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 예수’로 사신 ‘신앙적 그리스도 예수’
서울신학대학교로 편입학하기 위해서 81년 겨울, 부천에 소재해 있는 모교를 방문했습니다. 편입학 원서를 들고서 캠퍼스로 진입하는 순간 저는 천국에 입성하는 줄 알았습니다. 때마침 내리는 함박눈은 가뜩이나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모교 캠퍼스를 정말 아름다운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수채화 풍경으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천국(?)에 입성하는 날, 하나님께 이렇게 독백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서 초막을 짓고 살겠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신학생 시절의 환상적인 거품이 걷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몇 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주의 제자들로 살아갈 것으로 굳게 믿었던 신학생들이 중간고사 기간에 보여준 환상적인 커닝 콤비네이션들을 눈으로 보면서 당시의 신앙적 정서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되겠다고 온 사람들이 이게 뭐 어때서! 라고 치부하며 행했던 그 그릇된 일상은 편입학이라는 방법으로 가장 은혜(?)충만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나에게는 그로기 펀치였습니다. 이 절망스러운 일을 목격한 뒤에 도무지 해석이 안 되는 상황을 나름 이기기 위해 선택한 것은 군 입대였습니다. 시간을 벌자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군으로의 도피는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겁한 일이었고, 모난 자의 선택이었지만 당시의 이성과 신앙적 정서로는 어쩔 수 없었던 나의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36년 전의 일을 왜 떠 올리는가에 대해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맞이했던 정글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선택하여 찾아간 신학교는 ‘여기가 좋사오니!’를 연발할 천국이 아니라 정글이었음을 회상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당시 신학교는 정글이었습니다. 대형교회를 꿈꾸는 자들이 모여 있었던 정글, 사람을 많이 모았던 지역 정글의 선배들을 그리워하며 나도 언젠가는 그 반열에 서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던 정글이었습니다. 모교의 학부 시절은 물론 본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는 동안도 ‘역사적 예수’(사람 예수) 에 대하여 입에 올리는 것은 금기사항일 뿐 아니라 만에 하나 이 단어를 인용하면 불온분자로 찍히는 것을 감수해야 했으니 제 모교 서울신학대학은 정글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난 교단 신학교에서 신학의 과정을 경험하는 동안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보다 ‘갈릴리 예수’(사람의 모습으로 사셨던 그리스도)에 대하여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말장난하지 말라고 타박해도 이 부분은 뒤로 물러설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성향이 이런 나에게 진보적인 어떤 이는 이런 성향을 기회주의이고, 회색주의라라고 비판의 날을 세우겠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극단이 싫습니다.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더 더욱 경계합니다. 내가 ‘갈릴리 예수’ 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은 ‘역사적 예수’ 로서의 ‘갈릴리 예수’ 에 천착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군 예수께서 철저하게 소외된 자들이었던 ‘갈릴리 예수’ 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았던 예수는 적어도 나에게 영원한 신앙고백의 대상자이시자 그리스도이십니다. 난 이런 삶을 사셨던 주군 예수께 열광합니다. 교회가 근래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종용하고 압박합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그러나 차제에 말하고 싶습니다.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하라는 압박을 단호하게 거부한다고.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정말로 사랑하고 추구하며 따르기를 결단한 주군은 바로 이 분이라고.
“‘갈릴리 예수’로 사시면서 나약한 자들과 함께 사셨던 ‘신앙적 그리스도 예수’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