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사랑’으로 기적을 경험한 이야기 나누기 (예. 갓 태어난 쌍둥이의 포옹으로 약한 아기가 회복된 이야기) | 경배와 찬양 (WORSHOP)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사사기 12:1-7 ● 제목 : 힘은 정답이 아닙니다. 1) 본문에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 내전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 삿 11:39-40절:
● 삿 12:1-4절(삿 8:1-3): |
2) 본문 속 내전이 일으킨 영적 교훈을 설교를 중심으로 정리해 봅시다. ● 삿 12:5-6절 vs 요한복음 18:10-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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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기 위해 나는 오늘도 어떤 선택을 하고 있습니까? ● 진실 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몫(레슬리 뉴비긴):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절제하는 삶으로 은혜로운 사순절을 보내도록 ② 인턴 셀 사역을 위하여 ③ 진행 중인 성경 통독 사역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성경통독 사역에 동참하기(역대하 16장~) ② 사순절 세 겹줄 기도에 동참하기 ③ 수요 셀별 기도회 참석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2014년 3월 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67번째 강해)
본문 : 사사기 12:1-7 제목 : 힘은 정답이 아닙니다.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THE MISSION’에서 힘없는 수도사 두 사람이 포르투갈의 폭력 앞에 비폭력 저항으로 맞선 싸움에서 가브리엘이 말한 ‘힘이 정의라면 사랑이 설 자리가 없다.’는 촌철살인은 지금도 이 시대가 힘이 곧 물리력이며 가공할 만한 무력으로 삼기에 비극이 끊이지 않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힘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원천이라고 믿기에 그 힘을 축적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 그 힘보다 더 위대하고 귀한 품음과 덮음과 싸맴과 돌봄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힘이 정의일 때 나타나는 무서운 결과를 고발하는 한 사건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입다는 자기의 쓸데없는 고집과 불신앙으로 인해 소중한 딸의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전적인 본인의 잘못된 신념으로 인한 불행이었기에 이 시기가 입다에게 대단한 불안정과 고통의 시기였음을 본문 7절에서 추측하게 합니다. “입다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에 있는 그의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입다는 사사기 역사에 기록된 사사들 중에 가장 짧은 사사 재위를 기록했고 더불어 항상 사사들의 사역이 마감될 때마다 상용 어구처럼 등장하는 몇 년의 평화가 임했다는 구절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딸을 죽인 죄책감으로 인해 사사의 직을 오랫동안 수행할 수 있는 심리적 상태가 아니었다는 분석이 학자들의 결론입니다. 또 하나는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인해 그는 평화의 시대를 정착한 사사가 아닌 실패의 본을 보인 잔인한 사사였기 때문이었다는 결론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오늘 전체 본문의 내용입니다.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한 입다는 승리의 기쁨은 잠간 이었고 딸을 죽이는 기가 막히는 일을 행한 비련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해마다 길르앗 주변에서 벌어지는 4일 동안의 딸을 애곡하는 장송곡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 장송곡을 들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아마도 온전한 정신으로는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입다의 심정을 극도로 분노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사기 8:1-3절에 있었던 에브라임 지파의 시비가 기드온 사사 때에 이어 이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본문 1절에서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
에브라임 지파는 자신을 부르지 않고 우습게 여겼다는 시비를 걸어 입다에게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는 으름장으로 몰아세웁니다. 적어도 이들은 기드온 시대에 맛보았던 불로소득의 이익을 얻어 보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 지파의 이러한 못된 습성이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입다는 불과 몇 해 전 자기의 집에 불을 붙였던 사람입니다.(딸을 번제로 드린 것) 그런데 오늘 에브라임 사람들이 또 다시 그 아픈 상처를 건드린 것입니다.‘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1절 하반절) 가뜩이나 상처로 인해 무너져 있는 입다의 상흔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소금을 뿌린 격이 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입다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본문 2-6절까지의 일어나지 말아야할 이스라엘의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납니다.
입다가 에브라임 족속을 향하여 질타한 내용을 요약해 보면, “나와 내 백성이 죽기를 각오하고 암몬과 싸울 때 내가 너희들에게 응원을 요청했지만 뒷짐을 지고 있다가 이제 와서 전쟁 승리를 콩고물을 얻겠다고 뒷북을 치며 전쟁을 하겠다는 너희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을 요구하니 받아주겠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에브라임에게 아첨을 해서 위기를 벗어났던 것과는 전혀 다른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대응을 하겠다는 선전 포고입니다. 이윽고 자신의 출신 배경인 길르앗 사람들 중에 군사를 다시 모집합니다.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본문 4절)
길르앗 사람들의 출신은 갓 지파 일부와 므낫세 반 지파 일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는 요셉의 아들 지파로서 반지파로 인정되어 가나안 땅 정착 시에 길르앗 지역을 기업으로 받은 지파들입니다. 그렇다면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같이 살아야하는 지파였는데 므낫세는 갓 지파와 연합하여 길르앗 지역에 함께 공존하며 살게 됩니다. 이로 인해 항상 길르앗에 거주하고 있었던 므낫세 반 지파는 에브라임 지파로 하여금 자신들에게서 도망한 비겁한 자들이라고 비아냥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었던 길르앗 사람들은 당연히 차제에 에브라임을 치고 싶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이런 감정이 전쟁에서 호기로 작동되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결국 길르앗은 에브라임과의 내전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군사력이라는 힘으로 입다의 길르앗은 또 다른 힘으로 기득권의 이득을 보려던 에브라임을 짓누르는데 성공을 한 것입니다. 힘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인간들의 군상이 얼마나 잔인하고 집요한 지를 본문 5-6절에서 보여줍니다.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보다 앞서 요단 강 나루턱을 장악하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하건대 나를 건너가게 하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그에게 이르기를 쉽볼렛이라 발음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그렇게 바로 말하지 못하고 십볼렛이라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강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히브리어 단어 중에‘개울’을 뜻하거나‘이삭’을 뜻하는 단어는 약한 'S'의 음역을 갖고 있는 히브리어 알파벳인‘쉰’을 처음 발음으로 쓰는‘쉬보레트’라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발음을 하는 것은 길르앗 사람들이었고 에브라임 사람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사투리 때문에 이 단어의 처음 발음을 강한 'S'로 발음하는 히브리어 알파벳‘싸메크’를 써서‘씨보레트’라고 발음했습니다. 이것을 안 길르앗 사람들은 요단강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이 단어를 발음해 볼 것을 강요하였고 결국 강하게 발음하여‘씨보레트’로 발음하는 자를 골라 에브라임 사람으로 여겨 집단적인 살해를 자행합니다. 이렇게 해서 죽인 에브라임 사람들의 숫자가 42,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상의 본문 내용을 통해 *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힘(물리력, 기득권)은 정답이 아니라는 도전을 줍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힘으로 논공행상을 벌이며 그들의 기득권적인 이득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이에 맞서 입다와 길르앗 백성들도 본인이 동원할 수 있는 일체의 힘을 모아 자신들을 대적하는 동족 에브라임 백성들 42,000명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힘을 힘으로 대항하여 벌인 비극의 결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힘을 힘으로 대항하는 것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만류하며 경계하라고 합니다. 주님이 그 선포의 증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의 밤을 지새우신 주님은 졸고 있는 제자들을 데리고 동산 중앙으로 나가셨습니다. 마침 그곳에는 가룟 유다를 등에 업고 예수를 체포하기 위한 유대 제사장의 근위대가 칼과 몽치로 무장을 하고 모여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의 입맞춤을 기화로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일련의 무리 중에는 대제사장의 몸종이었던 말고가 있었습니다. 말고가 주님의 신변을 확보하기 위해 주님에게로 접근하자 다혈질적인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휴대용 칼로 말고의 귀를 내리쳤습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시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리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을 향하여 선포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18:10-11절입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같은 기사가 기록된 마태복음 26:52절에서는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했고, 누가복음 22:51절에서는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세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메시지가 강하게 역설하고 있는 것은 칼은 정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힘은 정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리력은 최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박노해 시인이 아시아 몇 나라 여행기를 사진에 담아 낸 책(‘다른 길’)에서 인도네시아의 고산 차밭에서 잡목들을 칼로 치며 나아가는 여성 농부들의 칼놀림을 보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칼날이 빛나고 신성해지는 곳은 오직 논밭과 도마 위리라” 힘도 사용될 때 사용되어야만 그 용도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레슬리 뉴비긴-20세기 최고의 위대한 선교 신학자이자 선교사-이 쓴‘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라는 책에서 “이른 바 기독교 세계(The Christendom)에서 기독교와 정치권력이 서로 손을 잡게 된 결과, 마침내 교회는 인간과 자유를 억압하는 폭군이 되기에 이르렀다.”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이런 비극적인 기독교 세계에서 진실 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몫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진리를 증언하고 그래서 복음의 권위를 단언하려면 그 복음을 선포하는 일,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 그리고 우리가 교회의 삶과 예배를 통해 공동체적으로 그 이야기를 몸소 살아내는 일 밖에는 없다.”
교회가 선택해야하는 일,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선택해야 하는 일은 세상을 깔아뭉갤 수 있는 넉넉한 힘과 물리력이 아니라 몸소 살아내는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택해야 하는 것은 몸소 주님이 하셨던 이야기와 말씀들을 살아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교회가 막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고린도후서 5:14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권고한 것처럼 힘은 정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그 사랑에 눈물겨워 그 분이 하신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 그것이 정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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