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04.27 셀 사역2024-04-22 12:30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열린 모임을 선포하며 기대되는 사역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네 (복음성가)
● 시온성과 같은 교회 (찬송가 210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도행전 1:1-2
● 제목 : 세인교회(世認敎會)
1) 누가가 쓴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구절을 비교하면서 데오빌로의 영적 변화를 설명해 보자.
● 누가복음 1:1-4

● 사도행전 1:1-2  

2)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셨던 많은 지침들이 강한 설득력을 갖고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담임목사의 설교를 중심으로
1) 본문과 관련하여

2) 빌립보서 2:5-8절과 관련하여  

3) 세상이 인정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함께 공유해야 하는 은혜와 결단은?
1) 공유해야 하는 은혜
2) 나의 결단
3) 창립 6주년을 향해 달려가는 교회에 대한 소망 나누기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가가호호 춘계 대심방을 위하여(정은희 셀)
  ② 2014년 봄 열린 모임 사역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봄 열린모임 사역하기
  ① 열린 모임을 선포하고 기도로 준비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4월 27일 교회 창립 5주년 기념 주일 설교
제목: 세인교회(世認敎會)
본문: 사도행전 1:1-2

바울의 제자였던 누가가 주후 80년경에 복음서를 편집하여 한 대상에게 헌정하였는데 그 대상이 누가복음 1:3-4절에 기록된 데오빌로 각하입니다.
데오빌로라는 수신자에게 붙여진 ‘각하’라는 호칭인 헬라어 ‘크라티스토스’는 AD 1세기 당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고위층에 있는 사람을 부르는 호칭으로 사용된 단어입니다. (참고: 영어성경 역-MOST EXCELLENT 혹은 MOST NOBLE 등의 뜻으로 표현)
주후 80년경 누가복음이라는 복음서를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전달 할 때 누가가 바라본 데오빌로의 신분은 격이 있고 위치가 있는 세속적인 가치를 담보한 그런 사람이었음을 추측하게 하는 증언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을 저술한 바울의 제자 누가가 약 주후 90년에서 95년 사이에 누가복음을 기록한 뒤 약 10-15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저술한 것으로 봅니다.
신약성경의 유일한 역사서인 사도행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사도행전 1:1-2절)

누가는 사도행전의 수신자를 10-15년 전에 누가복음이라는 복음서를 헌정했던 바로 그 사람 데오빌로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수신자의 신분 변화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데오빌로의 신분이었던 ‘각하’가 사라졌습니다. 수신자는 똑같은데 그 사람의 신분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 접했을 때 데오빌로의 신분은 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데오빌로는 그가 복음을 접한 뒤 10-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나서 각하라는 신분은 사라지고 ‘데오빌로’ 라는 이름만 남았습니다.
‘데오필로스’의 뜻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의 서두와 사도행전의 서두를 통해 기록되어 있는 이 사실을 통해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적어도 예수를 알기 전 데오빌로의 모습은 신분, 위치, 자리를 중요시 여겼던 존재였지만 예수를 알고 난 뒤 그의 모습이 이전에 목숨을 걸었던 세상적인 가치와 신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이제는 오직 주님의 친구로 족한 은혜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음을 보고해 주는 교훈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교훈입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도 뼈져리게 경험했던 바울은 빌립보서 3:4-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 자신은 최고의 출신과 학위와 최고의 출세 지향적 인프라를 가졌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군으로 모시고 난 뒤부터는 내가 생명을 걸었던 것들이 배설물과 같음을 알았다는 고백입니다. 반면 나는 이제 최고의 가치인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다는 선언입니다.

바울이 이런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과 데오빌로가 ‘각하’의 신분을 버리고 하나님의 친구로 만족할 수 있었던 비밀이 본문 1-2절에 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누가가 약 10-15년 전에 각하의 신분으로 있던 데오빌로에게 써서 보낸 글이 누가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가 전해준 예수님의 복음 사역의 핵심을 ‘행하시고 가르치시고 명하셨던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일 우선순위에 두고 감당하셨던 일이 몸소 행하시는 일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가르치신 것은 두 번째 행위였고 명령하신 것은 최종적인 행위였습니다. 즉 주님은 당신이 행한 것만 가르치셨고 명령하셨다는 말이 됩니다. 당신이 행하지 않은 것은 결코 가르치거나 명령하지 않았다는 교훈입니다.

성경적 내증의 한 예를 보면, 주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고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게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야단을 치듯 주님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임을 천명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이 선언을 들으신 뒤 아버지의 일을 방해하는 베드로의 사탄의 행태를 단호하게 나무라신 뒤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이 마태복음 16: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의 이 가르침이 공허하지 않는 이유는 말이 앞선 가르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먼저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지존의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앉으신 주님이 그 자리를 과감하게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그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데오빌로에게 누가가 보낸 첫 번째 글에 이렇게 누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를 버린 사건을 누가복음 2:7절에서 리얼하게 기록했습니다.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하나님이 하늘 보좌의 지존의 자리를 버리고 택하신 자리가 말의 밥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이자 아들이신 주님의 삶은 행하심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상기시켜 주는 대목입니다.
주님의 이런 삶을 존귀하게 여긴 바울은 그의 서신서 빌립보서 2:5-8절에서 주님의 행하심이 있는 삶을 본받자고 본인이 개척한 교회의 지체들에게 권면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은 주님의 이 마음을 품으라고 가르쳐줍니다. 주님이 행하심을 품고 행하라고 명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행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행하시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은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그 분의 가르침이었고 명령이었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의 철학적 사유의 고유 언어로 ‘DAS MANN(다스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독일어의 번역을 어떤 이는 ‘군중’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일상적인 사람’ 즉 ‘세인(世人)’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하이데거의 ‘다스만’ 즉 ‘세인(世人)’은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존재의 유한성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들 스스로가 자기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아름답지 못한 사람들을 세인(世人)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들이 접하고 있는 이 땅에는 하이데거가 지적한 수많은 다스만-世人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슬픈 것은 그 다스만-世人들을 위해 택하신 교회 공동체가 또 다른 다스만-世人共同體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우리 世認敎會가 세워졌습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은 世認敎會입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교회는 주님의 삶을 그대로 행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6주년을 향해 달려갈 방향은 교회 이름 그대로 불편하고, 부담이 되고, 쓰라리고, 유익이 되지 않고 도리어 손해가 되어도 말과 삶이 하나가 되는 교회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행하셨던 것을 우리도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소망이요 해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