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1일 목요일 성서일과 묵상 기울어지지 말자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66:8-20, 창세기 6:5-22, 사도행전 27:1-12 꽃물 (말씀 새기기) 사도행전 27:10-11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마중물 (말씀 묵상) 목회를 하면서 理性의 역할에 대해 참 많이 성찰하며 달려왔다. 나름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성적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적만능주의나 이지적인 역할만을 강조한 주지적 관점에서 목회를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성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광신과 맹신적인 상태로 신앙의 통로를 강요하던 중세 유럽 사상이 얼마나 기독교 역사의 과정에서 오늘 존재하는 기독교에 엄청난 부담을 짊어지게 했는지 항상 민감하게 성찰하며 목양의 임하려고 노력했기에 이성적 판단, 생각하는 신앙에 대해 부심하며 목회의 방향성을 잡으려고 노력했던 것도 사실이다. 올바른 신앙의 궤도로 들어서도록 만들기 위해 이성의 역할을 지대하며 중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어떤 사상이든, 철학이든, 관점이든, 심지어 종교든 ism 化 되면 그때부터 이데올로기로 굳어질 것이 자명하기에 나는 이성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이성주의에 대해 경계한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은 것은 이성적 판단 때문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선장과 선주는 곧 학습되어 있는 이성의 자리에 있다고 판단한 탓이다. 이럴 때 신앙인은 아니 목사로 사는 나는 대단히 예민해진다. ‘바울의 말’을 믿어야 하는 당위가 세속의 영역에서는 좀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또 궁색한 변론이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럴 때 하나님께 엎드린다. 엎드리는 것 말고는 영적 분별력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이성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맹신과 광신적인 판단으로 해석되지 않고 선명하고 세미한 터치함으로 내게 접목되는 것을 나는 수없이 경험했기에 현장에서 엎드린다. 두레박 (질문) 나는 목양의 현장에서 광신적인 현상과 철저한 이성주의로 해석하려는 기울어진 운동장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날마다 묻는다.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결코 편향된 해석에 떨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참 힘들고 고루한 싸움이기는 하지만 철저한 신학적 균형을 잡고 목회하고 성경을 해석하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목회에 유리한 쪽으로 상황들을 만들어가지 말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으로 목회의 방향성을 끝까지 유지하고 그렇게 걷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5일 동안 항암 치료에 들어가는 지체의 일거수일투족을 보호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