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지난 화이트데이를 어떻게 보내셨나요? 셀원들과 나누어 보세요. | 경배와 찬양 (WORSHOP)● 보혈을 지나 ● 그 참혹한 십자가에 (찬송가 269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사사기 12:8-15 ● 제목 : 부족한 2% 때문에 1) 대 사사들에 비해 소 사사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 본문 8-10절: ● 본문 11-12절: ● 본문 13-15절: |
2) 소 사사들의 인생에서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 나에게 어떤 영적 의미가 있습니까? 3) 나의 영적 삶의 98%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부족한 2%는 무엇입니까? ● 내 삶의 98% :
● 내 삶의 2%:
● 2%를 채우기 위한 전략: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사순절 세 겹 줄 새벽기도회 참석을 위해 ② 화요일 인턴 셀 사역을 위하여 ③ 주중 성경 통독 사역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성경통독 사역에 동참하기(이사야 11장~) ② 수요 셀별 기도회 참석하기 ③ 사순절 세 겹줄 기도에 동참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2014년 3월 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68번째 강해) 본문 : 사사기 12:8-15 제목 : 부족한 2% 때문에
이 땅에 존재하는 가시적 교회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 강력한 영적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사명자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이든지 아니면 종교를 취미생활로 생각하여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예수를 하나의 데커레이션 정도의 마스코트로 삼아 영적으로는 죽은 송장과도 같은 종교인들이 모여 있는 공동체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입다가 죽고 난 뒤에 입산, 엘론, 압돈 세 명의 소 사사가 등장합니다. 사사기 10:1-4절에서도 돌라와 야일 두 명의 소 사사가 있었는데 이들이 소 사사인 이유는 대 사사들에 비해서 죽을 때까지 종신직으로 행정적인 일과 사법적인 일만을 맡아서 사역을 했다는 공통점과 이들의 시대에는 전쟁이 없었다는 점에서 대 사사와 구별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입산, 엘론, 압돈의 이력을 보면 사사 입산은 출신 배경이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본문 9절의 이력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칠 년이라”
그는 30명의 아들과 30명의 딸을 두어 도합 60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주목할 것이 그가 행한 결혼 전략입니다. 아들들의 아내들 즉 며느리는 베들레헴 이외 지역의 장소에 살고 있는 딸들을 선택했고 반대로 사위들을 볼 때에는 이번에는 딸들을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으로 시집 보내 역시 다른 지역의 남자들을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입산이 정치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증언입니다. 그는 본인의 사사 위치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 정략적인 결혼을 시켰다는 말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평화의 시기와 전쟁이 없는 자기의 시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본문 두 번째로 등장하는 사사 엘론은 스불론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력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10년을 통치하고 죽어 그의 고향인 아얄론에 묻혔다는 간단한 이력입니다.
본문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사사 압돈은 본문 14-15절에서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 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 압돈은 딸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들만 40명이 있으며 동시에 손자가 30명이었다고 보고 합니다. 그의 통치기간은 8년이었고 그는 죽어 아멜렉 사람들이 살고 있던 산간 지역이었지만 후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접수한 땅인 비라돈에 장사되었다는 것이 그의 이력의 전부입니다. 그의 자녀와 자손들은 어린 나귀를 70마리를 타고 다닐 정도의 뷰유함을 경험한 오늘날의 재벌 2,3세와 같은 정도의 신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첫 사사로 등장하는 사사‘이브짠’의 뜻은‘날렵한 자’라는 뜻으로 그는 정말 이름대로 날렵한 정책을 폈습니다.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자기가 이끌던 시대의 평화가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다른 지역과 혼인 정책을 펴서 정치적, 경제적 입지를 구축하려는 그의 정책은 기민하고 날렵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정치 권력자로 나름 자신의 입지를 그렇게 구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두 번째 사사인‘에론’은‘참나무, 상수리나무’의 의미를 갖고 있는 이름입니다. 그의 치세에 전쟁이 없었으니 그는 개인적으로 이스라엘을 단단한 참나무 같은 치세로 만들었던 것이 성경에 구체적인 설명이 없지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사사인‘아브돈’은‘섬김’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녀 손들을 섬기는 데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주 가정적인 아버지, 할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자녀들과 손자들을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키웠고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압돈의 자손들은 물질적으로 부러울 것이 없이 자랄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에 기록된 소 사사들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들의 이력을 보고 정략적인 결혼을 시킨 입산을 보면서 참 지혜로운 정책을 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엘론 사사를 보면서 별 문제없이 사사 직을 감당하다가 때가 되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도 있을 것입니다. 압돈을 보면서 그의 삶을 동경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습에서 영적인 부족함의 2%가 있습니다.
* 하나님과의 무관계성입니다.
세 명 사사들의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삶, 가정, 평화, 안락, 물질적인 부유함, 자손들의 번성함”은 영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사사의 공통점은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잘못 산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요즘처럼 무소부재의 이권을 챙긴 것 같지도 않습니다. 자손들이 번성한 것을 보면 성적인 부분에서도 별 일탈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다 좋은 데 2%가 부족합니다. 영적으로 부족한 2%는 나머지 98%를 단숨에 잠식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함정인지 유일하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맘대로 살고 싶어 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네 삶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해석 불가능한 불가사의처럼 보이는 일들이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사는 시대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5:18절을 보면,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이 요셉과 베냐민입니다. 그 중에 둘째였던 베냐민은 원래 이름이 베냐민이 아니라 베노니라는 라헬이 지은 이름이었습니다. 그녀는 둘째를 난산 끝에 해산하고 본인은 생을 마감합니다. 그녀는 어미 없이 자랄 아들을 생각하니 제대로 눈을 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랄 아들의 이름을‘벤-오니’라고 지었습니다. 번역하면 ‘나의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라헬은 자기가 낳은 둘째 아들의 미래를 육체적, 세속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이름을 지어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인 야곱은 그의 이름을 개명하여 ‘벤-야민’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이름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오른손은 말할 것도 없이 야웨 하나님이셨습니다. 야곱은 아내와 달리 아들의 앞날을 하나님과 관계하여 조명했고 기대했다는 말입니다. 아내 라헬이 순수하게 사람의 관점으로 해석하여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아들의 미래를 바라보았지만 야곱은 아들의 미래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하나님께서 아들을 승리하는 아들로 만드실 것을 기대하며 이름을 개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붙들리는 삶을 사는 아들의 인생과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이 슬픔의 인생을 사는 아들과 동일할 수 없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1960-70년대의 전설적인 테니스선수 아더 애시는 50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그는 삶의 마지막까지 철저히 하나님과 접붙였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조국교회는 병들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축복에 대하여는 ‘왜 접니까?’ 묻지 않고 나에게 임한 불편함과 축복하지 않으심에 대하여서는 영락없이 ‘왜 접니까?’ 묻는 자들이 조국교회에 우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조금도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전혀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전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데도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이대로 영원하라’의 올무에 붙들려 안위하고 있는 무감각에 살고 있습니다.
20세기 중국에서 법리학자이면서 신실한 가톨릭 학자인 우장숑 박사는 그가 하나님을 찾은 뒤에 깨달은 깨달음을 그의‘동서의 피안’에서 이렇게 갈파하고 있습니다.“하나님께서는 마치 나와 숨바꼭질을 하신 것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찾지 못하신 것은 하나님이 무능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의 잘못 때문이었다.”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영성입니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평화의 시대에 통치하던 세 명의 사사시대는 축복의 시대가 아니라 재앙의 시대는 아니었 는지 되새겨 보아야겠습니다.
오늘을 사는 나에게 부족한 2%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에 대한 무감각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의 98%를 좌우하고 무너뜨릴 수 있는 강력한 파괴력을 갖고 있는 2%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5:25-27절에 나오는 므두셀라는 이 땅에 태어난 969세라는 엄청난 세월을 살면서 인생의 이력을 이렇게 딱 한 줄 남겨놓는 인생이었습니다. “아들 한 명을 낳고 969년 동안 무지하게 오래 살다 죽음” 장례식만을 이력으로 남기는 무능한 교회, ‘오래 살고 죽었더라’는 장례식 인생이 되지 않고 내 인생을 하나님께 젖 붙여 그 궤도가 하나님께서 지배하시고 이끄시는 인생이 됩시다.
“내가 태어날 때는 내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이 웃었고 나만 울었다. 그러나 내가 죽을 때는 나는 웃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아쉬움에 울 수 있는 인생을 살라.”는 혹자의 말처럼 하나님과 내 인생이 관계되는 삶으로 승리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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