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mentor)와 멘티(mentee)
독립교회 연합회에서 사역을 한지가 이제 금년 말이면 꼭 십년이라는 세월이 됩니다. 인생의 변곡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10년 전 사역을 반추하다보면 수없이 많은 말을 할 수 있겠지만 한 문장으로 가닥을 잡아 토설하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 말고는 다른 표현이 딱히 생각나지 않습니다. 적절한 고백이라는 말이겠지요. ‘하나님의 은혜’ 라는 표현 중에 하나를 조금 세부적으로 설명하자면 그것 중에 하나는 부교역자의 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참 모난 사람이라 목회에 별 소질이 없지만 교단에서 사역을 할 때는 물론이고 연합회에서 거의 10년 사역을 감당하면서 도저히 혼자는 감당할 수 없는 사역을 그럭저럭 이끌어 올 수 있었던 것은 부교역자 참모들의 계산하지 않는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표하고 싶습니다. 지난 주간, 고승우 전도사님 가정이 장막을 옮겨 이사 심방을 했습니다. 전도사님은 온라인상으로 우리 세인교회를 알게 된 후, 교단에서의 사역을 접고 우리 교회로 사역 지원을 결단할 정도로 세인 공동체에 관심을 가져 함께 부교역자로 섬겨준 지 이제 1년 6개월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천에 거주한 뒤에 두 번째 장막을 옮겼기에 담임목사로 강복하는 이사 심방을 하는 날, 여러 감사의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사 감사 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하는 데 책장에 세팅되어 있는 책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제 서재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서재를 조그맣게 축소한 느낌이라고 할까 싶을 정도로 제가 가까이 두고 섭렵한 책들이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후에 사석에서 서고에 있는 책들에 대하여 물었더니 이렇게 답해주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에 인용하셨던 책들은 가능하면 빠지지 않고 구입해서 읽고 있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칠층산,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톰 라이트의 ’우상의 시대 교회의 사명‘, 랭던 킬키의 ’산둥 수용소‘ 등등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의 책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시간들을 추억하다보면 저에게는 감사한 것과 유감스러웠던 것이 동시에 교차합니다. 그것은 멘토십(mentorship)에 대한 것입니다. 출신 교회에서 평신도에 있었을 때, 그리고 신학교에 들어와 공부하는 신학도로 살았던 그 때, 조금은 더 진정성을 갖고 저에게 지성과 영성과 감성에 대한 지도를 해주었던 신앙의 스승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는가 하면, 현장에 들어와 사역을 하면서 만났던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지금도 여러 가지로 모나서 좌충우돌하는 목사로 여전히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만큼이라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예수 따르미로 살아가도록 밀어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채찍질 해 주었던 온라인, 오프라인 상의 멘토들이 있었음은 최고의 감사 조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섬기는 교회에서 종을 도와 신실하게 부교역자로 사역을 동역하고 있는 전도사님에게서 담임목사의 영적인 고민을 함께 고민하려는 진정성이 엿보이고, 한국교회에 대한 뼈아픈 성찰을 같이 나누려는 흔적들을 보여주며 척박한 환경이지만 올바른 신학적 성찰을 하려는 바른 사역자로 서 가는 모습이 있어 대견하고 아름다워 박수를 쳐 주고 싶습니다. 어느 날 멘로파크 장로교회를 섬기는 존 오트버그 목사가 멘토로 삼고 있는 달라스 윌라드 목사를 방문했을 때, 그가 해주었던 다음의 말이 목회자로서 핵심적 가치가 되었다고 고백했음을 책을 통해 접하며 짜릿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요새는 서두르는 게 영적 생활의 주적이지. 서두르게 만드는 것은 가차 없이 쳐내야 해.” (“내 영혼은 무엇을 갈망하는가?”,p,23.)
영적 교훈과 도전을 줄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멘토와 멘티로 살아가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공부하는 목사가 되기를 또 다짐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