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5일 대림절 세 번째 주일 설교 제목: 이루심 본문: 이사야 9:6-7 서론) 종교인이자 역사가였던 씨알 함석헌 선생이 쓴 대 걸작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보면 선생이 남긴 유훈 중에 아주 흔쾌하게 이성을 뒤흔드는 어록이 있습니다. “역사는 두 가지로 남는다. 하나는 뒤에 남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속에 남는 것이다. 보통 일반적인 역사라 할 때는 뒤에 남는 역사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2016,p,443) 선생의 말에 동의하고 인정한다면 한 가지를 되새김질하게 됩니다. 뒤에 남든, 속에 남든 역사는 반드시 남는 것이기에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역사를 결코 허투루 살지 말아야 한다는 각인입니다. 2019년 12월 15일에 내가 살고 있는 시분초(時分秒)는 나의 역사입니다. 아주 가끔 쓰는 기독교적인 용어 중에 사도행전 29장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아시는 것처럼 사도행전 28장에서 끝이 납니다. 28장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본인이 순교할 땅에서 바울이 끝까지 행했던 그의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거침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쳤다는 역사였습니다. 저는 바로 이 대목에서 전율하는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조금 세심히 사도행전을 마감하는 28:30-31절을 묵상해 보십시다. 바울이 로마의 사설 감옥에서 행했던 하나님 나라의 전파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하여 담대히 가르쳤을 때, 그가 2019년 12월 15일을 생각하고 가르쳤겠습니까? 전 세계에 그가 전한 복음으로 인해 약 30억(신,구교 합산) 정도의 예수의 제자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길리기아의 작은 도시인 다소에서 탄생한 추남 바울이라는 한 사람의 역사로 인해 전 세계의 문명이 뒤 바뀌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 사람의 역사 살아내기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바울의 사도행전을 소개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역사 끝자락에서 끝까지 붙들었던 것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모든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붙들었던 것은 ‘그 분의 이야기’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이 붙들었던 것은 ‘HIS STORY’ 즉 그 분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 할 때 크로노스의 시간의 분기점을 이렇게 나눕니다. 기원 전(Before Christ)과 기원 후(Anno Domini)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과 그 분의 탄생 이후로. 이것을 전제할 때 역사의 맥을 이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지금도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를 이어가는 주체이자 그 역사를 지금도 이루시는 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대림절 세 번째 주일에 저는 이 역사를 이으셨고, 또 이루시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중요한 키워드 ‘이루심’에 대하여 조명하려고 합니다. 본론) 본문으로의 여행을 떠나 보십시다. 본문은 지금으로부터 2700여 년 전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났던 역사를 지금 우리들의 눈앞에서 고스란히 펼쳐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다시 말해 그 때의 역사가 남아서 보고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목사들이 성탄 절기에 많이 인용하는 성경입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보십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우리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이미 학습되어 있는 뇌의 회로가 작동합니다. 여기에서 제 1 이사야가 언급한 태어난 아기는 앞으로 태어날 메시야라는 선이해의 회로입니다. 이 메시야는 4가지의 별명을 갖고 태어날 것인데 기묘자이자 모사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자, 평강의 왕이 될 것이라는 이미 학습된 지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를 굳게 세울 존재가 될 것임을 분명히 예언자가 예언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아기는 누구일까? 가장 보편적인 보수적 학자들이 주장한 대로 해석하자면 아마도 주군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그 누구일 것이라는 이해입니다. 저 역시 복음주의권에 있는 목사이기에 이 주장에 대하여 별다른 반론을 제시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해석의 차원을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접근을 맺는다고 하더라도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역사적 정황을 무시한 채로 해석하는 것은 성서적이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본문의 역사적 정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작업을 주석적 작업으로 먼저 드리려고 합니다. 이것을 전제하는 것은 함석헌 선생이 말한 대로 올바르게 남겨진 역사의 내용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성경 저자의 의도를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택한 본문 텍스트는 이사야 9장이지만 이 내용의 역사적 흐름은 7장부터 시작됩니다. 예언자가 본문의 메시지를 전하는 시대적인 정황은 BC 735년(혹은 733년)으로 추정되는 아람(시리아)과 에브라임(북왕국 이스라엘)이 동맹하여 남 유다를 침략한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전 세계의 패권은 신흥 강자였던 아시리아 즉 앗수르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앗수르는 자기들의 강력한 힘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의 여러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으며 그 국가들을 신하 국가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굴욕을 당하고 있던 에브라임(북쪽 이스라엘)과 시리아(아람)가 나름 신하국가로서는 힘이 있던 터라 서로 동맹을 맺어 반 앗수르 정책을 폈고, 이 연대에 더 작은 나라였던 남 유다를 강제적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 유다의 왕이었던 아하스는 당시 종교적인 지도자인 이사야의 지도에 따라 도리어 친 앗수르 정책을 폈기에 동맹한 두 나라에게는 눈에 가시거리였고, 이런 이유로 아하스를 축출하고 꼭두각시 왕인 타벨(두로)의 아들을 왕으로 세워 유다를 자기들의 연합 전선에 무조건 굴복하도록 하기 위한 계산으로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시리아-에브라임이 동맹으로 유다에게 일으킨 주전 735(733)년의 전쟁입니다. 군사적인 정황으로 보아서는 이 전쟁은 두 나라 연합국에게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유다의 패배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7장이 시작되는 1절의 보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예언자 이사야는 두 동맹국의 참패를 예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다에게 승리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전쟁을 앞두고 있었던 남 유다의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약속하심을 믿지 못하고 대단히 두려워하며 공포에 젖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두려움에 젖어 있었던 아하스에게 분명한 확신을 주고 담대할 것을 기대하던 이사야 예언자는 그 유명한 7:14절의 메시지를 예언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구절 역시 우리들이 이미 학습된 대표적인 구절입니다. 여기에 등장한 처녀는 마리아로, 아들을 예수로 해석한 학습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구절을 마태복음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마태가 인용합니다. 마태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이사야 7:14절을 그렇게 불가피하게 인용한 것과 적용 한 것에 대하여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궁극의 해석을 도출하려고 할 때 저 역시 큰 차이 없이 수용합니다. 아마도 마태 공동체는 분명히 그렇게 아기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여야 했고 또 그렇게 해야만 유대인들을 위해 쓴 복음서로 알려진 마태복음의 저술 의도가 맞아 떨어짐을 저 역시 동의하기에 구속사라는 큰 그림의 틀에서 메시아 탄생의 해석으로 접근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제 1 이사야 예언서의 저자로 인정한 예언자 이사야가 설명한 이사야 7:14절의 처녀와 아기는 결코 마리아와 예수님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처녀’로 번역한 히브리어 ‘알마’는 처녀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고 아이를 생산할 수 있는 가임 여성인 ‘젊은 여자’를 의미하는 단어이기에 이 젊은 여자는 아하스의 아내이든지 아니면 그의 후궁 중에 한 명입니다. 동시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갖고 탄생할 아들은 아기 예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여인들 가운데 태어난 왕자 중에 한 명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정확한 해석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사야 7:14절에 기록된 아들을 아하스의 아들인 남 유다의 제 13대 왕인 히스기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제 7장에 대한 해석을 이 정도로 정리하고 오늘 본문 9장으로 옮기겠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탄생한 아이에 대하여 임마누엘이라는 이름 말고 또 다른 별칭을 본문에서 4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① 기묘자이자 모사(펠레 요아츠)입니다. 설명하자면 뛰어난 지략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성경에 이 단어를 ‘wonderful counselor’ 즉 ‘놀라운 상담자’라고 번역했습니다. ② 전능하신 하나님(엘 깃보르)입니다. 이 단어 역시 설명하면 ‘위대한 용사 혹은 ’하나님 같은(God-like)’이라는 뜻입니다. ③ 영존하시는 하나님(아비아드)입니다. 설명하면 ‘장수하는 통치자’라는 의미입니다. ④ 평강의 왕(샤르 샬롬)입니다. 설명하면 ‘경제적, 사회적으로 백성을 잘 살게 하는 지도자’라는 의미입니다. 종합해 보십시다. 아하스에게 이렇게 거의 완벽한 지도자가 탄생하게 함으로서 유다를 보존하게 하신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예언자를 통해 선포한 것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본문 7절 전반절을 보면 이 완벽한 지도자를 예언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보증합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저는 예언자 이사야가 보증한 지도자가 히스기야를 말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별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로 오늘 본문을 읽을 때마다 더 심혈을 기울여 주목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이 중요한 메시지를 나누기 위해 7절 후반절을 마저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 짧은 구절이 대림절 세 번째 주일에 저를 요동하게 만든 메시지입니다. 적어도 남 유다를 통치하셨던 하나님은 주전 8세기에 격동하던 이스라엘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셨다는 것을 이 짧은 구절에서 명확하게 발견합니다. 주지했듯이 남 유다는 시리아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연합 동맹국에게 결코 이길 수 없는 약소국가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유다를 보호하셨습니다. 약해 빠진 지도자였던 아하스가 흔들리지 않도록 너의 자손에서 태어날 아이는 뛰어난 지략가가 될 것이고, 위대한 용사가 될 것이며, 장수하며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기에 나라가 안정적으로 설 것이라는 확신까지 주셨습니다. 더욱 결정적인 위로는 내가 너희 나라와 임마누엘 할 것이라고 축복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까지 유다에게 집착하셨습니까? 우리는 이 대목에서 대단히 감동적인 은혜에 도착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아들들에게 그리고 모세와 다윗에게 한 번도 번복하지 않고 말씀하셨던 내용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7:7-8절을 음미해 보십시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택한 백성이 되리라”의 언약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으로(아브라함에게), 또 어떤 때는 쌍방언약(모세와 다윗에게)으로 이 약속을 역사를 통해 재확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의 주체이셨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에 있어서 별로 칭찬할 것이 없었던 아하스에게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 역사의 약속을 지킬 것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 하반절에서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이 일하심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그렇습니다. 주군이 이렇게 하신 것은 그 분의 열정, 열심 때문이라고 선포합니다. 이제 주목해야 할 오늘 대림절 세 번째의 키워드에 접근하겠습니다. 남 유다 즉 당신이 택하신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열심은 곧바로 성육신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으로 이어졌습니다. 도무지 자격이 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을 구속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결국은 주군이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신 그 사랑이라는 매개로 이루신 은혜가 아기 예수의 탄생이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조금 더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성취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림절 세 번째 주일에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주시는 영적 레마의 키워드를 받겠습니다. ⁜ 주군이신 예수님은 앞으로도 나를 위해 계획하신 당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민수기 23:19절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계획하신 일은 다음과 같은 진정성을 갖고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한 계획 세우심에 결코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약속하신 내용을 반드시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삶이란 하나님과 사람의 합작품(partnership)이다.”(아브라함 조슈아 헤셀, “누가 사람이냐?”, 한국기독교연구소,p,97.)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파트너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파트너십을 갖고 당신이 행하신 계획을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분이심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버리고, 뒤돌아선 적이 너무 많지만,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식언하시거나 변개하시지 않는 신실하신 주군이십니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은 본문의 아하스 왕처럼 분명히 자격이 되지 않는 존재들이지만 당신의 그 약속을 실천하시기 위해 아하스의 계보를 통해 완전한 왕위를 이을 아기를 탄생하게 하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의 주군이시자 기묘자이시며 모사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요, 평강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을 다시 이땅에 보내주실 것입니다. 그 분을 기다리는 대림절 세 번째 주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신실하신 약속을 이루실 아기 예수를 대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영국 세인트루이스 대학의 톰 라이트 교수는 다음과 같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담아야 할 말을 기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겸손과 십자가 중심의 자신감, 즉 오만함과 정 반대인 자신감을 가지고 새로운 과제를 시작해야 한다. 그 자신감에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분명히 인지하는 것을 전제한다. 오직 세상과 공유될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가 방향감각을 잃지 않게 한다. 이 일의 모형은 십자가로 가시는 예수님의 헌신적 사랑이다.” (톰 라이트, “우상의 시대, 교회의 사명”, IVP, 2016,p,280.) 이 글을 읽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제 노트에 메모해 놓은 이유가 떠올랐습니다. ‘세상과 공유될 하나님의 사랑만이’ 참 아이러니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도 공유하는 가치라는 톰 라이트의 말이 가슴을 쳤기 때문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사랑의 가치만이 저와 여러분이 걸어가는 방향 감각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만드는 은혜라는 그의 갈파 때문이었습니다. 100% 동의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주께서 깜(?)도 안 되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신실하심이 성육신을 통해 이루어졌고, 또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거침없이 주님이 이미 세워놓으신 신앙의 바른 방향에서 이탈하지 말고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일체의 것을 전하는 사명자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림절 세 번째 주간, 나를 위해 이루신 그 은혜를 자국을 나도 새기며 살아가는 귀한 절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나를 구원한 주의 십자가 그것을 믿으며 가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나 여전히 부족하나 나를 품으신 주의 그 사랑 그것을 믿으며 가네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나아갑니다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예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