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살면서 예기치 않게 큰 싸움을 했던 경험이 있으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 우리들이 싸울 것은 (찬송가 350장) ● 주께서 전진해 온다.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사사기 9:1-6 ● 제목 : 싸워야 하는 것들 1) 아비멜렉이 행하였던 질 나쁜 악행들을 본문에 의거하여 두 가지만 말해보자. 2) 주일 설교에서 지적된 영적인 교훈 두 가지를 오늘의 언어로 설명하고 적용해 보자. 1) 패거리 신앙
2) 하나님과 관계없는 물질 사용 |
3) 설교를 듣고 난 뒤에 피 흘리기까지 성도라면 싸워야 할 것을 진솔하게 나누어 보고 기도하자. 주님, 나의 이것과는 피 흘리기까지 써우겠습니다. 힘을 주옵소서. | 사역하기 (WORK) 1. 교회 중보기도 1) 셀에 소속되어 있는 지체들이 사역하고 있는 조별 가을 열린 모임의 효과적 승리와 결실을 위하여 2) 12월 8일에 있을 행복 나눔 축제를 위하여 3) 연약한 교우들의 치유를 위하여 4) 대학입시 준비 중에 있는 수험생들을 위한 중보 사역 5) 양육 반과 리더 반의 승리를 위하여 6) 담임목사의 목양 사역을 위하여 2.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3. 셀 그룹의 지체들을 위한 치유기도 (환우들을 위한 집중기도) 4. 헌금 기도 5. 광고 및 교제 6. 폐회: 주기도문 7. 파스타 - 준비된 대로 | 설교요약 (SUMMARY)2013년 11월 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요약본문 : 사사기 9:1-6 / 제목 : 싸워야 하는 것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우리들은 눈을 부릅뜨고 치열하게 피 흘리기 까지 싸워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드온의 아들이었던 아비멜렉의 소위들을 보면서 바로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하는 것들임을 알게 해 줍니다. 기드온은 살아생전 70여명의 아들들을 두었습니다. 70명의 아들들은 모두가 기드온이 고향인 오브라에서 낳은 아들들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오늘부터 살피게 될 기드온의 아들은 이방의 땅인 세겜(당시 가나안 영토)에서 이방의 여인에게서 낳은 아비멜렉입니다. 이방의 땅에서 낳은 이 아들에게 이름을 유독이‘아비멜렉’즉‘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이름으로 지어준 이유는 아비멜렉은 기드온이 실제로 이루지 못한 야망의 화신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에서 낳은 아들들에게는 본인이 천명한 나는 왕이 되지 않을 것이고 너희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8:23) 약속을 어길 수 없었기에 하나님의 방법이 그래도 인식되고 있는 땅인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아들들에게는 본인의 야망을 피력할 수 없었지만 치외법권적으로 하나님 식이 소홀한 땅인 세겜에서 태어난 아들에게는 기드온 스스로가 본인의 숨겨져 있는 야망을 아들을 통해 이루고 싶었기에 세겜에서 태어난 아들에게‘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라는 해석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런 야망을 부여 받은 아들인 아비멜렉은 이름값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의미로 성장과정에서 아버지로부터 너는 왕의 아들이므로 앞으로 왕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직간접적인 가정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을 것입니다. 이런 교육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적인 차원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습니다. 재임스 패커는‘하나님께 진지하라’(Taking God seriously)에서 죄에 대하여 언급하는 대목에서 “죄의 길은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을 위해 사는 길이다. 창조주를 무시한 채 자아를 사랑하고 섬기고 기쁘게 하는 길이다. 그 분에게서 독립하여 그 분을 멀리하고 삶의 고삐를 자신의 손으로 틀어주려는 길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수단으로 그 분을 조정하고 문제에 빠질 때 그 분을 안전장치로 이용하는 길이다.”로 갈파합니다. 아마도 기드온과 그의 아들 아비멜렉의 심증적인 죄를 까발린 것과도 같은 패커 교수의 죄 정의처럼 보입니다. “죄란 인간의 자아가 자신을 향해 굽어 있는 것이다. (homo incurvatus in se)” 교부 신학자 어거스틴도 죄를 말하면서 이와같은 촌철살인을 남겼는데 기드온과 그의 아들 아비멜렉을 통해 이런 죄의 근성을 본문에서 엿보게 됩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고향인 세겜으로 가서 외갓집 친족들에게 본문 2절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제안합니다. 아비멜렉은 정권을 잡기 위해 제일 먼저 혈연과 지연의 끈끈한 정을 건드립니다. 이렇게 세속적인 인연들을 이용한 아비멜렉의 전략은 본문 3절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답을 제시합니다. 기가 막히게 전략이 먹혀 들어갔고 대 성공입니다. 아비멜렉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제일 먼저 이용한 것이 혈연과 지연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첫 번째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 할 죄를 끄집어 내면 1. 패거리 신앙입니다. 패거리라는 단어는 “같이 어울려 다니는 사람의 무리를 낮잡아 이르는 말”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패거리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낮잡음 일들을 한다는 점입니다. 공감되지 않는 수준 낮은 일들을 하며, 공동의 이익과 선이 아닌 개인적인 이익과 이기적인 수준에 머무는 일들을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일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색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도리어 기뻐합니다. 아비멜렉은 이런 면에서 분명 보스였습니다. 보스적인 리더십으로 갖고 혈연과 지연을 부추기는 데 성공한 대가는 악을 도모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확보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비멜렉에게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되었습니다. 본문 4절 전반절에 “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말합니다. 바알브릿이라는 신전은 세겜에 세워진 바알을 섬기는 단입니다. ‘바알브릿’이라는 단어 자체가‘바알의 언약’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당시 세겜 지역이 기드온의 부정적인 영향으로 인해 광범위한 바알 신앙으로 오염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바알 숭배로 기드온 이전 시대의 죄로 돌아간 세겜 지역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패거리 신앙이 횡행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또 패거리 신앙의 부정적 소산물은 2. 하나님과 관계없는 물질입니다. 바알 신앙으로 오염된 바알브릿 신전에서 바알을 숭배하는 자들에 의해서 아비멜렉에게 거사에 쓰일 돈이 지급되었습니다. 본문은 분명히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말합니다. 바알브릿 신전에서 우상에게 드려진 돈 은 칠십 개를 아비멜렉은 건네받았습니다. 은 칠십 개는 약 800g입니다. 우리나라의 도량 개념으로 말하면 은 약 210돈 정도가 되는 가치이며 보잘 것이 없는 돈이지만 이 돈은 본문에서 무서운 돈으로 둔갑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4절 하반절에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말합니다.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에 대해 스위스 류에슐리콘 침례교 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를 역임한 트렌트 버틀러는 자신의 사사기 주석에서 이들에 대하여 ‘훈련되지 않고 원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로 주석했습니다. 주석가 모블리(Mobley)도 이들을 “돈에 고용된, 적절치 않은, 돈 한 푼 없는 그리고 땅이 없는 비류들” 해석했습니다. 학자들은 학문적으로 표시했지만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이들은‘깡패들’입니다.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깡패들을 고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돈을 준 대가로 살인을 교사합니다. 본문 5절 전반절에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말합니다. 그들은 돈을 받은 대가로 아비멜렉의 이복형제들 70명을 살해합니다. 이 대목에서 끔찍하지만 경성코자 말할 수 있는 것을 하나 들추어내면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라는 구절입니다. 송병현 교수는 원어적인 해석을 자신의 주석서에 기록했는데 “아비멜렉이 고용한 사람들이 70명을 죽인 방법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70명을 몰살시킨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갖고 한 사람씩 바위 위에서 차례대로 죽인 것이다.”말합니다. 아비멜렉의 잔인함이 얼마나 극도의 잔인함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고발입니다. 이것을 이렇게까지 깊이 상고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물질의 추악함을 상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물질은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에 우리 세인 지체들과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새겨야 할 아주 중요한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사용하는 물질이 사람을 살리는 데에 사용될 때만 그것이 우리들에게 맡기신 물질이라는 교훈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아무리 많은 물질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만에 하나 그 물질이 사람을 살리는데 사용되지 않고 나의 유익을 추구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다면 그 물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용하라고 맡기신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더 경책해야 할 무서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맡기신 물질이 아니라 내 맘대로 사용되는 물질은 언제든지 사람을 살리는 선용의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 이상으로 쇼핑에 몰두하는 것은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 학교도 가지 못하고 일일 노동자로 묶여 단돈 1달러에 학대를 당하고 있는 제 3세계의 어린이들을 그 노동의 지옥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공범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내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마시는 커피는 제 3 세계의 빈민들을 착취하는 일이 됩니다. 내가 향락과 쾌락에 소비하는 물질로 인해 물질적인 빈곤함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들의 이웃들에게 삶의 의지를 꺾는 돌멩이 던지는 일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없는 물질들과 우리들은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린피스의 의장을 역임했던‘볼프강 작스’는 “적게 벌어서 적게 쓰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잘 사는 것이다.” 간파했습니다. 자본주의적인 사상에 물들어 있는 우리들에게 작스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지만 적어도 그리스도인들로 사는 우리들은 육비에 새겨야 할 교훈입니다. 철학자인 탁석산 선생이 쓴‘행복 스트레스’라는 책에서 “현대의 여명기를 즈음하여 대부분의 남녀들은 하나님이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행복이 하나님이 되었다.”언급했습니다. 그는 NON-CHRISTIAN 이지만 그의 진단은 적확(的確)합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행복은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그 행복이 물질에서 온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물질을 축적하는 데에서 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것과 치열하게 싸울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임하며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시인 정현종 선생의 글귀에 “사람은 언제 아름다운가? 자기를 벗어날 때처럼 사람이 아름다운 때는 없다.”이야기합니다. 아비멜렉은 자기 욕망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것들과 싸우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비정상적인 것들과 타협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두개골이 파열되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의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싸워야 하는 것들에서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싸움이 이길 것을 시편 기자의 노래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는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시편에서 시인들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the Lord of Hosts)로 표현했습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 싸워주시기에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패거리 신앙과 하나님과 관계없는 물질과 싸워 승리하는 세인의 지체들이 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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