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일 (첫 번째 주) 지역 셀 사역 1. 얼음깨기 (WELCOME) 봄이 오고 있습니다. 봄이 오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2. 찬양 (WORSHIP)
● 찬송가 360장: 행군 나팔 소리로 ● 복음성가: 별빛 속을 걸으며
3. 말씀 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창세기 47장 1-12절 ● 제목 :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1) 야곱이 바로와 만나 행한 영적인 행동은 무엇이여, 그것이 의미하는 교훈은 무엇이었습니까? ① 창세기 47:10 ② 영적인 교훈은?
2) 마노아의 남편과 바락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영적인 아쉬움을 설교를 참고하여 말해 봅시다. ⓵ 마노아에 대한 담론 ⓶ 바락에 관한 담론 ③ 영적인 아쉬움은?
3) 적용하기
⓵ 우리 가정 안에서 영적 주도권은 누가 갖고 있는가? ⓶ 교회에서 가장 앞서가야 하는 자는 누구이어야 할까? ⓷ 세인교회가 영적 주도권을 상실하지 않는 교회가 되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자.
4) 사역하기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중보 및 사역하기 1. 사순절을 통해 영적인 주도권을 더 견고히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기도하기. 2. 3월 사역에 대해 준비하고 참여하기. 3. 고난주간 저녁 집회 사모하고 참석하기를 준비하기 4. 4월 7일 진행할 제 1차 전도축제에 태신자를 초청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섬기기 5.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중보하기
● 설교요약 (SUMMARY)
서론) 오늘은 사사기 13:8-14절 말씀을 읽는 것을 시작으로 설교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오게 하사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였으나 그의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그의 남편에게 알리어 이르되 보소서 전 일에 내게 오셨던 그 사람이 내게 나타났나이다 하매 마노아가 일어나 아내를 따라가서 그 사람에게 이르러 그에게 묻되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그 사람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내가 그로다 하니라 마노아가 이르되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하니라” 이 구절은 사사 삼손이 태어나기 전의 배경을 설명해 주는 텍스트입니다. 삼손의 탄생 배경은 이렇습니다, 단 지파 중에 마노아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소라라는 땅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마노아의 가정에 우환이 하나 있었는데 아내가 임신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여인이 자녀를 낳지 못하는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생각하던 것은 신이 태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정설이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온 것입니다. 와서 득남을 고지(告知)해 주었습니다. 태어나는 아들은 나실인이 될 것이기 때문에 나실인의 규례를 지켜가며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삿 13:4-5) 이 엄청난 일을 경험한 마노아의 아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남편에게 알려줍니다, 마노아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에게 주신다고 한 아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니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자 마노아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을 하십니다. 사사기 13:9절입니다.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였으나 그의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바로 이 구절에서 질문을 던져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은 마노아였습니다. 하지만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보낸 대상은 첫 번째처럼 그의 아내였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사사기 13:9절 하반절은 그 의미가 무겁습니다. 추적해 보십시다. 두 번째 현현한 야훼 사자는 첫 번째처럼 마노아가 자리에 없었을 때 그의 아내에게 임한 이유 때문입니다. 두 번째 야훼의 사자가 자기에게 온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마노아의 아내는 남편에게 급히 달려갑니다, 아마도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다시 야훼의 사자가 아내에게 왔다는 보고를 받은 마노아는 아내를 따라가서 사자를 만납니다. 그리고 사자의 정체성을 묻자, 사자는 내게 네 아내에게 수태고지를 한 천사임을 밝힙니다. 이런 만남을 경험한 마노아에게 아들을 낳으면 나실인으로 키울 것을 명령합니다. 사사기 13장에 얽혀 있는 삼손 탄생에 대한 스토리는 여기까지만 다룹시다. 단 한 가지의 무거운 교훈에 천착하며 질문해 보십시다. 왜 야훼의 사자는 득남 고지를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인 여인에게 두 번에 걸쳐서 먼저 찾아와 그녀에게 고지했을까요? 왜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 통념이 철저한 가부장적인 구조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노아는 우선순위에서 배제되었을까요? 그 답을 이렇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주지했다시피 사사시대는 하나님이 잊혀진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고 있었던 각양의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던 만신적 우상 숭배가 횡행하던 패역의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 삼손 탄생의 시기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블레셋 통치가 활발했던 40년을 보내고 있던 시대라는 것을 전제할 때 블레셋의 신이었던 다곤 신이 전반적으로 소라 지역을 강타하면서 종교적으로 휩쓸고 있었던 바로 그 시대였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하나님이 사라졌던 시기였다는 말이 적합합니다. 그런데도 주목할 만한 구절이 마노아의 아내에게서 나타났음을 사사기 13:6절에서 보고됩니다.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의 남편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오셨는데 그의 모습이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마노아의 아내의 입에서 두 번이나 연속적으로 고백 된 단어에 주목하십시다.“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자” 마노아의 아내에게서 두 번에 걸쳐 표현된 단어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엘로힘’의 번역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번역된 ‘이쉬 엘로힘’이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소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잊혀진 시대였지만, 그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소회입니다. 이런 영성을 갖고 있었던 여인이었기에 하나님의 사자는 마노아가 아니라, 마노아의 아내에게 먼저 온 것입니다,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영적 주도권을 마노아의 아내가 갖고 있었다는 결론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적 주도권을 갖고 있는 자에게 일하심의 우선권을 주신다는 교훈을 사사 삼손 탄생에 얽힌 메시지를 통해 독자인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본론) 오늘 본문도 바로 같은 맥락에 영적 주도권에 대한 강력한 임팩트를 주는 본문입니다. 요셉은 자기가 원했던 대로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를 헤어진 지 20년이 훨씬 넘은 시기에 만났습니다. 그것도 자기가 통치하고 있는 애굽에서 만났습니다. 이제 아버지와 형제들을 자기의 주군이었던 바로에게 소개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2인자로 있었지만, 아버지와 형제들을 주군에게 소개하는 일은 긴장되는 일이었습니다. 바로의 입장에서 볼 때 가나안에 거주했던 자들인 요셉의 식솔들은 이방인이자 미개한 족속이었습니다. 이렇게 가나안 거민들이 평가받고 있던 때라 요셉에게는 아버지와 형제들은 소개하는 일은 긴장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기기 이미 짜놓은 대로 5명의 형들과 아버지 야곱을 바로에게 소개합니다. 형들에게는 축산업에 종사하는 자임을 말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당시 축산은 바로의 재산상의 가치이기에 대우받을 수 있는 업이었고, 기름진 땅이었던 고센이 축산의 전진기지였기에 그곳에 거하게 만들려는 요셉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로를 알현한 5명의 형들은 바로에게 자신들의 직업은 목축을 키우는 축산업자임을 말했고, 고센의 땅을 허락받는 데 성공합니다. 이윽고 아버지 야곱과 만난 바로의 대화가 소개됩니다. 바로가 묻습니다. “네 나이가 얼마인가?” 야곱이 답합니다. 130년을 살았는데 내 인생은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지난 강해에서 이미 살핀 줄거리입니다. 이렇게 대화를 마친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요셉 프로젝트 그대로 고센이라는 비옥한 땅과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옥토인 라암셋에 거주하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음을 보고하며 본문 단락을 맺습니다. 하지만 이상의 본문 텍스트를 접하면서 오늘 수요 강해 설교를 통해 결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한 구절을 새겨보려 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이 구절을 읽으면서 짜릿한 전율을 느낍니다. 바로와 대화를 마친 야곱이 궁에서 나올 때 행했던 반응을 지나치지 않고 기록합니다. 야곱이 바로를 축복해 주었다고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다. 좋은 말로 표현했지만 야곱의 식솔들은 여러 가지의 상황 때문에 이방인의 땅인 애굽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주권적인 권리를 자랑스럽게 행하거나 주장할 자유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센이 자기 땅이 될 것이라는 영원한 약속을 받은 것도 없습니다. 그냥 야곱의 가족들은 다만 아들, 동생 덕으로 극심한 흉년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애굽에서 걱정 없이 살 게 된 것뿐입니다. 그러니 내세울 만한 것도 없고 자랑할 만한 것도 없는 무력한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주눅이 들만한 장소에서 주눅 들만한 대상과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 자리에서 그가 갖고 있었던 삶의 자존감 즉 주존감을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 성도는 영적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10절) 야곱은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고, 애굽이라는 이방 땅에서 붙어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자기의 험악한 세월을 이끌어주셨고, 인도해 주신 야훼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의 자존감을 인생 말년에 더 견고히 붙잡았습니다. 하나님 말고는 자신이 붙들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갖고 있었습니다. 야곱도 맨 처음부터 이런 하나님 중심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야곱도 대단히 세속적인 마인드로 무장했던 얍삽했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굴곡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자신에게 져주셨던 것을 경험하면서 그는 하나님 신앙으로 무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인생 말년에 하나님 신앙의 자존감으로 견고하게 섰던 야곱은 감히 바로에게 축복을 선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 우선의 신앙이었습니다. 가나안 정복 초기 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여 심판을 받습니다. 가나안의 왕 야빈을 도구로 사용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들의 압제하에 놓이게 하셨습니다. 20년이나 가나안에게 압제를 당하던 유다는 하나님께 회개하고 구원해 주실 것을 요청하자 하나님은 여선지자 드보라를 사사로 부르십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군대를 넘겨주시겠다는 확답을 받고 구원 전쟁을 시작하기에 앞서 아비노암의 아들인 바락에게 전쟁에 참여하여 하나님이 이루실 승리의 영광을 맛보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바락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선뜻 응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보라는 포기하지 않고 바락을 설득합니다. 바락은 가나안과의 전쟁에 드보라가 함께 참전할 것을 조건으로 마지못해 수락합니다. 결국 드보라가 말한 대로 하나님이 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셔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의 압제에서 구원하는 승리를 주십니다. 이 전쟁을 시작할 때 드보라가 바락에게 선포한 구절이 사사기 4:9절 메시지입니다.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무엇을 선포한 것입니까? 전쟁에서는 이길 것이지만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있게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바락은 승리를 맛보는 주역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씁쓸한 예고였습니다. 예고한 대로 하나님이 다 싸워 이겨놓으신 전쟁의 기쁨은 헤벨의 아내 야엘과 드보라에게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차지한 드보라는 승리하게 하나님을 사사기 5장에서 드높이며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드보라 사사시대를 그려냅니다. 바락은 닭 쫓다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만 신세로 전락합니다. 바락에 하나님의 영광을 차지하지 못한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영적 주도권을 드보라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구약학자 전성민이 드보라 사사에 관한 담론을 자신의 해석서에서 이렇게 마무리를 하고 있는데 의미심장합니다. “마노아가 바란 것은 여인의 주도권 아래에서만 이루어질 뿐이었다.” (전성민, 『사사기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 213.) 마찬가지로 야곱은 영적 주도권만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바로라는 당대 최고의 실력자, 권세자 앞에서 하나님이 선포하시는 축복권을 갖고 그를 축복하는 엄청난 권위를 보여주었습니다. 실로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성하고 또 경성해야 하는 영적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께서 살아생전 그가 이루었던 인상 깊었던 은혜를 회고하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것을 CGN 방송을 통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회자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의 목양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하나를 소개해 주십시오.” 주저하지 않고 하 목사께서 이렇게 답했습니다. “러브 소나타 일본 집회 중에 있었던 이어령 박사의 세례식이었습니다.” 故 이어령 박사는 자타가 공히 동의하는 세속적 영역에서 최고의 지성이었던 분입니다.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으로 단 한 번도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은 적이 없는 자존감을 갖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그가 세례를 받을 때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용조 목사는 무릎을 꿇은 그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일은 단지 한 명의 목사가 한 명의 사람에게 세례를 베푼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은 의미의 사건이었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26:29절을 다시 한 번 곱씹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를 사수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 내어주어도 이것만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앙의 주도권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