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내가 경험하고 있는 미디어 중독에 대하여 나누고 금식하는 방법과 대안 노하우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네 ● 주를 위한 이곳에
●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찬 338장) ●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찬 290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사사기 13:15-18 ● 제목 :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1) 이번 주간 설교 중에 나타난 마노아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치명적인 영적 문제를 나누어 보자. 담임목사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나누어 보십시다. (예) 음식 대접, 이름 질문 등등을 참고하자) |
2)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인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지 신명기 6장의 쉐마와 연결하여 설명해 보자. 3)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종교적인 쇼를 나의 예배 습관과 비교하여 적용해 보십시다. ● 하나님께 드렸던 예배 나누기
● 종교적인 쇼로 드렸던 예배 나누기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가가호호 춘계 대심방을 위하여(송은호 셀) ② 고난주간 미디어 금식을 위하여 ③ 화요일 인턴 셀 사역을 위하여 ➃ 양육 중에 있는 훈련생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고난주간 사순절 세 겹줄 기도에 동참하기 ② 미디어 금식에 동참하기 ③ 수요 셀별 기도회 참석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2014년 4월 1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72번째 강해) 본문 : 사사기 13:15-18 제목 :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위로를 받기 위해 교회를 나온다면 그 목적은 틀린 것입니다. 우리들이 교회를 나오는 이유는 위로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단 지파 출신 소라 땅에 거주하던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그를 통하여 의심이 되던 내용들을 자신의 아내가 들었던 그대로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전언을 똑같이 듣고는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자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는 것이 본문 15-16절입니다.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내가 네 음식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함이었더라”
마노아의 제안은 하나님의 사자에게 음식을 대접할 테니 잠시만 시간을 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음식을 대접하겠다는 것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던 하나님의 사자를 끝까지 하나님의 대리자인 영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선지자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분별력이 없었던 마노아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답답한 나머지 가르침을 준 것이 ‘나는 음식을 먹지 않을 터이니 만에 하나 번제를 드리려거든 하나님께 드리라’는 권면이었습니다. 마노아가 눈으로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의 사자인 줄을 알지 못한 까닭은 당시 세대가 하나님을 잊은 세대였기에 당연히 마노아도 하나님께 대한 영적인 상태가 제로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영적 감각 제로인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식사대접을 거절당하자 이번에는 본문 17절에서 그의 이름을 묻습니다.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하니” 마노아는 만에 하나 당신이 말한 대로 아내가 아들을 낳게 되면 그 때에 당신을 존귀하게 여기겠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자는 자기는 사람으로부터 대접을 받을 존재가 아님을 밝히고 도리어 대접을 뛰어넘어 영광을 받으실 분이 하나님이심을 마노아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런대도 마노아는 아들을 낳게 되면 아들을 낳게 해주신 주체이신 하나님이 아닌 바로 당신 그 사자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겠다고 이름을 알려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 기막힌 요구를 들은 하나님의 사자는 그것도 단호하게 거절하고 마노아에게 이렇게 답변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본문 18절). 사자의 답변은 이름을 알려준 것이 아니라 ‘어찌하여 나의 이름을 묻는가?’ 를 되물으면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후 파리’이 뜻은 직역하면‘그것은 비밀이다.’라는 말로 즉 ‘알려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자기의 이름을 알려달라는 마노아의 청을 거절한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사자는 자기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겠다는 마노아의 말처럼 결코 존귀하게 여김을 받을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영광과 존귀와 예배와 번제를 받으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예배는 하나님만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예배의 정체성입니다.
*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것만이 예배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만이 예배입니다. 만에 하나, 하나님께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일체의 행위 속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불순물이 첨가되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 그 불순물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노아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상실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 자기에게 유익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 뒤에 그 유익을 준 대상을 존귀하게 여기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뒤이은 19절에서 마노아는 여호와께 번제물과 소제물을 가져와 하나님께 드립니다. 마노아가 드린 이 제사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져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거나 열납하지 않으십니다. 누군가에 의해 강요되어 드리는 제사, 하나님이 받으실 리 만무입니다. 내 영이 기뻐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만 드리는 영광의 예배,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란, * 삶의 예배입니다.
아이든 토저는 “만일 당신이 일주일의 7일간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일주일에 단 하루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은 것입니다. 주일 예배 후에 월요일 예배, 화요일 예배, 수요일 예배 등으로 삶의 예배가 계속 이어지지 않으면 주일 예배도 의미가 없습니다.(-예배인가? 쇼인가? 중에서)”라고 말했습니다. 삶으로 드리는 예배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한국에 파송된 외국인 선교사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 그리스도인들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그의 멘트가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대한민국 크리스천들의 일주일의 스케줄은 이렇게 진행되는 것 같다. 일요일 다음 일요일,일요일,일요일,일요일,일요일,일요일이다.” 선교사의 눈에 비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정체성이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일요일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질타입니다. 축도 이후는 별로 관심이 없고 월요일의 그리스도인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6:4-9절은 이스라엘의 국민교육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쉐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신 6:4-8).
쉐마의 내용이 너무나 중요하기에 이 정도로 명령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쉐마를 생명처럼 여기면서 암송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쉐마의 가장 위대한 압권은 9절입니다.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 쉐마의 내용을 집의 안쪽 문에 기록하라고 하지 않고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한 이유를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하루의 삶을 사는 현장은 집 안이 아닌 바깥입니다. 집 안은 하루의 삶을 마감하고 쉬는 곳입니다. 우리들이 활동하고 사는 영역과 현장은 항상 바깥문 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의 삶을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바깥문에서 항상 긴장하며 되새김질해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쉐마 대로 살았는가?’입니다. ‘내가 오늘 나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았는가?’ 를 묻는 것입니다. 예배자는, 교회에서 두 손 들고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하는 사람이 예배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에서 결단하고 나간 뒤에 반드시 바깥문의 영역에서 그렇게 결단한 대로 사는 자들입니다.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에 위치한 서밋 교회의 담임목사인 J.D 그리어 목사가 쓴‘복음 본색’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깨닫는 것과 우리 전 삶에 미치는 복음의 영향을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다르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본질 추구에 관하여 아무리 외쳐도 본질을 사수하자고 다짐한 나의 전 삶의 영역에서 복음의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지 못하고 또한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이것이 본질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사수하는 것이 본질입니다.’라고 수없이 되 뇌였지만 그 되 뇌임 이후에 그 십자가로 세상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진정으로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내영이 기뻐 하나님 한 분만이 필요해서, 간절해서 그 분을 찾기 위한 예배가 아니라 내가 필요한 때만, 나의 필요에 의해서, 나의 유익함을 위해서’드리는 예배라면 우리의 예배는 종교적인 쇼에 참석한 것이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뜨레스디아스의 위험성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경험하는 은혜의 통로(예배)가 아닌 감정의 터치를 통한 인위적이고 종교적인 쇼의 행위가 더 강하다는 것입니다. 레슬리 뉴비긴은 ‘타당한 확신’에서 “기독교 신앙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확실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부르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인간의 전적인 헌신에 관한 문제이다.”라고 갈파 했습니다.
예배는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나아가는 나의 삶입니다. 아이든 토저(예배인가? 쇼인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① 그리스도 예수를 배반하고 인기를 숭배하는 종교적인 쇼의 작태를 그치라 ② 예배 안에 도입되어 있는 쇼 비즈니스 같은 간증을 집어치우라 ③ 인간에게 아첨하는 예배를 벗어 던지고 하나님께만 예배하라 ④ 재미있게 하는 우상을 초토화시키고 편안을 추구하도록 하는 사탄에게 예배하지 말고 자기 이름을 제거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라 ⑤ 자기를 찬양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하라.”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사의 말대로 예배는 유람선에서는 드릴 수 없습니다. 예배는 사탄과의 치열한 전쟁에서 승리를 노래하는 군함에서만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나를 위로 받는 자리가 아니며, 예배는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예배자에게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우리는 마노아와 같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종교적인 행위로 만족하는 비극적인 종교인이 됩니다. 유일하게 하나님께 예배하던 에스겔처럼 하나님이 이렇게 나에게도 오셔서 당신의 뜻을 위탁할 수 있는 예배자들이 됩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