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겨울, 화분에 심겨져 있던 나무들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얼어서 고사했습니다. 그래도 나름 교회 안에 있는 모든 화분들이 추위를 이기며 잘 자라주어 관리하는 사람 입장에서 너무 고마웠는데, 아쉽게도 작년 겨울에 세 개의 화분에 있던 나무들이 얼어 죽고 만 것입니다. 죽은 잎들이 너무 흉해 아내가 가지치기를 하고 화분 갈이를 해서 봄에 다른 것을 심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3층 베란다로 화분들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봄이 되면서 앙상하게 말라 완전히 고사된 화분 나무에서 조그마한 움직임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물을 준 것도 아니고 관리한 것도 아닌데 자생적으로 화분에서 신비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완전히 죽은 나무의 곁가지에서 새싹들이 움돋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움돋던 나무의 새싹들이 이제는 막 태어난 아기들의 수줍고 앙증맞은 모습처럼, 아니면 갓 결혼한 새색시의 수줍은 볼처럼 어찌나 예쁜 기지개를 펴는지 새싹들의 자태가 너무나도 아름답고 경이로워 보입니다. 지금 문화체육부 장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도종환 장관이 쓴 ‘담쟁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그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결국 그 벽을 넘는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시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떠벌이는 데 벽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보다 못한 탓에 인간이 최고라는 건방지고 입에 발린 헛소리를 함부로 내지 말아야하겠다는 겸허함으로 살아야 한다는 숙연함을 가져야겠다고 말입니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손을 잡고 올라가는 담쟁이’의 그 조화로움처럼, 이미 죽었다고 방치했는데 나는 인간의 그런 유기함에 주눅 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며 보란 듯이 새로운 생명을 움튼 화분 속의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한 나무처럼, 인위적으로 만든 괴물과도 같은 인간 바벨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4대강 보의 문을 열자 썩어 있던 강들이 다시 살아나고 주변 지형들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자연의 위대함처럼 그렇게 나 역시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의 순리를 역행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베란다에 있는 화분의 신비를 보며 가슴에 새겨봅니다. 이제 화려하지는 않지만, 죽음의 터널을 뚫고 다시 거듭난 화분을 교우들이 잘 보는 장소에 옮게 놓으려고 합니다. 해서 그 화분들을 보면서 인간만이 갖고 있는 교만함과 이기적 품성을 반성하는 거울로 삼아보려 합니다. 더불어 다시는 그 화분들에게 아픔을 주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 돌보는 열심을 내보려 합니다.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이 선생님이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새롭게 살아낸 화분 뒤로 배경을 삼아 주고 있는 교회 정원에 흐드러지게 활짝 핀 장미가 오늘 나를 유혹하는데 왠지 심쿵합니다. 남자의 계절은 여름인가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