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03.02 셀 사역2024-04-22 12:28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 생애 ‘초보’ 에 있었던 에피소드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만 바라 볼지라
● 내 주 예수 주신 은혜 (찬송가 317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11:34-40
● 제목 : 바로 선 한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1) 입다와 그의 딸이 쓸데없는 죽음을 강요한 것과 당한 것은 어디에 원인이 있습니까?
● 설교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 여호와가 제정하신 성결 법전의 내용과 이방 종교의 우상 숭배를 비교하여 보라.(레위기 18:21절)
  

2) 입다와 그의 딸이 어떻게 했으면 쓸데없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 입다의 딸이 인신 제물로 드려지기까지 얻어낸 2개월의 시간적인 유예를 참고하여 말해보자.
  

3) 입다 사사 시대와 오늘의 시대의 공통분모와 영적 기상도를 말해보고 반면교사를 삼을 것은?
● 공통분모와 영적 기상도:
● 반면교사를 삼을 내용: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진행 중인 성경 통독 사역을 위하여
  ② 인턴 셀 사역을 위하여
  ③ 은혜로운 사순절을 위하여(세 겹줄 기도회)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수요 셀별 기도회 참석하기
  ② 사순절 세 겹줄 기도에 동참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3월 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66번째 강해)
본문 : 사사기 11:34-40
제목 : 바로 선 한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자존심과 고집은 분명히 다른데도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난처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이 사도행전 26:29절과 로마서 9:1-3절에서 고백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이런 자존감은 사수해야할 마음입니다. 반면 고집은 영적인 삶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도 죽고 남도 죽이는 이중의 피해를 입히는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입다가 이런 악한 고집을 피움으로 사랑하는 딸을 죽이게 됩니다. 사사기 11:30-31절에서 입다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서원을 함으로 인해서 본인 스스로 사면초가에 몰렸습니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입다가 분명히 여호와의 이름을 거론하고 그분께 번제물을 드릴 것을 서원했으나 이 서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서원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능욕하는 서원이었습니다. 이유는 사람을 번제로 잡는 행위는 입다 시대에 길르앗을 중심으로 하여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있었던 모압의 우상인 그모스 숭배와 암몬의 우상인 밀곰 숭배에서나 행해지는 악한 행위였지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8:21절을 보면,“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반드시 지켜야 할 명령 중의 하나로 인신제물 금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입다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원을 했지만 그 서원이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을 능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길르앗 미스바로 금의환향을 했습니다. 그러나 기뻤어야 할 고향 귀환이 입다에게 가장 비극적인 일이 된 것은 그의 무남독려 외딸이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아버지를 영접하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35절에서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입다가 이렇게 옷을 찢으며 탄식한 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일을 당할 때 고대근동에서 취하는 반응이었습니다.

입다의 이런 하소연은 그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자가 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불행의 원인의 제공자가 자기의 딸이라고 자기를 변호하는 아버지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그는 자신의 입장만을 한탄하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전혀 무감각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35절 하반절에서 가당치도 않은 고집을 피웁니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서원을 하라고 주님은 일언반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서원을 하겠다고 한 사람은 입다 자신이었고 그 서원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쓸데없는 우상 숭배 행위로 도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사악한 행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다는 자신이 입으로 발설한 서원을 돌이키지 못하겠다고 다시 딸에게 말합니다.

이런 상황을 입다의 딸의 입장에서 보면 입다의 딸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정황상 아버지에게서 듣고 자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거부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불효의 차원이 아니라 율법적인 차원에서 아버지의 서원이 그릇되었다는 것에 대한 마땅한 거부와 항의의 차원에서 자신의 죽음을 용인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입다의 딸의 반응은 자신을 인신 번제로 드려야 한다는 아버지의 서원을 수용합니다.
다만 고대 근동에서 처녀로 생을 마감하는 것은 계대가 끊어지는 저주라고 여겨졌기에 이 불행을 슬퍼할 2개월의 시간 연장만을 요구한 뒤에 마침내 처녀 제물로 안타까운 삶을 마감하였음을 사사기 기자는 보고합니다.

본문의 이해를 위해 이 대목을 주해하고 있는 구약신학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Klein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일은 아버지의 무지함(ignorance)과 딸의 순진함(innocence)이 빚어낸 합작품이다.”라고 말했고,  McCann은 “결과적으로 암몬사람과 싸워 이기고 승리한 입다는 암몬 사람처럼 인간 번제를 밀곰에게 바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입다가 자기의 딸을 인신 제물로 드리는데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고 또 입다의 딸은 자기 죽음의 억울함을 거부하지 않고 쓸데없는 죽음을 당한 이유를 아는 것이 본문 속에서 도전 받아야할 부분입니다.

*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표현하면 잘 배워야 합니다.)

사사 시대의 영적인 기상도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구절들 중의 하나가 사사기 2:19절입니다.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사사시대는 가나안 정착이 막 시작되던 BC 1,200년에서 왕정이 시작되던 BC 1,000년 정도의 약 200년 기간입니다.
이 시대에 사무엘 선지자를 사사가 아닌 선지자로 분류하여 그를 제외하면 13명의 사사들이 활동을 하였건만 불행히도 이들이 활동을 할 때 근근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유지한 결과가 사사기 21:25절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자기의 소견이 옳은 데로 무자비하게 살던 마구잡이 시대가 사사 시대입니다. 사사로서 활동한 입다에게 인신 제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결법에 어긋난 그릇된 행위임을 알려줄 만한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신이 지금 딸을 서원 제물로 바치는 것은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악한 짓이라고 질타해 줄 성직자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입다의 딸에게 아버지가 아무리 서원을 했어도 그것은 밀곰과 그모스에게 바치는 악한 우상숭배이니 따를 이유가 없다고 권면할 사역자가 없었습니다. 당신들이 행하고 있는 일은 쓸데없는 짓이며 아무런 영적인 영향력이 없는 고집스러운 행위라고 말해 줄 올바른 하나님의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사 시대가 이렇게 암울했습니다. 그러기에 바로 이 때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해 있었던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잘 서 있었던 사람이 있을 리 만무였습니다. 도리어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는 말처럼 이방 종교의 악한 행위들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잠식해서 사사 시대는 자기들의 소견이 옳다고 생각하며 막 사는 비극의 시대였다는 점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입다 가정의 비극을 연출하게 된 동기기 된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이 처음 시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상당수의 기독교 신자들이 넘어지고 이미 복음을 들은 자들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도 잘못 들었거나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배는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라 이 한 번의 예배를 통해 대박 인생을 터트릴 목적으로 하나님 한 번만 나에게 기회를 주시면 내가 하나님께 많은 것을 드리겠다고 생각하며 그모스와 밀곰에게 서원을 바치는 류의 우상 숭배로 예배하고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신앙의 초보를 시작해야 합니다.
잘못 배운 왕신자보다 다시 올바른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기 위해 첫 걸음을 띠는 초보 신자가 훨씬 낫습니다.

본문 37-40절을 보면,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입다의 딸은 처녀로 죽을 것에 대하여 애통해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두 달의 말미를 그의 아버지에게 얻었습니다. 입다는 딸에게 2개월의 생명 연장 유예를 주었고 딸은 산으로 친구들과 함께 들어가 그곳에서 2개월을 애곡한 후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가증하게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신 제물이 되어 무가치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일 이후에 매년 마다 입다의 딸을 위해 4일씩 마치 진혼의 굿판을 벌리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 되었다고 보고합니다.

입다의 딸에게 주어진 2개월이라는 시간은 입다가 자신의 서원이 악한 것임을 깨닫고 회개하기에 너무나도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입다의 딸 역시 그가 유예로 얻은 2개월은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무가치한 개죽음과 같은 것임을 인지하고 산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는 충분하고도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입다 시대에 그 누구도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밝히 드러내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위해 분연히 일어설 하나님의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입다 시대가 집단적인 배교의 시대였으며 집단적 오류에 빠진 비극의 시대였다는 말입니다. 이런 비극이 벌어진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배운 자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히 서 있었던 레위인과 제사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말씀의 빈곤함, 그로 인하여 잘못된 배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비극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의 좋은 소문이 들린 교회로 유명했지만 그보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들이라고 사도행전 17:11절에서 명명했습니다. 즉 베뢰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 5:1절에서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주전 6세기 말 유다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찾으라고 명령한 진리를 구하는 자 그 한 사람이 없어 멸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굳게 서 있는 한 사람, 말씀을 온전히 붙잡는 한 사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서 있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수 믿었던 습관, 연수, 직분에 연연해하는 자가 아니라 시대를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분별할 말씀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 바로 배우기’를 소망하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주인공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