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04.20 셀 사역2024-04-22 12:30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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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와 찬양 (WORSHOP)
● 우리 오늘 눈물로
● 주님께 영광 (찬송가 165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요한복음 11장 11-27절
● 제목 : 현재 진행형이십니까?
1) 주님이 베레아 지방에서 베다니까지 이동하신 시간적인 동선을 설명해 봅시다.
● 1일:
● 2일:
● 1일:  

2) 주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마르다와 나누었던 대화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마르다의 부활 신앙의 한계는 무엇이었습니까?
● 본문 21-24절과 설교 해석을 참고하세요.
① 긍정적인 요소:
② 부정적인 요소:  

3) 마르다가 가지고 있었던 부활신앙의 한계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갖고 있는 부활신앙의 한계를 점검하고 그 대안을 말해 본 뒤에 실천을 다짐해 봅시다.
● 한계:
● 극복 대안:
● 구체적으로 일주일 동안 부활의 신앙을 현재진행형화 시킬 수 있는 사역들을 나누어 보십시다.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가가호호 춘계 대심방을 위하여(최은미②셀)
  ② 2014년 봄 열린 모임 선포 예배를 위하여
    (4월 27일 주일오후예배)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수요 셀별 기도회 참석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4월 20일 부활주일

제목 : 현재 진행형이십니까?
본문: 요한복음 11:17-27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마 5:1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비슷하지만 다른 의미의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무리’라고 번역된 헬라어‘오클로스’는 어원적으로 ‘오합지졸’을 의미하는 반면‘제자’라고 번역된‘마데테스’는‘닮는 사람’혹은‘배우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신약 편에서‘제자’라는 이 단어를‘인생을 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실 때 상당수의 오합지졸과 같은 그냥 모여든 무리들이 있었는가 하면  예수께 인생을 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카일 아이들먼 목사는 그의 책 not a fan 에서 무리들은 팬으로, 인생을 건 사람은 제자로 구분했습니다.

우리는 삶은 팬으로 남고 싶고 하나님께는 제자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이율배반의 딜레마에 빠집니다. 쫓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계속해서 받고 싶지만 내 것은 결코 빼앗기고 싶지 않은 두 가지의 마음에서 널뛰기하며 제자 되는 삶을 심장에서는 거부하고 있다면 그것은 *부활의 신앙이 나에게 현재 진행형으로 적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주전 165년에 시리아의 악독했던 통치자였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이 유다 마카비에 의해 회복된 것을 기념하는 하누카 즉 유대의 절기인 수전절에 예루살렘에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몰려 있는 그곳에서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를 갖고 이 땅에 왔으며 하나님과 당신은 하나임을 강력하게 선포하심으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적극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을 본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감히 신성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예수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하자 예수님은 그곳을 피하여 다른 장소로 피하셨습니다.
그 근거가 요한복음 10:40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요단 강 저편’으로 기록된 이곳을 요단 강 동쪽인 베레아 지역으로 추정하는데 예수께서는 이곳에 머물면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일단의 사람들의 방문을 받게 되었는데 그들은 평소에 예수께서 자주 들리시던 베다니에서 온 사람들로 사랑하는 친구의 가정인 나사로의 누이동생들이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전한 급보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친구인 나사로가 중병에 들어 그의 누이들이 자신들의 집으로 빨리 와 주실 것에 대한 심방 요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말을 들으시고 난 뒤에 그리 급하게 서두르지 않으시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반응을 하셨습니다.
나사로의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당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일이라고 선언하신 뒤에 이틀을 더 머문 후 친구인 나사로를 깨우기 위해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해서 베다니에 도착하신 주님의 그 다음 행적을 소개하고 있는 기사입니다.

예수님은 요단 강 동쪽 땅이었던 베레아에서 나사로의 위급한 소식을 들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틀을 더 지체한 후 베레아를 떠나 베다니로 가셔서 하루가 더 소요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보낸 사람들이 베다니에서 예수님이 계시던 베레아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 하루이니 그녀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데에 소요된 시간은 4일이라는 시간이 소요된 것입니다.
4일 만에 도착한 베다니에 왔을 때 친구 나사로는 이미 죽어 있었고 그가 죽은 날짜를 계산해보니 자매들이 예수님의 심방을 요청한 바로 그 날인 4일 전이었습니다.
이런 정황을 전제할 때 예수님과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친밀했던 관계는 위기감이 돌았을 것이고 나사로 가정을 위로하기 위해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입장이 난처했을 것입니다.

본문 21-24절에 기록된 말씀은 마르다가 주님을 보자마자 억누르고 있었던 푸념 겸 원망 겸의 감정을 토로하고 주님이 그녀의 말에 답변하신 대화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와 주님의 이 대화 속에서 오늘 우리들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양면성의 신앙을 보게 됩니다.

① 주님이 빨리 4일 전에 오셔서 오라버니와 함께 하셨다면 내 오라버니가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푸념 섞인 긍정적 믿음입니다. 그러나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주님께 호소하면 뭔가 주님이 이루어주실 은혜를 기대하는 믿음입니다.
② 그 믿음을 오늘 나의 삶의 현장으로 견인하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1번 정도의 믿음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도달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2번의 믿음입니다.
마르다는 주님이 이제 오셨고 뭔가를 이루어주실 것을 믿었지만 그 기적은 바리새적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죽은 자의 부활이 먼 훗날이나 이루어지는 것 정도 믿는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당장 현실적으로 그 부활이 현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까지 연결시키는 믿음은 마르다에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믿기는 지체하는 것이 본문 25-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님이 말씀하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이 말을 과학과 이성이 발달한 오늘의 시대에 또 무신론자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사기꾼의 거짓말처럼 들릴지 모르나 주님의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부활신앙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들의 코끝에서 호흡이 멎은 죽음에서 다시 호흡이 주어짐으로 육체가 일어나는 그런 제한적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육적인 죽음에서의 다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라면 항상, 늘 언제 어디서나 영적으로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땅에서 하늘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가능한 것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어 살 때는 날마다 주어지는 현재 진행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42-44절에서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현재 진행의 부활은 썩지 않는 부활입니다. 현재 진행의 부활은 영광스러운 것의 다시 살아남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이 땅에서 경험하는 부활의 현재 진행형 부활입니다.

부활 신앙은 주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나의 삶으로 오늘 현재진행의 형태로 답할 때 계속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기독교 최고의 선물이며 은혜입니다.

부활신앙을 오늘 나의 삶의 영역에서 현재진행으로 실천해 나아갈 때 나의 영적인 무덤에 박혀 있는 돌을 굴려 무덤 문을 열 수 있는 것이며, 베로 단단하게 묶여 있는 나의 덕지덕지한 욕심의 수건을 풀어 놓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으로 나만의 부활에 흡족해 하며 살아가는 비정상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모세처럼 나의 욕심의 신발을 벗고 삶으로 고통 받고 있는 동족에게 나아갔던 것처럼 영적 애굽 땅에 살고 있는 이 땅 제천과 대한민국의 백성들을 구원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날마다 나의 삶에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는 현재 진행형 부활신앙의 소유자가 되어 주님의 부활을 오늘 나의 삶으로 승화시켜 이 민족에게 소망의 빛을 전하는 현재진행형 부활의 메신저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