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를 시작하면서
무모한 일을 벌였습니다. 지난 수요일부터 욥기 강해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하면서 두 가지를 해보리라 마음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신약성서 중에 로마서를 정복하는 것, 그리고 구약 성서 중에 욥기를 설교하리라는 마음이었습니다. 2007년 10월 7일부터 2009년 9월 13일 주일까지 약 2년에 걸쳐 섬기는 교회에서 로마서 강해를 진행했고 마지막 강해를 하고 난 뒤, 하나님께 단 위에서 감사의 눈물로 응답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목사는 설교를 통해 교우들에게 무언가를 전하기에 앞서 먼저 공부하고 살아내야 하는 사람이기에 로마서 사역은 적지 않은 부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서 공부를 마치고나니 신학교 시절, 다짐했던 큰 짐 하나를 내려놓은 것 같은 영적 해방감 때문에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강해를 위해 공부의 과정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일이기에 더 더욱 그렇습니다. 이제 목회 30년 만에 신학교에서 꿈꾸었던 또 하나의 무모한 도전을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전술한 욥기 강해 사역입니다. 사역 현장에 나와 욥기를 부분적으로 만났을 때마다 가졌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신정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신학적 성찰, 인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심지어 자연과학적인 테제들을 신학화(Theologization)하는 능력을 갖추지 않고는 섣불리 접근하지 말자였습니다. 해서 감히 가까이하기 어려운 성경으로 욥기는 저에게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수요일부터 겁도 없이 욥기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고 첫 사역을 마쳤습니다. 저에게 용기를 준 사람은 의외로 구약학자가 아닌 이화여자대학교 조직 신학을 가르치는 양명수 교수와 독일 신학자 만프레도 외밍과 콘라드 슈미트였습니다. 사전적인 작업으로 이들이 쓴 ‘욥이 말하다.(분도출판사 간)’와 ‘욥의 길’(대한기독교서회 간)을 읽고 난 뒤 엄청난 감동을 받았기에 나름 결심한 결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글을 통해 제 스스로 강해를 결심한 이유는 욥기의 상투성과는 싸우고, 오히려 욥을 거꾸로 해석해 보려는 불온함에 천착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콘라드 슈미트의 이 말이 욥기 강해를 마음먹게 한 큰 힘이었습니다. 그는 욥기를 읽으면서 세 가지의 자세를 당부했는데 그 중의 하나, “유보적인 신학을 위한 어떤 시대는 언제나 있었다.”(p,60.)는 갈파가 저에게는 이렇게 다가왔습니다. “욥기를 읽고 완벽한 결론을 내려고 하지 말라” 텍스트는 언제나 시대의 콘텍스트에 따라 해석의 여부가 결정되기에 신학은 콘텍스트의 유연성에 있어서 강직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 나름의 목회 신학에 슈미트 교수가 박수를 쳐주는 듯해서 용기를 가져보기로 했습니다. 이제 현장에서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에게 욥기를 현재화시키는 숙제가 저에게 남아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대가들을 통해 용기를 받긴 했지만 지금의 소회로는 어지럽게 깜깜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든든한 구약학자 친구 두 명을 또 괴롭혀야 할 것 같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언제 마치게 될지 모르는 대 장정이기에 더욱 부담이 되는 사역이지만 ‘구약 성서 신학의 현장화’라는 대단히 중요한 숙제를 안겨주신 하나님께서 적어도 실수하지 않으실 것을 믿기에 스가랴가 말한 대로 타나 남은 검게 그을린 장작나무 같은 부족한 사람이 무모한 도전의 스타트라인에 섰습니다. 제 서재의 가장 가까운 책장에 강해를 위해 준비해 둔 약 20권의 욥기 관련 책과 자료들이 놓여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부담으로 자료들이 저를 노려보고 있지만 이 여행을 함께 떠날 우리 세인 지체들의 따뜻한 응원이 있으면 아름다운 여행이 될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이 여행에 가능한 많은 지체들이 함께 동승해 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