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3.10.27 셀 사역2024-04-22 11:59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받은 은혜 중에 꼭 자랑하고 싶은 내용 말해보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시작됐네 우리 주님의 능력이 (복음성가)
● 목마른 내 영혼 (찬송가 309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8:33-35
● 제목 : 속편이 아름다우려면 (2)
1) 기드온이 죽고 난 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급격히 무너진 두 번째의 요소를 본문 설교를 중심으로 말해보자.
● 본문 34절을 참고하세요.  

2) 설교의 내용 중에 언급된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는 21세기의 시도들을 아는 대로 설명해 보자.
* “적어도 내가 사는 이 시대에 객관의 하나님은 소멸되었고 주관의 하나님만이 살아서 움직인다.”
*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다.”  

3) 수로보니게 여인의 기사를 오늘 설교에 적용해 볼 나의 속편이 아름답기 위해 해야 할 결단은?
마태복음 15:27절을 참고하자.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사역하기 (WORK)
1. 교회 중보기도
1) 셀에 소속되어 있는 지체들이 사역하고 있는 조별 가을 열린 모임의 효과적 승리와 결실을 위하여
2) 가을 셀 대 심방을 위하여
3) 연약한 교우들의 치유를 위하여
4) 대학입시 준비 중에 있는 수험생들을 위한 중보 사역
5) 양육 반과 리더 반의 승리를 위하여
6) 담임목사의 목양 사역을 위하여 
 
2.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3. 셀 그룹의 지체들을 위한 치유기도 (환우들을 위한 집중기도)
4. 헌금 기도
5. 광고 및 교제
6. 폐회: 주기도문
7. 파스타 - 준비된 대로  

 
설교요약 (SUMMARY)
2013년 10월 2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요약본문 : 사사기 8:33-35 / 제목 : 속편이 아름다우려면 (2)유일하게 지구상에 살아 있는 존재 가운데 타인에게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배반하여 해를 끼치는 자를 의미하는 배은망덕이라는 단어가 적용되는 존재는 인간뿐입니다. 인간만이 무감각하게 또는 경우에 따라 의도적으로 은혜를 잊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는‘얼마나 용서를 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한 주님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0,000달란트, 약 10조원의 빚지고 있던 자가 극적인 채주의 탕감 은혜로 빚 덩이에서 해방됩니다. 그런 사람이 채주의 집에서 해방되어 나오는 길에 100 데나리온, 약 10,000,000원의 빚을 깊지 못한 채무자를 감옥에 가두었고 이 소식이 10,000달란트를 탕감해 준 채권자에게 들어가자 괘씸죄에 걸려 구속되었다는 의미 있는 주님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주님은 마태복음 18:2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말씀합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숫자 7은 단순히 숫자적인 개념이 아니라 완전수 7을 70번이라도 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용서의 끝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7번까지 용서를 최대의 한계로 봅니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7번까지 용서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실체입니다. 이것은 단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더 끔찍하고 서글픈 것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망각한다는 점입니다.
출애굽기 20:2절, 레위기 25:28절, 시편 81:10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게 반복해서 권고하셨던 상용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선언은 구약 성경 전 영역에서 지천으로 발견됩니다. 하나님의 이 선언은 은혜의 기억을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코 은혜를 망각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강조 또 강조하며 권면하신 이 내용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종살이를 하던 노예였던 너희들을 내가 인도하여 해방시켰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이 내용이 이스라엘을 옥죄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으로 왜곡되어 해석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구약 성경의 여러 영역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신 이유는 재 강조하지만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여 옴짝달싹 못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집단적 죄악은 항상 이 명제를 잊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고지하기 위함입니다.
지난 주일 본문을 중심으로 한 첫 번째 설교를 통해 이스라엘은 기드온이 죽은 뒤에 급격히 또 영적으로 무너지는 공동체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기드온이 살아생전 영적인 지도자로서 선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임을 살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들의 인생의 드라마를 쓰고 바로 지금 나의 자녀들에게 영적인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또 다른 이스라엘의 급격한 무너짐의 이유를 본문을 통해 사사기 기자는 우리에게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그것은 바로 2.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 34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말씀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무너진 근본적인 이유 중에 또 다른 하나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자기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자기 백성’으로 하나님의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소유권은 주님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시인이 시편 2편에서 말한 것처럼 7절에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낳았습니다. 그러기에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보셨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애굽에 내린 10가지의 재앙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드라마틱한 시나리오입니다. 7번째 재앙인 우박이 전 애굽을 강타했을 때 출애굽기 기자 출애굽기 9:26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그 곳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 보고합니다. 아주 단순한 표현이지만 고센에 있었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지체들에게는 한량없는 은혜였고 눈물 나는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눈물 나는 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것인 이스라엘은 당연히 소유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 분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스라엘 자손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기록합니다. 요점은 기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억하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자카르’는 어원적인 의미가 그냥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확실한 기억을 위해 표를 남길 정도의 표시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마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고백했던‘흔적’ 즉 스티그마와 같은 그런 표를 남길 정도의 인상 깊은 기억을 할 때 사용하는 단어가‘자카르’입니다. 본문은 이 단어 앞에 부정사‘로’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하나님을 강하게 기억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환언하면 오늘 설교의 테마처럼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기억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이 급격하게 무너진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았던 기드온 시대의 이스라엘은 사상누각이었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무너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임스 패커 교수가 쓴‘하나님께 진지하라’에 보면 최근에 어느 신학교에서‘포스트모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시험 문제를 냈는데 한 학생이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다.’라는 답으로 A 학점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이렇습니다. 내가 내 입맛에 맞는 하나님 상을 만들어내는 시대가 오늘의 시대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이 되어주기를 바라면 그대로 그런 하나님이 되는 시대가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만들어내는 하나님입니다. “적어도 내가 사는 이 시대에 객관의 하나님은 소멸되었고 주관의 하나님만이 살아서 움직인다.”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분이라고 정의하고 싶은 유치한 발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아주 사악하고 질 나쁜 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가하다는 말이 정답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바로 이 대목에서 역발상의 중요한 교훈 *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스타트 라인은 은혜에 머무는 바로 그 선입니다. 그 선 뒤로 물러서면 우리는 실패하며 우는 사자와 같은 마귀 권세에 농락당합니다. 그 은혜의 선 뒤로 물러서는 순간 영적인 침륜에 빠지며 세속과 타협하게 됩니다.
어제 새벽예배 시간에 마태복음 15장에 있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기사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주님이 당시 이방지역이었던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동선을 옮기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실 때 그 지방의 인근 지역이었던 수리아 지역의 베니게에 살던 여인이 귀신들린 딸을 고침 받기 위해서 주님을 찾아 왔습니다. 주님에게 자신의 소원을 청했지만 그녀는 주님으로부터 개 취급을 받는 수모를 당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님으로 임한 시험을 그녀가 갖고 있었던 분명한 목적을 위해 참고 인내함으로 결국은 주님으로부터 큰 믿음이라고 칭찬을 받고 딸의 질병이 고침을 받게 되는 이중의 복을 받게 되었음을 나누었습니다. 마태복음 15:27절에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말씀합니다. 감동의 언어로 다시 전하면 “주님, 맞습니다. 저는 바로 그 개입니다. 그런데 개들은 주인들이 다 먹고 남은 찌꺼기와 같은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땅합니다. 나는 개이니까 그 찌꺼기라도 나에게 주십시오.”입니다. 개 취급을 받았던 수로보니게 여인도 은혜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그 은혜를 받아야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은혜 안에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배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의 이름을 나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실 정도로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김영봉 목사께서 그의 책‘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책 주기도’에서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도리어 탕부(蕩父)의 비유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재산을 탕진한 아들의 비유처럼 돌아온 아들을 위하여 사랑을 허비하는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라는 기막힌 표현으로 제목을 바꾼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사랑을 허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사랑을 받은 우리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물러서면 안 됩니다. 뒤로 물러서면 안 되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던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0:39절 개역판에서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기드온 사망 이후 급격히 몰락했습니다. 은혜는 기억하는 것이지 잊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은혜의 자리로 날마다 나아가는 자들이지 은혜의 선 뒤로 물러서는 자가 아닙니다. 이 은혜의 자리를 사수할 때 우리는 우리들의 인생 속편을 전편보다 더 아름답게 그리며 써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인지체들 모두 은혜의 자리에 머물다가 또 성숙한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