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대림절 첫 주 주일 설교 제목: 자기 비움 (대림절 첫 길목에서) 본문: 히브리서 12:2-3 서론) 지난 주간, 인기 연예인으로 살던 한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녀를 향한 참 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세간에 전해졌습니다.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악플로 인한 자존감의 상실로 애꿎은 젊은 여성이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는 아픈 소식이 한 주간을 도배하다시피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인터넷 상에서 누군가를 지적하거나 언급할 때 실명제를 반드시 실시해서 악플을 단 자들에 대하여 분명한 단죄를 해야 한다는 주도적인 여론의 흐름이 대세를 이루는 것도 보았습니다.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누군가를 심리적이든, 육체적이든 죽이는 일에 대하여 단호하게 맞서야 하는 것이 오늘의 지성들이 해야 할 일이며, 또 이런 아픈 세상이 사라지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이어야 합니다. 참 아프게도 한 젊은 연예인의 죽음을 보면서 왜 이렇게 내가 사는 세상은 무너졌을까? 에 천착하며 한 주간 많은 생각을 하며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목사로서 세상이 아프게 보는 시각과 다른 한 편의 영적인 시각과 여백을 진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은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현직에서 세속적 물결과 맞서야 하는 목사이기에 아프지만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의 분위기에서는 그 누구도 말하지 않을 것 같아서 목사로 오늘을 안고 살아가는 저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왜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하지 못했을까? 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누구보다도 인기인이었기에 자기 관리에 대하여 더 철저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저는 첫 번째 졸저인 ‘시골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에서 소설가 장강명 작가가 쓴 ‘한국이 싫어서’에 대한 리뷰 글을 실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20대 중반의 계나‘입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저축은행에 취직을 해서 직장생활을 하는 평범해 보이는 여성의 삶을 살다가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흙 수저 출신이 도무지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호주로 이민을 계획합니다. 여러 가지의 악조건 속에서 호주의 모 대학원에 입학하여 우여곡절 끝에 회계학 석사를 취득하고, 꿈에도 그리던 시민권까지 취득합니다. 계나는 완전한 호주 이주를 실천하기 위해 한국에서의 마지막 삶을 타진해 보기로 하고 자기를 짝사랑하던 남자 친구와 2개월 동안 동거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결론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자기의 미래가 없다는 확신을 하고 남자 친구와 결별하고 다시 호주로 떠나는 글 전개가 이루어집니다. (하략) 저는 이 소설의 리뷰를 쓰면서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계나를 동의한다고 적시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계나의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나라가 계나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동의하기 때문이다.”(이강덕, “행복한 글 여행”,p,170.) 그러나 반면, 또 하나 주인공 계나의 삶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음도 분명히 했습니다. ⓵ 물질적인 만족을 이루면 자기에게 행복이 반드시 주어질 것이라는 착각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기에 말입니다. ⓶ 너무나 가볍게 생각한 성윤리의 일탈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계나의 혼전 동거(同居) 사실을 너무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사실혼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성적 욕망을 채워주는 출구로 동거를 그림으로 인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이런 성윤리의 왜곡이 대세임을 주지시켰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이 어떤 세대인데 혼전순결을 강조 하냐고, 또한 자기관리를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고리타분한 일이냐고, 그런 발상이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진 일인지 아느냐고 타박하면서 별종 같은 목사를 다 보겠다고 저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저는 목사이기에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이것만큼은 말해야 될 것 같습니다. 자기 관리를 실패한 것에 대하여 너그럽게 대하는 시대가 될 때 앞으로의 미래는 더 암담해질 것이라는 경고를 말입니다. 사람들이 왜 자기 관리에 실패할까요? 인간의 연약성 때문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름의 합리화를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기관리에 실패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작금은 사사시대의 속편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인 해석을 전제할 때 오늘부터 시작되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은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그 의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저는 오늘부터 시작되는 4주 동안의 대림절 시기에 교우들과 매 주마다 2019년을 살아가는 바로 이 시기에 아기 예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주는 키워드가 무엇인지를 되새김질 해보려고 합니다. 본론) 본문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행하셨던 놀라운 행위에 대하여 연이은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참다’(휘포메노)입니다. ‘휘포메노’는 원래의 의미가 ‘밑에 머무르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영어단어로 굳이 표현하자면 가장 가까운 단어가 ‘understand’가 아닐까 싶은 단어입니다. 저는 이 단어에 대한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말씀으로 주님이 체화된 이 주님의 사역을 가리켜 신학은 이것을 성육신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육신 사건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머무시기 위해 자신을 비하하신 사건이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은 자기를 낮추신 일대 사건이라는 말이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이미 알았기에 이렇게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 비밀을 이렇게 알렸습니다. 빌립보서 2:6-8절을 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머무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은 당신이 갖고 계셨던 참 많은 것을 포기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 되심을 포기하셔야 했습니다. 종의 신분으로 자기를 낮추셔야 했습니다. 더불어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십자가형 이라는 부끄러움의 극치를 견뎌내셔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거역한 자들의 배신도 견뎌내셔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제시한 히브리서와 빌립보서를 종합한다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사건을 다시 되새겨보는 대림절 첫 번째 주일에 주시는 가장 적절한 키워드가 보입니다. 무엇입니까? ※ 주님의 자기 비우심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림절 첫 주간, 우리들이 새겨야 하는 주님의 행동하심이 자기 비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주님이 자기를 비우셨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신적 행위였을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원래 하나님과 동등하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6절에 등장하는 단어 ‘동등 됨’ 은 헬라어 ‘이소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가 ‘똑같다’는 즉 ‘eaqul’의 의미입니다. 저울의 추가 한쪽으로 기운 상태가 아니라 같은 평형을 이룬다는 것을 의미할 때 쓰는 단어가 ‘이소스’입니다. 다시 이 단어의 의미를 설교에 적용한다면 주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그 십자가의 치욕이라는 것을 당하시면서 그 고통을 굳이 참으실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는 하나님과 동등 된 권위를 갖고 계셨다는 공식이 성립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그 권리를 버리셨다는 말은 그 분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를 비우지 않고서는 절대로 행하실 수 없는 일이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의 자기 비우심은 곧바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있는 방법을 여셨고, 오늘 저와 여러분은 그 구원의 은혜를 먼저 받은 자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왜 사사 시대의 후편이라고 담임목사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진단합니까? 우리가 살펴본 사사시대의 형편이 무엇이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사사기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을 복기해 보십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21:25)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이 옳은 대로 행했다는 기록은 오늘 보아도 의미심장합니다. 왜 의미심장합니까? 앞에서 잠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시대의 결과물임을 사사기 역사가가 사사기를 끝맺는 절에서 고발한 것입니다. 자기의 소견이 옳다는 것에서 물러설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그런 본능적인 속성을 갖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막 무지한 나를 성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일까요? 지난 주, 기도원에서 성경을 읽다가 만난 구절입니다. 야고보서 1:23-25절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거울이 하는 역할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얼을 반사하여 비쳐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거울’ 즉 ‘에솝트론’은 돌 거울이기에 자기를 또렷이 비쳐주지 못하는 거울입니다. 그래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기 얼굴과 모양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기가 불편해 자기를 추스르는 일에 소홀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거울 본연의 역할을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야고보 기자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양을 반듯하게 하지 못하는 상황을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유비를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 기자의 도움으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막 무지한 나를 성찰하여 나를 올곧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적 거울이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지 않으면 내가 지근 어떤 상태인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 거울로 삼는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제 머리 오른쪽 그러니까 저에게는 왼쪽 머리의 가르마 윗부분에 탈모가 너무 심해서 보기에 흉할 정도가 되어 조금은 곤혹스럽습니다. 세월 탓이니까 괜찮아! 라고 자위하기는 하지만 근래 이런저런 육체적인 노쇠함이 눈에 보이고 많이 나타나 우울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약 2주 전에 아내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대편으로 가르마를 타 봐요. 영상으로 보이는 모습이 너무 흉해서 안 되겠어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왼쪽으로 가르마를 타보았더니 이번에는 아내가 가발을 쓴 것 같으니까 그냥 원래대로 하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다시 빠진 머리의 한 부분이 여지없이 화면에 등장합니다. 주일 강단에 설 때는 내 딴에는 머리가 많이 빠진 부분을 거울에 비쳐 보고 어떻게든 극소화하기 위해 나름의 변장을 하고 서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거울은 나의 외형을 바르게 만들어 주는 필수품입니다. 자기 비움은 말씀에 자기를 비출 때만 가능한 영적 행위입니다. 베드로가 왜 물이 빠졌을까요? 마태복음 14:28-30절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너무나 익숙하게 우리에게 알려진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하다보면 상당히 세밀한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부력(浮力)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인터넷 사전을 찾아보니까 이렇게 나와 있었습니다. “물이나 공기 중에 있는 물체를 위로 떠오르게 하는 힘” 이에 비해 물리학 사전에는 이 부력을 조금 더 세밀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유체가 유체에 잠긴 물체를 중력과 반대 방향으로 밀어내는 힘으로, 부력의 크기는 물체가 잠긴 부분의 부피에 해당하는 유체의 무게와 같다.” 이 말을 풀자면 사람이 물에 잘 뜨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힘을 최소화시킬 때 잘 뜬다는 말이 됩니다. 물리학적인 이유가 분명한 부력의 원리는 영적인 차원에서도 기가 막히게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 때는 그가 갖고 있었던 물리적인 힘을 뺐을 때입니다. 왜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의 목적은 지금 주님에게로 가는 것이었기에 그가 갖고 있는 물리적인 생각을 아예 잊어버렸습니다. 문제는 그가 물 위를 걸으면서 그의 생각이 다시 차올랐다는 점입니다. 내가 지금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의 생각의 부력이 그를 사로잡았을 때 그는 물에 빠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을 갖고 있는 한 자기를 비울 수 없습니다. 자기 비움은 내 생각의 의지에서 말씀에 비추었더니 말씀의 방향이 옳다고 인정할 때 반응하여 생기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비움은 언제나 말씀의 조명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의 조명을 받을 때만 가능한 자기 비움은 대림절의 키워드입니다. 다시 말해 대림절은 주님이 자기를 비우신 것처럼 우리도 나를 비우는 절기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나를 비우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영적 반응을 새기고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본문 2절 전반절로 돌아갑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말할 것도 없는 절대적인 명제가 본문에 등장합니다. 자기를 비우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영적 자세는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명제는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실패한 이유에서 언급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것은 내 세속의 중력을 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인 계산과 이해타산을 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볼 때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대목에서 나를 비워가는 삶에 대한 아주 선명한 영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주군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이며 동시에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주체이기 때문이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영적 팁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려면 언제나 부족한 나에게 믿음을 주시고, 나를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신 예수를 바라볼 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남성 소그룹이 읽고 있는 ‘하나님의 모략’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모략 이후’를 기도원에 가지고 올라가서 읽었습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여기에서 영국이 낳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여성 추리소설 작가이자 저술가이며 번역가 그리고 신학자인 도로시 L. 세이어즈의 명언을 재인용합니다. “세상에서 그것을 관용이라고 하지만, 지옥에서는 절망이라고 한다. 그것은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죄다. 아무 것도 돌보지 않고, 아무 것도 알려 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개입하지 않고, 아무 것도 누리지 않고, 아무 것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목표를 두지 않는 죄다. 아무 것도 위해서 살지 않지만 그래도 살아 있다. 위해서 죽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 이후”, 복 있는 사람, p,158) 상당수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인 타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장입니다. 간섭 받기를 죽기보다 싫어하고, 동시에 간섭하기도 싫어하는 것이 오늘 나와 여러분 그리고 그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틴 부버가 말한 대로 ‘나’와 ‘너’라는 절대적이자 인격적인 관계를 모독하고 도리어 일체의 타자를 ‘그것’으로 만들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전혀 무관하며, 무관심하게 만드는 절망의 시대가 진짜 오늘인 것 같습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그 대상은 하나님에게 소급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무슨 상관인가? 의 싸늘함이 지금 저와 여러분을 휘감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이신 예수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이며, 그렇게 살다보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사사 시대를 방불 하는 집단적 좀비들로 들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에 자기 비움은 허공을 치는 메아리 성 슬로건이요, 귓등에 차지 않는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고리타분한 메시지로 들리는 공염불이 된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할 것은 대림절의 키워드이자 가슴에 새겨야 하는 나침판적인 교훈은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그랬던 것처럼 자기 비움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살아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히브리서 12:2절 전반절의 주인공으로 살아 보겠다는 치열한 결단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다시 한 번 기대해 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대중가요 가수가 ‘아모르파티’라는 제목의 노래를 불러서 적지 않은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부르는 이 노래를 우연히 방송에서 곁눈질하면서 본 적이 있습니다. 분위기는 말 그대로 ‘막 노는 것’의 분위기였습니다. 문자 자체의 의미가 ‘운명을 즐겨라’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가볍게 노는 느낌이 들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습니다. ‘아모르파티’는 프리드리히 니체가 막 살면서 인생을 즐기라고 만들어낸 말이 아님을 아는 저는 못내 씁쓸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운명애(運命愛)’ 라고 번역되는 ‘아모르파티’라는 말을 니체가 언급한 이유는 도리어 삶을 막 되먹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사랑하라는 의미였습니다. 내 인생을 사랑하려면 후회하지 않는 삶의 자국을 남겨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후회하지 않는 스티그마를 남겨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 흔적은 주군이신 예수께서 남기셨던 자기 비움이라는 흔적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공동체의 지체 여러분 ! 주군을 바라보십시다. 믿음을 주시는 것은 물론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래서 자기를 온전하게 비우셨던 주님처럼 우리도 나의 자기애를 비워내는 대림절기를 보내십시다. 대림절기의 첫 번째 키워드는 자기 비움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부서져야 하리 부서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무너져야 하리 깨져야하리 더 많이 깨져야하리 씻겨야하리 깨끗이 씻겨야하리 다 버리고 다 고치고 겸손히 낮아져도 주 앞에서 정결타고 자랑치 못할 거예요 부서져야하리 무너져야하리 깨져야하리 깨끗이 씻겨야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