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3.11.10 셀 사역2024-04-22 12:24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생각했던 고정 관념 중에서 제 3자의 말이나 독서 등등을 통해 흔들렸던 기억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나의 영혼이 잠잠히 (복음성가)
● 내 안에 사는 이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9:7-15
● 제목 : 요동치 아니하리.
1) 요담이 본문에서 아비멜렉이 가시나무임을 고발하기 위해 인용한 우화를 내 언어로 말해보자.
● 본문 8-15절을 자세히 읽어보자.  

2) 본문에서 등장하는 앞 세 나무와 뒤에 나오는 가시나무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이었는가?

1) 인식의 차이는?
2) 주일 설교의 테마와 관련하여 적용해 보자.

  

3) 설교를 통해 소개된 바울과 다윗의 공통점을 말해보고 나의 신앙과 관련하여 결단할 내용이 있다면 함께 진정성이 있게 나누어 보자
바울
다윗
그리고 나  

 
사역하기 (WORK)
1. 교회 중보기도
1) 셀에 소속되어 있는 지체들이 사역하고 있는 조별 가을 열린 모임의 효과적 승리와 결실을 위하여
2) 12월 8일에 있을 행복 나눔 축제를 위하여
3) 연약한 교우들의 치유를 위하여
4) 고입을 앞두고 있는 자녀들을 위한 중보 사역
5) 양육 반과 리더 반의 승리를 위하여
6) 담임목사의 목양 사역을 위하여 
7) 1년을 결산하는 나의 영적인 결산을 위해 
2.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3. 셀 그룹의 지체들을 위한 치유기도 (환우들을 위한 집중기도)
4. 헌금 기도
5. 광고 및 교제
6. 폐회: 주기도문
7. 파스타 - 준비된 대  

 
설교요약 (SUMMARY)
2013년 11월 1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요약본문 : 사사기 9:7-15 / 제목 : 요동치 아니하리.
오늘 본문에는 아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상의 자리에 오른 자를 비토하고 그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개인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발하는 아주 유명한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앞 절인 사사기 9:5-6절에 기드온이 세겜에서 낳은 아들인 아비멜렉이 혈연과 지연을 등에 업고 여론은 호도하여 자기의 사람들을 만들고 그들에게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름으로 권력을 쟁취하여 왕좌를 차지하고, 자신이 지연으로 이용한 세겜 사람들과 밀로 모든 족속들이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웠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에서‘밀로 모든 족속’이라고 번역된‘밀로’는 세겜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 이름으로 종교적인 상징 처소인 밀로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추대함으로 드디어 아비멜렉은 자신의 야망을 채우는 데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았던 아비멜렉의 피 흘리는 쿠데타 과정에서 그의 막내 이복동생인 요담은 극적으로 숨어 있다가 그 자리에서 탈출을 하는 데 성공을 했습니다. 요담은 자기의 이복형인 아비멜렉의 악행을 직접 본 사람이었고 증인이었습니다. 그는 치 떨리는 장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아 그리심 산으로 피신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비멜렉의 악행을 동족에서 선포하는 우화를 외치기에 이릅니다. 왜 요담이 그리심 산으로 피신하여 나무 비유를 선포하였을까? 에 대하여는 학자들의 논쟁이 여럿 있지만 그리심 산이 모세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위하여 축복을 선포했던 땅이라는 점에서 볼 때 아마도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과 악인의 형통함에 대하여 직고 하고도 싶었던 요담의 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공통의 의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고발하고 싶은 요담의 우화의 내용은 하루는 나무들이 자신들의 왕을 뽑기 위해 몇 몇 나무들에게 왕이 되어줄 것에 대한 요청을 하였습니다. 먼저 감람나무는 우리의 왕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은 후의 반응은 본문 9절에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말합니다. 감람나무의 반응은 NO 였습니다. 감람나무는 나는 기름을 내는 사명이 있는 나무이고 또 그것을 통해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는 기쁨이 있는데 내가 그 기쁨을 놔두고 우쭐대지 않겠다는 것이 그가 왕이 될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한 나무들은 이번에는 무화과나무에게 찾아갔습니다. 왕이 되어달라는 질문에 무화과나무의 반응은 본문 11절에서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말합니다. 무화과나무의 반응은 나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주어야 할 사명이 있기에 왕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거절당한 것입니다. 이제 나무들은 희망을 걸고 포도나무에게 접근했습니다. 왕이 되어달라는 요청에 포도나무의 반응은 본문 13절에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한지라”말합니다. 반응은 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는 포도주를 만드는 사명이 있기에 이 귀한 사명을 포기하고 왕이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말이었습니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등에게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한 나무들은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로 갔습니다. 가시나무에게 동일하게 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요청을 받은 가시나무의 반응은 본문 마지막절인 15절에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말합니다. 가시나무의 반응은 앞의 세 나무들과는 사뭇 반응이 달리 나무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며 우쭐댑니다. 내 가시 그늘에 와서 피하라고 종용합니다. 피하지 않는 자는 불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협박까지 합니다.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가시나무는 가시가 많고 바늘이 있는 초목입니다. 가시나무는 작은 잎사귀가 3-5개 정도 달려 있는데 아주 날카로워서 그늘이 생기지 않습니다. 또 하나 가시나무는 봄에는 꽃이 피지만 그 열매는 식용으로는 쓸 수 없는 별로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그런데도 가시나무는 왕이 되어달라고 온 다른 나무들 앞에서 우쭐되었습니다. 요담이 이상의 우화를 그리심 산에서 선포한 이유는 바로 아비멜렉이 자격도 없으면서 왕이 되겠다고 떠벌인 가시나무임을 고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상 기록된 요담의 우화를 통해 함께 나눌 교훈과 가르침을 찾아보겠습니다. 앞에 기록된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등에게서 왕이 되어달라는 요청에 세 나무가 공히 똑같은 반응으로 답 한 단어‘우쭐대리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왕이 되어 내 사명을 망각한 채로 우쭐대며 살지 않겠다는 각오였습니다. 반면 가시나무는 본인이 갖고 있는 일련의 것들을 총동원해도 별로 도움이 될 것이 없는 빈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쭐대었습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는‘우쭐대리요’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히브리어‘랄누아’는 마치 바람에 촛불이 흔들리는 상태와 같이 마구 흔들리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마음이 마구 요동치는 상태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이런 면에서 개역 판 성경은 ‘요동하리요’번역되어 있습니다. 만에 하나 감람나무가 감람유를 내는 것을 포기하고 왕이 되었다면 그 나무는 본인의 본연의 의무를 망각한 채로 요동한 꼴이 된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무화과나무도, 포도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들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가시나무는 깜도 되지 않았는데 도리어 요동했습니다. 아주 작은 것 같지만 결코 작지 않은 신앙인의 승리의 요소들을 오늘 요담의 우화를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감에서 요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요담이 인용한 나무들의 우화에서 앞에 있었던 세 나무와 마지막 나무인 가시나무는 아주 다른 차이가 보입니다. 그것은 사명 인식의 차이입니다. 감람나무는 감람유를 내는 사명을, 무화과나무는 아름다운 실과를 내는 사명을, 포도나무는 포도주를 사람들에게 주는 귀한 사명을 인식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이런 사명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명을 안다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인식하고 살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13장에 기록된 대로 이방 교회의 모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최초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제 1차 전도여행을 감당하며 선교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파송 받은 수리아 안디옥에서 실루기아로 그곳에서 살라미, 바보,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 이고니온에 이어 루스드라 사역을 마치고 더베로 갔다가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을 거쳐 근 3년간에 걸친 사역을 마치고 수리라 안디옥 교회로 귀환하는 1차 전도여행을 감당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바나바와 바울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최선을 다해 사역을 했지만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의 시기로 인해 핍박을 받고 쫓겨나 루스드라에 도착을 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해 줌으로 헬라적인 다신 숭배에 빠져 있었던 루스드라 사람들에 의해 그들이 믿고 있는 최고의 신인 쥬피터와 헤르메스 신으로 추앙까지 받았으나 당신들이 섬기는 그 우상에서 벗어나라는 바울의 추상같은 선포에 생업을 잃을 수 있었던 루스드라 사람들은 마침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에 대하여 악의를 품고 쫓아냈던 사람들의 방문을 받고 그들의 충동질에 넘어가 바울을 돌려 때려 죽게 하는 사람들로 변질됩니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시체로 버려진 바울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고 죽은 줄 알고 바울의 시체를 장사지내려고 모인 바나바와 또 다른 제자들 앞에서 바울이 일어난 다음 행한 바울의 행적입니다. 사도행전 14:19-22절에서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말합니다. 죽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바울은 육체적으로 간신히 살았지만 아마도 그의 몸은 성한 곳이 없었을 것입니다. 추측한다면 그는 머리도 깨졌을 것이고,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고 운신할 수 있는 육체가 아니었을 것이 자명합니다. 안정을 취해도 될까 말까한 바울의 그 다음의 행보를 누가의 1인칭 묘사로 재해석하면 “바울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제는 바울이 쉬어야 할 터인데 그는 깨진 몸을 이끌고 이상하게도 그를 돌로 쳐서 죽이려 했던 자들이 우글거리는 루스드라 성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성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본인의 건재함을 복음을 들었던 자들에게 상기시킨 뒤에 다시 동쪽으로 140km 떨어진 더베로 갔다. 초인적인 정신력과 하나님의 은혜 말고 다른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바울 사도는 이제 자신들을 내쫓았고 루스드라까지 찾아와서 돌을 들도록 충동질했던 유대인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되돌아갔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그의 행보였다. 왜 그 위험한 곳으로 돌아갔을까? 그러다가 눈물이 없이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바울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바울의 이 기막힌 행보의 이유는 사도행전 14:22절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말씀합니다. 그가 루스드라에 오기 전에 경유하면서 복음을 증언하여 회심한 열매들을 다시 한 번 은혜로 다지기 위해서였습니다. 건강한 몸이 아닌 죽었다가 살아난 만신창이가 된 바울이었지만 그는 어린 신자들을 복음으로 다시 한 번 돌보고 다잡이하고 굳게 하기 위해 그 몸을 이끌고 루스드라로 이고니온으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한 바울의 일련의 이런 행적들은 그가 진짜 예수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의 테마로 적용하면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여타 다른 어떤 것에도 요동하지 않은 진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존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남긴 로마서 8장 35절과 38-39절의 주옥같은 말씀을 믿고 동의할 수 있습니다.
부산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는 김영민씨가 쓴‘당신들의 기독교’에서 예수를 “스승 예수”로 지칭합니다. 예수가 스승으로 보이는 자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영적인 정체성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승은 여러 명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승 예수보다 더 위대한 스승이 나타나면 언제든지 그 스승으로 갈아타는 요동함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동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는 결코 스승 예수가 아닙니다. 요동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나의 전부이신 예수입니다. 예수를 나의 전부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은 빌립보서 1:20-21절“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의 주인공으로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다윗은 살아생전 참 많은 대적의 핍박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당한 이런 모든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신앙의 요소는 흔들리지 않는 주님을 향한 믿음의 절대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62:1-2절“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는 그가 가장 힘들었을 당시로 추측되는 시기에 노래한 시입니다.
순교적 시대인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다윗처럼, 바울처럼 요동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주 바라기의 영적 자존감을 소유하는 세인의 지체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