는 점과 또 하나, 보편적 영성의 자리매김때문이었다. 특히 그가 경험했던 세 번의 영적 만남 중에 루이빌에서의 엔카운터는 내게도 중요한 관심 분야이기에 주목했다. 이것은 웨슬리가 사역 중에 주목했던 사회적 영성의 필드와 접목해도 좋은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나름의 수확을 얻었다, 하지만 본서를 독서하며 가장 중요하게 다가온 도전과 공부의 내용은 기독교적인 신앙의 코어가 결국은 분주하거나 소란스러운 감성 팔이가 아닌 주님과의 전인격적인 만남에 혁혁한 기여를 해주는 깊은 영적 성찰 끝에 이루어지는 은혜임을 재확인한 점이었다. 아마도 복음주의라고 지칭하는 테두리 안에서 한 번도 외도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본서를 대단히 불온한 서적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토머스 머튼이 시도한 일련의 종교적 행위들은 대단히 파격적이기에 그렇다. 나 역시, 토머스 머튼이 갖고 있는 영성이 너무 신비주의적인 차원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고 본다. 교리를 운운하는 것은 또 다른 대척점을 만드는 일이기에 극도로 조심해야 하는 것이지만, 개혁적 전통을 중심하는 개신교회(나는 개인적으로 이 용어 자체를 대단히 불편하게 생각한다. 개혁적이라고 하는 개혁교회 가장 개혁되어야 집단으로 변질되었기에 그렇다.)에서 같이 갈 수 없는 신학적 유격(裕隔)이 너무 크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가 갖고 있었던 수도원적인 전통은 ‘그리고 지금 여기’라는 현장에 대해 너무 이원화되어 있는 생소함 때문에 또 다른 분리를 이루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를 읽으며 주목했던 것은 두 가지다. 첫째, 토머스 머튼이 시도하려고 했던 정적 엔카운터에 대한 동의다. 나는 개신교회의 한 교파인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 소속 목사다. 그러기에 개신교적인 전통에 충실하려고 나름 노력한다. 더불어 성결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목사이기에 성결성에 대한 천착함이 있는 목사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경험해 왔던 과유불급은 신앙의 정적 요소가 너무 그릇되게 흘러왔다는 점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신비주의로 매도만 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도 신앙의 정적 요소들을 수용함에 있어서 가톨릭교회에서 전승으로 이어온 시끄럽지 않은 엔카운터에 대해 정중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주여 삼창만이, 방언의 은사를 받는 것만이, 병자들을 벌떡벌떡 일으켜 세우는 것만이 현상적 은혜라고 몰고 가지 말고, 호렙산에서 엘리야가 경험했던 강한 바람이 아닌, 지진이 아닌, 불이 아닌, 세미한 소리를 듣는 엔카운터에 집중하도록 응원해야 한다. 둘째, 타자성이다. 섬기는 교회에서 구약 톺아보기를 할 때 강사로 선 아신대학교의 이한영 교수가 전했던 한 대목이 이것이었다. “1등이 위대해 보이는 이유는 2등이 옆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등은 1등에 비해 더 존중받아야 할 가치다.” 타자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나’를 ‘나’로 정의하게 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부버의 말대로 ‘너’를 ‘그것’으로 평가하는 순간, ‘나’역시 ‘그것’으로 전락되기 때문이다. 이런 어리석음이 또 어디에 있나! 그것도 포용의 극치를 보여주어야 하는 종교의 필드에서. 스캇 맥나이트가 일설(一說)했던 이 마그나카르타 같은 충고는 왜 요원한 것일까? “포용의 은혜에서 아담과 하와에 관해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들의 DNA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스캇 맥나이트,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 아바서원, 34.) 하나님의 에이콘이라고 정의해도 괜찮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들이 타 종교를 ‘그것’으로 전락시키는 추함은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행할 일이 아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면 나에게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인가라고 다그치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생각이 들어 노파심으로 말한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팩트는 타종교에 대한 천박한 무례함을 거두라는 말을 전하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원에서 단 한 번도 외도한 적이 없다. 내가 목사가 된 이유는 나의 주군이 예수이심을 절대적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타종교에 대하여 무례함을 저지르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내용은 누가 뭐라 해도 타자성이다. 그러기에 본 회퍼 목사의 외침은 정답이다. “교회는 이타적일 때만 교회다.” 같은 맥락이다. “기독교 신앙도 이타적일 때만 기독교 신앙이다.” 토머스 머튼에 관한 글을 읽다가 스캇 맥나이트의 일침이 또 떠올랐다. “하나님의 포용의 은혜 이야기는 그 자리에서 기적이 일어나 갑자기 변화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부서진 에이콘이 서서히 치유되는 이야기다.” (스캇 맥나이트의 위의 책, 215.)
박재찬 신부가 쓴 그의 학위 논문의 한국어판 『토머스 머튼의 수행과 만남』은 적어도 나에게 조용한 울림으로 다가온 良書였다. 이 소중한 책을 선물해 준 김기석 목사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