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내가 본 영화나 드라마 중에서 본편과 속편이 다 재미있었던 것과 그렇지 않았던 것 나누어 보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 아침 안개 눈 앞 가리듯 (복음성가) ●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찬송가 560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사사기 8:33-35 ● 제목 : 속편이 아름다우려면 (1) 1) 기드온이 죽고 난 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영적 상태는 어떠했는가? ● 33절과 35절을 참고해서 두 가지만 말해 보자. ● 33절: 35절: |
2) 1) 기드온이 죽은 뒤 곧바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무너지게 된 결정적인 동기와 원인을 사도행전 14장에 기록된 루스드라 사역에서의 바나바 행적과 비교하여 설명해 보라 3) 나는 나의 자녀, 손들을 위해 어떤 영적인 영향력을 남기고 싶은가? 그러려면 방법은? 1) 남기고 싶은 영적 영향력은?
2) 그렇게 하기 위한 나의 대안과 방법은? | 사역하기 (WORK)1. 교회 중보기도 1) 셀에 소속되어 있는 지체들이 사역하고 있는 조별 가을 열린 모임의 효과적 승리와 결실을 위하여 2) 가을 셀 대 심방을 위하여 3) 행복한 단풍관광을 위하여 4) 대학입시 준비 중에 있는 수험생들을 위한 중보 사역 5) 양육 반과 리더 반의 승리를 위하여 6) 담임목사의 목양 사역을 위하여 2.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3. 셀 그룹의 지체들을 위한 치유기도 (환우들을 위한 집중기도) 4. 헌금 기도 5. 광고 및 교제 6. 폐회: 주기도문 7. 파스타 - 준비된 대로 | 설교요약 (SUMMARY)2013년 10월 2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요약 본문 : 사사기 8:33-35 / 제목 : 속편이 아름다우려면 (1)
더치 쉬츠가 쓴‘꿈꾸는 본성을 깨워라’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명령은 우리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보호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하나님은 최대한 우리 꿈이 보호받고 축복받기를 원하신다. 순종하면 우리 꿈이 하나님과 계속 연결되어 그 꿈을 파괴하려는 인생의 폭풍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으로 보기에 심히 좋게 창조된 피조물이지만 인간은 창조의 목적대로 선하게 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죄의 복잡한 다양성 때문에 죄를 선명하게 정의한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본문에 즈음하여 죄를 정의하면 하나님을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련의 모든 속성이 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사기 기자는 기드온 사망 이후에 일어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상황을 본문 34절에서“이스라엘 자손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슬픔으로 전합니다. 32절을 보면 사사 기드온은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고 아버지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기드온처럼 반드시 죽으며 죽음 앞에서는 공평합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그의 삶이 바르게 살았든지 아니면 바르게 살지 않았든지 상관이 없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기드온이 죽은 뒤의 역사는 우울합니다. 본문 33절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서서 바알들을 따라가 음행하였으며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말씀합니다. 기드온이 죽자마자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의 시대로 돌아갔습니다. 바알들을 따라가 음행을 하였고 바알브릿을 자기의 신으로 섬기는 행위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돌아간 것은 40년 전의 바알 섬김 시대였습니다. 기드온이 살고 있었던 40년의 평화의 시대가 저물자마자 이렇게 한꺼번에 순식간에 무너진 이유는 1. 기드온이 영적 영향력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35절“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 이스라엘에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아니하였더라” 말씀합니다. 기드온이 부름을 받기 전에 적어도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토굴 속에서 숨어 살아야 했던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활동과 승리로 인해 그런 억압에 풀려났지만 미디안이 침략하여 무력으로 싹쓸이해 가는 실정이었기에 이스라엘은 초근목피로 연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거함 미디안이 침몰됨으로서 믿기지 않는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고 빼앗겼던 땅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는 그들은 이제 열심히 일하면 그 소득을 빼앗기지 않고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주권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회복된 이 후 분위기가 더 암울합니다. 현실적으로 이런 은혜의 길을 열어주었던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 후손들은 급반전하여 변심하기에 이릅니다. 그것은 바로 기드온의 집을 무시한 것입니다. 사사기 8:22절에서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지라”말씀합니다. 이렇게 고백했던 자들이 이제 기드온이 죽자 그들의 약속은 온 데 간 데 없이 저버린 약속이 되었습니다. 약속의 실천은 고사하고 변심하여 기드온의 집을 천대하였다는 말입니다. 기드온의 집이 이런 홀대를 당하는 이유는 기드온이 살아 있는 동안 세속적 권세에 붙들려 살면서 전혀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이 있는 선한 역할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을 백성들에게 끼치지 못하고 세속적 만족과 쾌락을 위해 살았습니다. 적어도 그는 미디안과의 죽음을 건 싸움 뒤에 승리를 거머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윽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았다는 증거가 단 한 군데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가 뿌린 우상의 기틀이 그를 목조이게 되었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영적인 구심점이 없어지자 저버렸던 우상을 다시 섬기며 그 결과 망가지는 속도가 급속도로 망가졌고 기드온의 집마저도 천대 받는 꼴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받는 중요한 교훈과 도전은 우리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내 삶의 속편이 아름다우려면 내가 사는 동안 할 수만 있다면 영적인 선한 영향력을 많이 남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영적인 영향력을 미친 자는 그렇게 하지 못한 자에 비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족적들을 빛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14장의 안디옥 교회는 이방 교회 중에 선교의 모범 교회이고 롤 모델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3:2-3절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말씀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온 교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따로 세워 이방을 위한 선교사로 파송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바울의 1차 전도여행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기도와 중보로 선교사로 파송된 이 두 사람은 신실하게 이방 선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이 전도 여정에서 특히 주목할 내용이 사도행전 14장의 배경이 되고 있는 루스드라 사역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고니온에서 사역을 한 도중 유대인들의 시기로 인해 쫓겨나서 서남쪽으로 45킬로미터 떨어진 루스드라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루스드라로 사역지를 옮긴 뒤에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루스드라에서 길거리 전도사역을 하는 동안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기 된 사람을 발견하고 그가 말씀을 잘 듣는 것은 본 바울은 담대하게 바로 일어서라고 선포하자 그가 일어나 걷는 기적을 현장에서 보였습니다. 나면서부터 한 번도 일어나보지 못했던 그가 일어나자 루스드라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무지한 루스드라 사람들은 신이 하늘에서 강림했다고 보고 바울을 허메(헤르메스) 그리고 바나바를 쓰스(제우스)라고 지칭하며 그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이 일을 안 바나바와 바울은 강력하게 그 일을 저지하며 우리들은 너희들과 똑같은 사람임을 선포하고 바로 그 헛된 일에서 벗어날 것을 종용하기에 이릅니다. 제우스를 신을 섬기고 헤르메스 신을 섬기는 일들이 무익한 일이며 쓸데없는 일임을 선포하자 급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루스드라는 앞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헬라 문화에서 섬기던 최고의 신인 제우스외 그의 전령인 헤르메스를 섬기고 있었기에 그와 관련된 일로 먹고 사는 자들이 기천에 이른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들을 섬기는 일은 헛된 일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곧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고 바울의 말을 듣는 것은 곧바로 루스드라 경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었고 헬라의 신을 섬기며 우상 산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생계가 끊어지는 절박한 것이기에 그들은 이고니온에서 내려온 바울의 적대자들의 충동질에 넘어가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이는 자들로 돌변하기에 이릅니다. 사도행전 14:19절에“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말씀합니다. 바울을 신으로 섬기려던 자들이 자기들의 이익에 해가 되자 곧바로 그들은 바울을 죽이는 자들로 변질 된 것입니다. 그들이 던진 돌을 맞은 바울은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에 의하면 거의 죽게 되었음을 보고합니다. 사도행전 14:19절에‘죽은 줄로’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세네스코’는 시체가 완전히 죽은 상태를 의미하는 능동태 완료 시제 동사입니다. 돌에 맞은 바울의 상태는 완전히 죽은 시체와 같은 상태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루스드라의 사람들은 율례에 성 안에서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돌을 던지지 말라는 법에 접촉을 받지 않기 위해 성 밖으로 바울 시체를 질질 끌고 나온 곳입니다. 제자들은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의 시체를 거두기 위해서 장사를 준비하기 위해 바울의 시체 앞에 모였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바울이 일어난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것입니다. 이어지는 사도행전 14:20절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말씀합니다. 제자들이 바울을 둘러섰습니다. ‘둘러섰다.’고 번역된 헬라어‘퀴를루오’는 장사를 지내기 위해 모여든 것을 의미하데 바울의 시신처리를 위해 모여든 제자들 앞에서 바울은 보란 둣이 일어섰습니다. 바울이 살아난 뒤에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이동하였음을 누가는 보고합니다. 바로 이 장면에 담긴 쓰라린 아픔을 담고 있는 것은 바나바에 읽힌 이야기입니다. 루스드라에서 사역을 하던 선교사의 팀장은 바나바입니다. 사도행전 13:2-3절에 기록된 안디옥 교회 파송 선교사의 서열은 반드시 바나바와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 정도로 핍박을 받을 때 바나바는 돌멩이 하나를 맞지 않고 온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4장의 어느 한 구절도 바나바가 바울처럼 핍박을 받았다는 것을 증언해 주는 구절은 없습니다. 다만 죽다가 살아난 바울의 현장에 함께 있었던 바나바는 바울이 일어난 뒤에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더베로 옮겼던 것만 보고합니다. 바나바는 바울이 목숨을 걸고 루스드라 지방의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하는 바로 그 시간 전혀 영적인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방관하고 있었던 구경꾼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기회로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제자 누가는 사도행전 15:2절“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말씀합니다. 루스드라의 참패를 경험한 바나바는 바나바와 바울이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로 역사의 서술에서 탈락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위대했던 이름이 주인공 바나바는 사도행전 16장 이후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선한 영향력을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 남기고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보고할 수 있는 유일한 보고가 영적인 영향일 것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우리들의 신앙의 후손들이 배우고 따를 수 있는 살아 있는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속편까지 아름답지 못한 역사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남긴 이 땅에서의 흔적이 영적인 영향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날이 오기 전, 우리 모두 함께 선한 영적 영향력들을 남기며 이후의 속편의 삶을 아름답게 준비하는 세인의 지체들이 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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