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04.06 셀 사역지2024-04-22 12:29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가정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는 주인공 솔직히 나누기 (그렇게 된 이유까지 나눌 수 있으면 더욱 좋음)  

 
경배와 찬양 (WORSHOP)
● 내가 주인삼은  (복음성가)
●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찬송가 425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13:8-14
● 제목 : 당신은 주도권을 갖고 계십니까?
1) 하나님께서 단 지파 소라 땅에 살고 있었던 마노아의 가정에 영적인 주도권을 갖고 있었던 자로 인정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그리고 그 사람을 그렇게 인정한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 누구였습니까?

● 그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본문 6-7절을 참고하십시오.)

● 11절에서 영적인 주도권을 잃은 자의 모습도 함께 참고하십시오.
  

2) 설교에서 등장한 인물들 중에 영적인 주도권이 뒤바뀐 사람들에 대하여 나누어 보자.
* 두 부부 이야기(사도행전 18:1-3, 로마서 16:1-3절 비교)

* 사도행전 14:19-21절에 나오는 두 사람의 이야기 (들었던 주일 설교를 되새김질하여)
  

3) 영적인 주도권을 얻기 위해 해야 하는 결단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의 삶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 영적인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한 방법 - 설교를 중심으로

* 4월6일-12일까지 한 주간동안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을 피상적인 나눔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으로 나누어 보십시다.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가가호호 춘계 대심방을 위하여(최은미①셀)
  ② 사순절 세 겹 줄 새벽기도회를 위해
  ③ 화요일 인턴 셀 사역을 위하여
  ➃ 양육 중에 있는 훈련생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사순절 세 겹줄 기도에 동참하기
  ② 수요 셀별 기도회 참석하기
  ③ 사순절을 묵상하며 절제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4월 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71번째 강해)
본문 : 사사기 13:8-14
제목 : 당신은 주도권을 갖고 있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도권을 갖고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는 결코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복음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20:26-28절, 23:11-12절) 교회는 쌓아두는 곳이 아니라 버리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으고 모아 쌓을 곳이 없도록 축적하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와 주도권을 아낌없이 버리는 자들입니다. 이상의 내용과 교훈에 이의(異意)를 달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이것에 대하여 다른 이견(異見)을 내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반면 절대로 버리면 안 되는(포기하면 안 되는) 주도권이 있습니다.

사사 삼손의 탄생 이전까지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께 패역하고 하나님을 구하지 않은 채 블레셋의 40년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괘씸했지만 안타까운 마음으로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번에는 직접 나서서 소라 땅에 살고 있는 단 지파 사람 마노아의 가정에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이 사자가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 받고 하나님의 계획을 전언해 준 하나님의 대언자임이 분명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철저한 가부장적인 시대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여호와의 사자가 시대의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찾아간 사람은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마노아의 아내였습니다. 이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임하여 그녀에게 아들을 낳을 것을 고지했고 태어날 아들은 이미 태중에서 하나님이 임명한 나실인이기에 아들이 태어나면 나실인으로 해야 할 의무 조항까지 고지했습니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사자로부터 전해 받은 이 여인은 남편인 마노아를 찾아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남편에게 알리는 내용이 본문 7절까지의 기사입니다.

아내로부터 득남 고지를 전해 받은 남편 마노아는 마음이 급해지자 그 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하나님께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본문 8절은 마노아가 별로 미덥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였지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본문 9절의 하나님이 들으신 기도응답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였으나 그의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기도는 마노아가 했는데 그 기도를 응답하기로 마음먹으신 주님이 두 번째도 마노아가 아닌 그의 아내에게 또 보내신 것입니다. 두 번째 현현한 하나님의 사자도 마노아가 자리에 없었을 때 그의 아내에게 임한 것입니다. 아내 된 이 여인은 급히 남편에게로 가서 전에 자기에게 임하여 득남 고지를 했던 그 하나님의 사자가 또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아내의 전언을 받은 마노아의 반응이 본문 11절입니다. “마노아가 일어나 아내를 따라가서 그 사람에게 이르러 그에게 묻되 당신이 이 여인에게 말씀하신 그 사람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내가 그로다 하니라” 마노아는 아내를 따라 그 하나님의 사자가 있는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게 됩니다. 사자를 만난 마노아는 태어날 아들에 대한 메시지를 재확인 받고 양육의 방법까지 사자로부터 전수 받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왜 하나님의 사자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에 걸쳐서 마노아가 아닌 마노아의 아내에게 임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사자가 두 번째로 마노아의 아내에게 임한 것의 원인은 마노아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방문한 하나님의 천사가 당연히 마노아에게 임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지 않은 그 이유를 본문 6-7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의 남편에게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오셨는데 그의 모습이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부터 그가 죽는 날까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 하니라”

여인은 졸지에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를 만난 것도 충격적이었을 텐데 더 충격적인 소식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고지였습니다. 그 아들은 나실인이 될 것이라는 파격의 소식까지 전해 받자 이 여인은 곧바로 남편에게 와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을 차분하게 전합니다. 본문 정황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가 여인에게 자신을 소개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녀는 ‘그가 아들 탄생을 고지했고 태어날 아들이 나실인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만을 전해 들었던 것이 전부였습니다. 이 여인이 살고 있었던 시대는 하나님을 잊고 영적으로 가나안의 7족속들이 섬기고 있었던 각양의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던 패역의 시대였습니다. 또한 블레셋 통치 40년 세월의 시대라는 것을 전제할 때 블레셋의 신이었던 다곤 신이 전반적으로 소라 지역을 강타하여 종교적으로 휩쓸고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이 사라졌던 시기였음이 분명한데도 그녀는 곧바로 남편에게 보고 하는 보고에서 자기에게 나타난 분이‘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이쉬 엘로힘’에서‘엘로힘’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이스라엘이 불렀던 유일한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잊혀진 시대였지만 그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런 영성을 갖고 있었던 여인은 하나님의 사자로 인하여 아들이 나실인이 될 것이라는 고지를 받을 때 언급된‘태에서 나옴으로부터’(5절)라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보고할 때는‘태에서부터 죽는 날까지’(7절)라는 표현으로 표현함으로 당시의 본인의 심리적 상태가 매우 영적으로 기뻤던 상태였음을 보게 됩니다.

마노아 아내의 이런 영적인 영성을 아름답게 본 구약학자 슈나이더(Schneider)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삼손 시대의 유일한 영웅은 삼손이 아니라 삼손의 어머니였다.” 같은 맥락에서 구약신학자인 알터(Alter)도 이렇게 그녀를 추앙했습니다. “이름을 밝혀지지 않았지만 마노아의 아내는 매우 차분하고 침착하며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잘 깨닫고 있는 현명한 여인이었다.” 이에 반하여 마노아는 두 번째 아내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임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사자가 있는 곳으로 그를 만나러 갑니다. 그 근거가 본문 11절입니다. 아내에게 임한 하나님의 사자를 보기 위해 마노아는 아내를 따라갑니다. 본인이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자는 그에게 임하지 않고 아내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전해 준 말을 듣고 사자가 있는 곳까지 아내를 따라가는 마노아를 보면서 영적인 주도권을 빼앗긴 자의 초라함을 느끼게 됩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영적인 가르침은 영적인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 영적인 주도권을 빼앗기지 마십시다.

세상의 주도권은 할 수만 있다면 버려야 하지만 영적인 주도권은 손에 쥐고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빼앗기면 신앙의 전부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영적인 주도권을 빼앗긴 자의 모습은 마치 본문의 마노아처럼 참으로 초라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을 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붙여 주셨습니다. 같은 업인 장막을 만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였습니다. 사도행전 18:1-3절에서 하나님이 이들 부부를 만나게 해주어 그들로 하여금 바울의 후견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들 부부는 정말로 최선을 다해 바울 사도를 물질적으로 돕는 동역자로 섭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의 수고에 감사하여 그가 쓴 최고의 교리서인 로마서 16:3-4절에서 로마 교회의 지체들에게 아낌없이 그들을 소개하며 격려합니다. 사도행전은 신약의 유일한 역사서로 이스라엘의 연대기에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구약성경에 이어 연속적으로 담겨지고 있는 기록들입니다. 이런 역사서에 기록된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시에(주후 50-52년경) 만났던 이들 부부의 기록 순서는 당연히 남편 아굴라와 아내 브리스길라였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사역을 같이 하고 난 뒤 바울이 로마서를 집필한 시기인 주후 55-56년경의 기록에는 부부였지만 두 사람의 기록 서열이 브리스가와 아굴라로 바뀌었습니다. 유대 지역의 역사 기록 방식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서열이 우선인 사람을 앞에 기록합니다. 불과 사역의 3-5년 어간에 영적인 주도권이 뒤 바뀐 것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이름 서열이 뒤 바뀐 기록이 신약성경의 역사서라는 점에서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초대 이방 교회 공동체였던 안디옥 교회는 사도행전 역사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교회 공동체였습니다. 이 때 안디옥 교회에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 두 사람을 뽑아 선교사로 파송하는 장면이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데 이 때의 분명한 서열은 바나바 다음에 바울이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영적인 주도권은 바나바에게 있었으나 사도행전 14장의 루스드라 사역을 마치고 난 뒤부터 사도행전의 역사가는 그들의 이름을 바울과 바나바로 기록합니다. 루스드라 지방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시기 당해 바울은 거의 숨이 끊어질 정도의 린치를 당했습니다. 그가 가장 격정적으로 유대인들과 우상을 숭배하던 루스드라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통을 당해 죽음의 위기에 몰렸지만 바나바는 바울을 위한 단 한 마디의 변호와 지지 메시지를 선포하지 않고 함구합니다.(사도행전 14:19-21절) 그는 바울의 거의 죽은 몸을 건사하려는 무리들과 함께 그의 상한 몸을 지켜만 보고 있었던 방관자(구경꾼)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사역한 바울과 방관자였던 바나바가 영적 주도권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14장의 이 시건 이후로 그들의 이름은 바나바와 바울에서 바울과 바나바로 역전됩니다. 바나바는 사도행전 15장 이후부터는 이름조차 완전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반면 바울은 신약성경의 1/3에 해당하는 13권의 책을 저술하고 지금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의 신앙적 삶의 테두리 안에서 은혜를 적용하는 방법은 영적인 헤게모니, 영적인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주도권을 잃지 않고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 세속적인 주도권을 내려놓으면 영적인 주도권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것 중에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이 땅에서 내가 갖고 있는 기득권의 안전함과 편리함과 보장된 미래를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붙들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아름다운 복을 원한다는 것은 그가 종교인 일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내 삶에서 세속적인 주도권과 헤게모니와 가치를 내려놓으면 하나님께서 영적인 하나님의 주도권을 쥐게 하십니다. 주님을 위해‘나’라는 세속적 주도권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주도권을 소유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