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강해 이후 “욥기 서에 대한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서울 합정동에 있는 백주년기념교회 신도입니다. 저희교회 목사님들도 좋은 말씀으로 제 삶을 돌아보게 해주시는데 목사님의 설교도 꼭 들어보고 싶어지네요.”(ID:새롬맘) “들어본 적 없는 해석이라 매우 신선하고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끙끙 앓고 있는 욥을 안타까워했고, 그래서 솔직한 신앙을 가졌고, 그럼에도 (그 당시에는 더욱더 자식이 중요하고, 여성이 돈을 벌기는 더 어려운 시대였을 텐데) 끝까지 곁에 있어준 영성의 욥의 아내를 볼 수 있게 해주신 강해, 감사합니다!”(ID:조이) 지난 수요 예배에 이제 12번째 욥기 강해를 진행했는데 제 개인 블로그에 댓글을 남겨 준 지체들 중에 몇 사람의 소회입니다. 욥기 강해를 결심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교우들에게 욥기라는 난해한 말씀을 가장 쉬운 언어로 전하는 데에 설교자인 제가 먼저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가장 두려웠던 것은 이미 욥기 강해의 목표를 설정해 놓은 설교자인 저의 고집(?)이었습니다. 욥이 당한 고난에 대한 해석을 하나님의 입장이 아닌 욥과 세 친구들 그리고 엘리후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치열하게 논쟁하는 인간적 담론들의 입장을 두둔하겠다는 의지 말입니다. 그 결과물을 내놓을 경우, 이미 욥에 대하여 학습화되어 있고 고정화 되어 있는 교우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하여 현장 목회자로서 나름의 긴장감이 있었기에 두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욥기에 심장이 뛰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어디에서 그런 ‘근자감’(요즈음 아이들의 말대로 근거 없는 자신감)이 불쑥 튀어나왔는지 제 스스로도 대책 없는 목사 같다는 솔직한 감회를 밝힙니다. 헌데 생각보다 첫 출발은 B⁺정도는 되는 것 같아 안도가 됩니다. 교우들도 수요 예배를 통해 선포되는 욥에 대한 역발상의 메시지들을 상투적인 않은 진리의 조명하심으로 적응하는 것이 보이고, 더불어 설교자인 저에게 주시는 보너스인 온라인(ON-LINE) 상의 은혜의 공급함도 있는 것 같아 준비하는 자로서 보람도 그리고 개인적인 감동도 있습니다. 이제 겨우 3장을 지나고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지금부터 헤쳐 나아가야 하는 본문과의 치열한 싸움을 앞두고 있는 저는 마치 건곤일척의 비장한 심정으로 목회 현장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가장 지루하고 또 지난(至難)하기까지 한 고난에 대한 담론들을 다루어야 하기에 숨이 벅찬 버거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공부와 여력으로 오늘의 욥으로 서 있는 교우들에게 이유 없는 고난에도 쓰러지지 않고 이김과 살아냄의 영적 출구를 줄 수 있다면 기쁨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깊은 심연의 골짜기를 헤쳐 나와 회복된 고든 맥도널드가 쓴 글을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저 또한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었습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든 그곳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하지만 나는 어디를 가든 그곳에서 차(茶)를 대접받았다.”(고든 맥도널드, “리더는 무엇으로 사는가?”,p,213.) 후자의 치욕이 아닌 전자의 전율함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며 주군께 두 손 모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