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1) 열린 모임 5주차 사역을 위하여 함께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 언제나 내 모습 (복음성가) ● 내 안에는 사는 이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사사기 14:7-9 ● 제목 : 신앙은 도미노입니다. 1) 지난 주와 이번 주 본문 설교에서 삼손이 부정적 신앙의 도미노 게임을 이어간 것을 나누어 보자. ● 사사기 14:2절 참고 ● 사사기 14:5절 참고 ● 사사기 14:9절 참고 |
2) 삼손이 이렇게 부정적 신앙의 일탈을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 설교의 테마와 관련하여 설명해 보자. (사도행전 11: 26절의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과 비교하라) |
3)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기 위한 실천 방법들을 내놓아 보자.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가가호호 춘계 대심방을 위하여(영양 심방) ② 봄 열린 모임 5주차 사역을 위하여 ③ 양육 중에 있는 지체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봄 열린모임 사역하기 ① 5주차 열린 모임: 베스트틀 위한 전략을 갖고 사역하기(차 마시기 혹은 식사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2014년 6월 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77번째 강해) 본문 : 사사기 14:7-9 제목 : 신앙은 도미노입니다.
마태복음 5:13-16절의 말씀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가 되라는 진행형의 말씀으로 받지 않고 정체성이 이미 이루어진 상태, 즉 너희는 빛과 소금 그 자체이기에 그 역할을 하는 삶을 마땅히 살아야 하는 완료형의 말씀으로 받는 이유는 신앙의 전염성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의 회당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주님에게로 돌아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데살로니가 지역의 유대인들이 교권을 빼앗길 위기에 봉착하자 바울과 실라를 시기하여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었던 불량한 사람들을 매수하여 바울을 따르는 자였던 야손의 집에 침입을 합니다. 이유는 야손이 회심하여 바울일행을 집으로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시기하며 분노했던 유대인들이 야손의 집에서 바울의 일행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한 분풀이로 야손과 그의 형제들을 끌어내 읍장에게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읍장에게 고소한 내용이 사도행전 17:6절입니다.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이 구절에서 두 가지의 강한 전염성을 보입니다. ⓵ 유대인들이 거짓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말들이 데살로니가 지역 사람들에게 전염되는 부정적인 전염성이고 ⓶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회심의 전염 속도가 컸으면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라고 표현했겠는가? 의 긍정적인 전염성입니다. 신앙은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전염성이 강합니다. 삼손은 신앙적인 하나의 단추를 잘못 꿰자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엇박자를 내는 부정적인 신앙의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삼손은 부모에게 억지를 부려 블레셋의 여인을 아내로 삼겠다고 했습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율례대로 삼손의 부모들은 블레셋의 땅 딤나까지 내려가 장치 며느리가 될 여자를 보게 됩니다. 며느릿감을 본 삼손의 부모들이 그 며느릿감이 맘에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에 대한 자세히 보고를 본문에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추측건대 탐탁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미 눈이 먼 삼손에게 부모의 의향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본문 7절을 보면,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니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 이 구절의 해석은 그 여자가 성적으로 나를 기쁘게 한다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부모와 함께 딤나에서 만나 아내로 삼겠다고 말한 그 여자의 정체가 ‘이솨’로 기록되었습니다. 통상적으로 히브리어 단어 용법에서 처녀를 의미하는 단어는‘베투림'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이솨’는 결혼을 한 여자이거나 혹은 이혼녀 심지어는 ‘음란한 여자’를 지칭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삼손이 택한 여자는 처녀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긍정적으로는 결혼을 했던 경험이 있었던 여인일 것이고 부정적으로는 남성 편력이 강한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는 직업여성일 수도 있습니다. 나실인인 삼손은 이방의 여인과 결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방의 여인과 결혼하는 것 자체가 불법인데 택한 여성이 음란한 여성일 수도 있다는 해석은 한 번 신앙의 단추를 잘못 꿰자 당연히 이어지는 선택도 전혀 신앙적이 않은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8-9절은 연쇄적인 부정적 신앙의 도미노 현상을 보고 합니다. “얼마 후에 삼손이 그 여자를 맞이하려고 다시 가다가 돌이켜 그 사자의 주검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 떼와 꿀이 있는지라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그의 부모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그것을 드려서 먹게 하였으나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아니하였더라” 부모와 함께 여자를 만나고 돌아온 삼손은 이제는 딤나에 살고 있는 여자와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다시 딤나로 내려갔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 그는 전에 그가 들렸던 포도원 근처에서 찢어 죽였던 사자가 어떻게 되었는가가 궁금해 져서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삼손이 상상하기로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고 팔레스타인의 기후를 전제한다면 이미 그 사자의 사체는 썩어서 각종 벌레들의 공격과 또 다른 날 짐승들의 공격을 받아 뼈만 남고 모든 육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아주 놀라운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자의 사체에 벌 떼들이 몰려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당연히 그곳에는 꿀이 생성되었습니다. 일반적 상식으로는 사자의 사체를 짐작한다면 당연히 부패되어 뼈만 남아야 정상인데 사체의 일부분이 남아 있었고 그 안에는 벌들이 기생하고 있습니다. 사자의 사체에 벌과 꿀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은 다분히 사사기 역사가의 해석이 가미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본문 8절에서 눈여겨 볼 단어는 ‘벌 떼’입니다. ‘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다'는 벌레들의 ‘떼’를 말하는 단어가 아니라 도리어 ‘공동체’를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정확한 번역으로 표현하면 ‘벌 공동체’라는 말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벌 떼와 꿀의 영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이 풀 수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꿀이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으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살면서 메뚜기와 석청(꿀)으로 음식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꿀은 사치스러운 음식이었습니다. 야곱이 애굽 총리에게 신변의 위협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들들에게 준비하라고 한 선물이 바로 꿀이었을 정도이니 당시에 꿀이 얼마나 귀한 음식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귀한 음식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견한 삼손은 그 꿀을 퍼서 걸어가며 먹고 일부는 그의 부모에게 갖다가 주어 그들로 하여금 먹게 하였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귀한 음식을 부모에게 갖다 주는 효자처럼 보이지만 삼손의 일련의 이런 행위들은 효도의 행위가 아니라 자기도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그 죄의 전염을 부모에게까지 안기는 일종의 죄 도미노 게임이었습니다. 나실인의 덕목은 시체를 만지지 않는 것으로 부정한 것과는 가까이 하지 않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이런 나실인의 규례를 헌신짝처럼 여겼습니다. 이미 삼손은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하겠다는 고집으로 첫 단추를 맸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는 포도주를 금하는 율례를 어겼고 오늘은 사체를 만지지 말라는 법도 어겼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의 죄를 확산시켰습니다. 부모들에게 꿀을 주면서 그 꿀이 어디에서 얻었는지를 말하지 않았다고 역사서 기자는 기록합니다. 알리지 않은 것은 알리는 것이 곧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죄를 짓고 부모도 그 죄의 테두리 안으로 몰고 들어오는 꼴을 삼손이 제공한 것입니다. 죄는 또 다른 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그 또 다른 죄는 삼손 자신에게 부모인 신앙의 공동체로 전염되어 확산되었습니다. 죄는 마치 도미노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꼴이 된 것입니다. 총신대학교 김지찬 교수의 사사기 주해에서 “꿀은 자연산 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꿀은 삼손 이야기에서 일차적으로 이방 여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이방 문화, 이방의 삶의 총체적 방식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그렇다면 삼손은 나실인으로서의 삶의 방식보다는 이방 문화를 선호하고 이방 문화에 이끌려 이방의 삶의 방식으로 살고 싶어 했던 인물이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 꿀에 약한 삼손의 모습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것은 단지 헛된 상상일까?” 본문에 기록된 벌 떼 공동체의 우화적 기사는 앞으로 삼손은 물론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방 공동체와 더불어 기생하게 될 것이라는 사사기 기자의 해석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신앙적 색채 즉 정체성을 상실하고 이방 공동체와 더불어 살려고 하는 불신앙적 공동체로의 전락을 예시하는 것으로 학자들은 접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전 영역에서 삼손처럼 죄의 부정적인 영향력을 본인 스스로에 의해 알게 모르게 다른 이에게 부정적으로 전염시키는 결정적인 이유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의 상실 때문이라는 교훈을 찾게 됩니다. 삼손이 나실인이라는 본인의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불행과 불신앙이 시작되었고, 이방의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삼으려고 한 것과 포도주를 탐닉한 것, 부정한 시체를 멀리하지 않은 것, 그 사체 안에 있는 꿀은 보면서 사체와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는 본질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에게 나실인으로 태어나고 나실인으로 구별되게 삶으로 블레셋에게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할 도구로 택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삼손은 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나실인으로 부르신 주님의 콜링을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자신을 통해 일하시려는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의 미션을 사소한 것으로 전락시키자 이러한 불신앙적인 일탈로 인하여 먼저는 자신이, 그 다음으로는 부모가, 그 다음으로는 블레셋의 압제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리는 이스라엘을 차례로 무너뜨리는 암적인 도미노 현상의 주체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경계할 것은 이런 암적이고 부정적인 도미노 현상이 3,100-3,200여년이 지난 오늘도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일들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자행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색깔을 갖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백주에 행해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1:26절에 기록된 ‘크리스티아노스’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사람들의 공동체는 당시 가장 냉대의 소산이라고 보았던 이방의 변두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시골의 안디옥 공동체였습니다. ‘비로소’라는 단어를 통해 다른 지역 공동체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반증입니다. 오직 안디옥에 있는 그리스도 공동체에 있었던 자만이 그런 이름을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 되었다는 도전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은 믿음의 고백과 삶이 없는 사람은 고백할 수 없는 말입니다. 신앙은 도미노 게임과 같이 전염성이 있습니다. 나의 부정적 신앙의 행태를 보며 신앙의 자리를 경멸하는 자들이 나타나는 삶을 산다면 그는 정말로 불행한 교회 안의 불신자로 하나님의 심판 대상자가 될 것입니다. 쓰러지는 도미노가 아닌 다시 세우는 도미노 같은 모습으로 주님의 말씀과 복음의 능력을 갖고 분명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선포하며 승리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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