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7일 (세 번째 주) 지역 셀 사역 1. 얼음깨기 (WELCOME)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 믿기를 정말로 잘했다고 생각했던 감동의 사건 나누기. 2. 찬양 (WORSHIP)
● 찬송가 490장: 주여 지 난밤 내 꿈에 뵈었으니 ● 복음성가: 마라나타
3. 말씀 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창세기 47장 27-31절 ● 제목 :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1)야곱이 요셉에게 남긴 유언과 그 의미를 나누어 보자. ① 유언 ② 의미
2)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믿음의 선배들이 걸었던 길을 나누고 레마로 적용해 보자. ⓵ 아브라함과 이삭 ⓶ 야곱과 요셉 ⓷ 레마로 적용해 보자.
3) 적용하기
⓵ 나그네로 살기로 만족하는가? 본향을 가기를 원하는가? ⓶ 본향을 향하는 자가 반드시 가져야 하는 믿음을 챠 씨를 통해 알아보자. ⓷ 본향을 향하는 믿음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기도하자.
4) 사역하기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중보 및 사역하기 1. 태신자 초청 축제 스케줄 17-23일 주간 사역 성실히 감당하기 (지역 셀 모임이 정한 교제의 장소로 태신자를 초청하여 교제하기 [1]) 2. 고난주간 저녁 집회 사모하고 참석하기를 준비하기. 3. 사순절 릴레이 기도 최선을 다해 참석하기. 4. 축제일 식탁공동체 사역 나누기 5.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중보하기
● 설교요약 (SUMMARY)
본론) 야곱이 애굽에 정착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애굽에 정착한 이래, 17년을 더 살았다고 보고합니다. 이제 야곱의 나이는 147세입니다. 인간은 ‘에노스’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죽는다는 의미처럼 야곱이 이제 죽을 날이 가까웠다고 창세기 기자는 피력합니다. 야곱이 죽을 날이 가까이 오자 무엇을 했는지를 오늘 본문이 제공합니다. 29-31절 본문을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아들 요셉을 불렀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자기 허벅지 안에 손을 넣으라고 명합니다. 히브리어 ‘야레크’의 번역인 ‘허벅지’는 ‘둔부’ 혹은 ‘남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하경택 교수는 29절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여기에서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는 것은 서약을 이행하는 사람이 위임자의 성기에 손을 대는 행위로서 맹세 의식에 관련된 행위이다.” (하경택,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2』, 킹덤북스, 573쪽) 결국 대단히 엄숙한 맹세 서약식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아들 요셉에게 자기를 애굽에 매장하지 말고, 가나안에 매장하라는 권고는 대단히 엄숙한 명령이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갖고 있는 영적 자존감을 표출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약속이 어떻게 이행되었는지를 창세기 50:12-13절이 보고해 줍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요셉은 형들과 함께 아버지 야곱의 시신을 매고 가나안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윽고 아버지 야곱을 막벨라 밭 굴에 매장했다고 보고합니다. 막벨라 밭 굴이 어떤 곳입니까? 아브라함이 아내를 장사 지내기 위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구입한 땅이었습니다. 이어 아브라함 자신도 이곳에 묻혔고, 이삭, 리브가와 레아도 묻힌 곳이기도 합니다. 야곱도 자신의 유언처럼 아들들에 의해 막벨라에 묻힌 것입니다. 아들 요셉에게 엄히 명한 내용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성경이 증언합니다. 재론하지만, 요셉도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이루시겠다고 약속한 가나안 입성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이후, 이스라엘 후손들에 의해 애굽의 땅이 아니라, 야곱이 요셉에게 물려준 땅인 세겜에 묻히게 됩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집중하고 있는 것이 보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설교 제목입니다.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질문해 보십시다. 왜 야곱은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죽음 이후라도 올라가기를 원했을까요? 답변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오택현 교수의 해제를 소개하겠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불러 자신의 나이가 이제 147세로 이미 기력이 다하여 하나님께 돌아갈 날이 가까웠음을 말하고 자신이 죽게 되면, 자신의 몸을 이집트에서 장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자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묻혀 있는 가나안 땅 헤브론 막벨라 굴에 장사 지내 줄 것을 부탁하며 요셉에게 반드시 이루어 줄 것을 맹세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는 자신의 돌아갈 본향이 이집트가 아닌 조상들에게 약속해 주신 가나안 땅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자신은 비록 늙어 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자신들의 후손들은 반드시 그곳에 들어가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요셉은 기꺼이 그 요구를 수용하고 아버지 앞에 맹세하며 그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실제로 요셉은 후에 아버지 야곱의 뜻을 그대로 지켰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조금의 시간적 차이와 위기의 상황이 있어도 반드시 성취됨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오택현, 『연세신학백주년 기념주석』, 369쪽) 소위 말하는 본향 정신이 야곱에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본향 정신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요? 아마도 가장 가까운 기저를 답해 보라고 한다면 창세기 46:4절일 것입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돌아온 아들들에게서 요셉이 살아 있고, 애굽의 제2 인자가 되어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물론, 요셉이 아버지를 애굽으로 초청한다는 엄청난 소식을 들었습니다. 야곱에게는 어마어마한 충격의 보고였을 것입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을 만난다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었지만, 노쇠한 야곱이 열조가 묻혀 있는 가나안을 떠나서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심히 두려운 일이었고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단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기로 마음먹고 가나안의 끝 땅이었던 브엘세바에 도착했을 때, 열조들이 그토록 사랑했고, 마음을 두었던 가나안을 떠나는 야곱은 착잡했습니다. 해서 그곳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았는데 바로 그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현현하셔서 주신 말씀이 창세기 46:3-4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브엘세바에서 약속하셨던 내용은 네가 다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올라오게 될 것이라는 것과 네 아들 요셉이 눈을 감길 것이라는 격려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전해 주셨던 이 놀라운 격려를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언급한 대로 가장 가까운 시기에 야곱이 붙들었던 하나님의 조명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붙든 것이 어디, 이 내용 한가지뿐이었겠습니까? 우리는 창세기 27장부터 아주 오랜 시간부터 야곱의 일대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슬아슬하고 순간 아찔하기까지 한 야곱의 전 인생의 조망을 숨 가쁘게 살펴보면서 어떤 때는 어렴풋하게, 또 어떤 때는 너무 선명하게 하나님이 야곱의 인생을 통치하고 지배해 왔음을 눈으로 똑똑히 목도했습니다. 불완전한 것 투성이었던 야곱이었고 불신앙적인 것 투성이었던 야곱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전 인생을 이끌어주셨던 하나님을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야곱은 그렇게 서서히, 점점 더 하나님의 사람으로 조각된 것을 우리는 야곱의 일대기 강해를 통해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그러기에 야곱이 애굽에 내 유골을 묻지 말고, 가나안으로 매고 와서 묻으라고 요셉에게 맹세하라고 압박한 이유는 야곱이 전 인생을 통해 서서히 갖게 된 본향 의식 때문이었다는 진단은 적절한 답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어진 본문 해석을 통해 대단히 분명하고 명징한 교훈을 받게 됩니다. ※ 성도는 본향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우리들이 익숙하게 말하는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믿음을 지키고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후대의 기록입니다. 오늘 창세기 강해와 맞물려 주목할 몇 구절이 있어 소개합니다. 히브리서 11:8-10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본향)을 바라보았던 선진들임을 알려줍니다. 이어지는 11:13-16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성도는 본향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11절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향 의식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나그네’라고 번역한 헬라어 ‘파로이코스’의 문자적인 뜻에는 ‘하늘이 본향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지난 독서반 텍스트였던 천국의 열쇠를 읽다 보면 대단히 감동적인 대목이 여럿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중, 한 대목을 소개하고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프랜시스 치셤이 중국 파이탄으로 파송되어 갖은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던 어간, 부유한 상인이었던 챠씨의 아들이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치셤은 최선을 다해 챠 씨 아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챠 씨는 치셤에게 성 안드레아 성당을 지어 기부하게 되어 인연을 맺지만 끝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합니다. 종교적 다원화에 대한 중국인 갖고 있는 종교성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치셤은 페스트와 사투하고, 페스트 사투가 끝나자, 이번에는 내전으로 인해 죽을 고비까지 넘깁니다. 배경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치셤은 산전수전공중전을 다 겪었지만, 나름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중국 선교를 잘 마무리하고, 이제는 나이가 들어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때를 맞이합니다. 치셤이 영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대단히 감동적인 일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도 회심하여 신자가 되기를 거부했던 챠 씨가 치셤을 배웅하고 이별 인사를 할 겸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치셤에게 말합니다. “신부님, 제가 이런 말씀을 많이 드렸지요. 이 세상에는 종교가 여러 가지가 있고, 천국에 들어가는 문도 여러 개가 있다고요. 그런데 신부님과 같은 문으로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챠 씨의 놀라운 변화요 회심이었습니다. 이 고백을 하는 챠 씨에게 막상 기뻐해야 하는 치셤 신부는 신중했습니다. “우정 때문에 그러실 것은 없습니다. 이런 것을 참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자 챠 씨가 분명하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저는 신부님에 대한 우정 때문에 또 제 믿음 때문에 이 길을 가려는 것입니다. 신부님과 저는 형제입니다. 당신과 저는 형제입니다. 그렇다면 신부님의 주님은 제 주님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설상 신부님이 내일 떠난다고 할지라도 제 마음은 섭섭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 주님의 뜰에서 만나게 될 것을 믿으니까요.” (크로닌, 『천국의 열쇠』, 섬앤섬, 566-576쪽) 소설에 등장하는 엄청난 감동의 장면 중 하나입니다. 챠 씨의 고백이 너무 귀하지 않습니까? “언젠가는 우리 주님의 뜰에서 만나게 될 것을 믿으니까요.”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거하고 있는 이곳이 우리들이 머물 궁극의 장소가 아니라, 반드시 가게 될 본향이 있음을 믿는 믿음 말입니다. 성도는 애굽이 본향이 아닙니다. 가나안이 본향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땅을 사는 동안 항상 이 믿음에서 이탈하지 말아야 합니다.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걸어가는 믿음 말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은 로마 연합 교회 성가대가 부른 ‘본향을 향하여’라는 찬양을 감상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려 합니다. 故 김두완 장로께서 작곡하신 ‘본향을 향하네’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감상하시면서 은혜가 임하기를 기대합니다. 【이 세상 나그네 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환란의 궂은 비바람 환란의 궂은 비바람 환란의 궂은 비바람 모질게 모질게 불어도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여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이 세상 지나는 동안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이 세상 지나는 동안 괴로움이 심하나 괴로움이 심하나 그 괴롬 인하여 천국 보이고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이 세상 지나는 동안 이 세상 지나는 동안에 이 세상 지나는 동안 괴로움이 심하나 괴로움이 심히 심하나 나 늘 항상 기쁜 찬송 못 부르네 주 예수님 은혜로 이끄시네 생명강 맑은 물가에 백화가 피고 흰옷을 입은 천사 흰옷을 입은 천사 찬송가 부르실 때 천사 찬송가 부르실 때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아쓰겠네. 이 세상 나그네 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고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여 본향을 향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