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너는 하나님의 영으로 ●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찬 338장) ●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찬 290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사도행전 26:24-29 ● 제목 : 땅에서 하늘처럼 사는 그리스도인② 1) 본문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해야 할 영적인 태도는 무엇입니까? 2) 바울이 본문에서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이유는 무엇 때문이며, 이를 사울과 비교해 보자. ● 사도행전 20:22-24절:
● 사무엘상 15:23절: |
3) 누가와 같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결단을 선포합시다.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셀원들의 기도 제목을 위하여 ② 공동체를 위한 사역을 위하여 (신년 사업자 심방, 오세아니아 선교회 총회, 양육 3,4기 사역) 2) 한 주간 사역하기 ① 수요 셀별 기도회 참석을 위해 서로 독려하기 ②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중보하기 3) 셀 그룹의 지체들 중에 나약한 지체들을 위하여 치유 기도하기 4)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② 셀 공동체의 지체들이 은혜를 받도록 중보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및 교제 7) 폐회: 주기도문 8) 파스타: 준비된 대로 | 설교요약 (SUMMARY)2014년 1월 12일 주일 낮 예배 설교제목: 땅에서 하늘처럼 사는 그리스도인(2) 본문: 사도행전 26:24-29
우리 교회 2014년 표어인‘땅에서 하늘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본문 29절의 바울의 선포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감을 갖고 내가 그리스도인 인 것을 자랑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영적 교훈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땅에서 하늘처럼 사는 예수쟁이로 승리하기 위하여 2. 언제 어디서나 늘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언제 어디서나 늘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는 역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외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늘’이라는 이 문구는 쉽게 생각할 문구가 아닌 상당히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실천할 수 있는 문구입니다.
‘언제’라는 단어의 의미는 ‘시간’을 말하는 의미이고, ‘어디서’라는 단어의 의미는 ‘공간’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또‘늘’이라는 단어는 ‘불변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정리한다면‘언제 어디서나 늘’이라는 개념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백성들이라면 시공간에 상관이 없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이 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기본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바울은 지금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이 되어 심문을 당하고 있는 시간적인 제약을 받는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더불어 그는 이제 얼마 후면 로마라는 공간으로 자신의 거취가 옮겨져서 그곳에서 순교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목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과 공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작별을 할 때 예루살렘 행을 만류하는 그들에게 도리어 이렇게 역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0:22-24절에서,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정도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기에 그는 예루살렘으로 담대히 올라갔고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오면 그를 죽이기로 금식까지 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약 40여명의 유대 율법주의자들에게 핍박을 받아 매질을 당하고 구금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심지어는 살해를 당할 위기까지 당했음을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21-25장에 걸쳐 상세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위협의 테두리 안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언제 어디서나 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베스도, 헤롯 아그립바 2세, 버니게, 그리고 고소한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이렇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결박된 채로 말하였다. 그것이 내가 기도하는 바입니다. 지금이나 나중이나 왕뿐 아니라 오늘 여기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여러분 모두가 나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결박된 것만 빼고는 말입니다.” (유진 피터슨 메시지 번역)
인간은 자신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이 갖고 있는 고유한 정체성을 변질시킬 수 있는 동물입니다. 언제 어디서 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분을 휴지 조각처럼 버리고 비 그리스도인처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은 사무엘상 9장 2절에서 그가 왕이 되기 전을 “준수했다”고 묘사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준수했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토브’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용하셨던 보시기에‘좋았더라’의 단어입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청년이었는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성품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열심과 배려하는 속 깊은 마음까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사무엘상 9:4-5절을 보면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그 곳에는 없었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녀 보았으나 찾지 못하니라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 가던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아버지께서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하니”사울이 포기하지 않는 성실과 열심까지 있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아버지를 염려하는 성품을 가진 여러 모로 볼 때 참으로 배울 점이 많은 장점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백성들에 의해 선택되자 그는 자신은 그럴만한 자격이 없는 자라고 생각하여 백성들 사이에 숨어 있었던 겸손함까지 갖춘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사무엘상 10:21-22절). “베냐민 지파를 그들의 가족별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그들이 또 여호와께 묻되 그 사람이 여기 왔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그가 짐 보따리들 사이에 숨었느니라 하셨더라”
이렇게 꽤 괜찮았던 사울의 인생이 아주 비극적인 왕으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차라리 왕이 되지 않았으면 더욱 좋았을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추락한 이유는 언제 어디서나 늘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왕이 되자 무섭게 변질되었습니다. 왕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위를 죽이려고 했고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의 선지자가 해야 할 일까지 월권하는 교만한 자로 변질됩니다. 그는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의 사람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렇게 산 사울은 가장 큰 비극인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15:23절 하반절을 보면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하나님의 사람이 변질되는 이유는 말씀을 버렸기 때문이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언제 어디서나 늘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사라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없는 인생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이라는 위대한 복음서와 성령행전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사도행전을 저술한 의사 누가에 대한 기록이 디모데후서 4:10-11절에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울의 목회서신인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감옥에 구금되어 있는 상태에서 순교를 앞두고 쓴 편지로 저술 시기가 약 AD66년경으로 추정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순교 직전 가장 육체적으로 외롭고 힘든 시기였다는 말이 됩니다. 더군다나 겨울은 곧 닥칠 때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바울을 도와주었던 상당수의 많은 지체들이 바울의 상태를 외면하고 바울을 떠나버렸습니다. 데마는 바울을 버리고 세상을 향해 갔습니다. 데마와 같이 변질해서는 아니지만 그레스게와 디도도 사역 때문에 바울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외롭고 추운 로마의 감옥에서 누구도 돌보아 주지 않는 바울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바울의 동역자요 위로자요 친구가 되어 준 사람이 누가였습니다.
바울과 같이 출신 성분이 유대인도 아니었고 이방인이었던 누가는 사도행전 16장에 의거하면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이 진행되던 AD 50-52년부터 그를 도와 함께 동행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로부터 계속해서 10여년 이상 바울과 함께 고난에 동참했고 같이 위험에 처했고 같이 배고픔도 경험했으며 같이 죽음의 위기도 경험했고 난파, 매질 등등의 수많은 고난을 함께 당했을 것입니다. 상황이 이 정도면 그리고 시간도 이 정도로 흘렀다면 누가는 얼마든지 데마처럼 바울을 버리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누가는 시간과 공간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흔들리거나 변질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 바울을 끝까지 도왔습니다. 그를 떠나지 않고 바울의 순교를 지켜 보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라는 하나님의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땅에서 하늘처럼 사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사는 자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없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일어난 ‘밀라이 학살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출처: 윤상헌, 김준형 저, 언어의 배반 중에서) 『1968년 3월 16일 미군이 남베트남 밀라이 마을로 들어가 504명의 비 무장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미군은 마을에서 베트콩을 찾지 못하자 어린이, 노인, 부녀자들을 마구 죽이고 화염 방사기로 마을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런데 헬기 조종사 휴 톰슨 준위가 이를 목격하고 상급자의 명령과 다스 병사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톰슨은 오히려 헬기의 총구를 아군인 미군에게 돌리며 학살을 계속할 경우 발포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주민 10여명을 구해내어 탈출시키고 본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나마 학살이 그쳐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영웅적인 행동 덕분이었다. 훗날 톰슨 준위는 무공훈장을 받았고 그 뒤로부터 미 육군의 장교가 될 예비 장교들은 밀라이 학살을 반드시 공부하고 톰슨 준위의 인터뷰가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시청하는 시간을 갖는다.』
전쟁터와 같은 사람을 살육하는 비인간적인 장소에서조차도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을 사수하려고 했던 한 군인의 모습에서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나오게 되었지만 그래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톰슨 준위와 같은 자가 바로 진정한 군인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상황에 무너지고, 조건 때문에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터치하지 않으실 것 같은 공간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인임을 포기해서야 되겠습니까?
달라스 윌라드 박사의 ‘마음의 혁신’이라는 책에서 “한 마디로 삶이란 영적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발을 딛고 있는 이 공간,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간의 순간순간이 모두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말아야 합니다.서울 청파 감리 교회의 평생 표어가‘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 하늘처럼 살고 싶다면 언제 어디서나 늘 그리스도인으로 삽시다. 그래서 바울처럼 언제 어디서나 늘 사도행전 26:29절을 선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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