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한 달 만에 만난 비님이 내리셨습니다. 우리들의 선조들은 ‘비가 내렸다.’고 표현하지 않고 ‘비가 내리셨다.’라고 종종 표현했다는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목요일 저녁부터 금요일까지 내린 비를 저는 정말로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비가 내리셨다.” 너무너무 고마웠기 때문입니다.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폭염에 지쳐 있었고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고통이 심대 된 지금이기에 내리신 비는 너무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전도서 기자가 말한 명쾌한 성찰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닫지는 못하게 하셨다.” (표준 새 번역 3:11) 창조의 주님이신 주군이 하신 일은 너무나 아름다웠음을 분명히 토로하는 이 글 속에서 근데 왜? 창조하신 피조의 세계가 이렇게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불가마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자연 재해에 허덕이고 있는 것일까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이 깨닫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일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하나님이 보여주신 자연 계시만으로도 인간은 이 땅을 보존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었음을 하나님도 인정하셨기에 피조물들의 선택을 존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작금의 자연 재해에 대해 인간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흔히 하는 말 가운데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풀이하면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일 것입니다. 너무 소중하게 여기셨던 하나님의 걸작인 자연을 인간이 마음껏 유린하고, 훼손하고, 무시한 결과가 지금 우리에게 닥치고 있는 무서운 자연 재앙들은 자업자득으로 고스란히 넘겨지고 있다는 점에서 유구무언입니다. 더 아픈 것은 우리들의 자손들이 살아가야 하는 세대는 이 고통의 늪이 더 깊어질 것이라는 암울함입니다. 지난 주간 인터넷 포털에서 지적된 2030년 북극의 얼음은 완전히 사라지는데 복구는 이젠 늦었다는 보도를 읽으면서 오싹해지는 것이 저만의 착각인가를 두고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자연의 자연스러움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인데도 도리어 자연을 부자연스럽게 만든 인간의 욕심 때문에 인간은 그 자업자득의 비극적 결과물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무시하고 내팽개친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셈입니다. 비가 내려야할 때 비가 내리지 않고, 따뜻해야 할 때 따뜻하지 않고 추워야 할 때 춥지 않은 기형적 현상들로 인해 인간들은 그 신비로운 하나님의 작품을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하는 불행한 미래를 떠안아야 되는 운명에 처한 것입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인 제임스 켄턴은 ‘극단적 미래 예측’에서 그의 걱정을 이렇게 경고한 바 있습니다. “현재 우리를 위협하고 있고, 미래에 우리 자녀들을 위협할 지구 온난화의 위험성은 대형 환경 재앙이 일어나야만 비로소 사람들이 그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될지 모른다는 점이다.”(p,211) 소 잃고 눈물 흘리며 외양간 고치는 셈임을 지적한 이 말이 오늘은 크게 들립니다. 왜? 비가 한 달 만에 기적적으로 내리신 것을 이제 보는 세대가 되었기에 말입니다. 교회 정원에 간신히 갈하지 않을 정도로 물을 주는데 걸리는 시간은 꼬박 1시간입니다. 헌데 비님이 내리셔서 마른 대지를 흠뻑 적시는 데 걸린 시간은 채 5분이 안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켄턴 박사의 말대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제 흉통이 강타당하는 아픔이 느껴집니다. 어느 날 비가 영원히 내리시지 않을까 두렵고 떨립니다. 정말로 더 이상 회복의 기회와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때의 순리로 돌아가는 방법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