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02.16 셀 사역2024-04-22 12:27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시장이나 마트에서 최고로 많이 할인을 받은 일이 있으면 나누어 보고 물건 값 깎기 노하우 말해주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주와 함께 하면 (복음성가)
● 예수가 함께 계시니 (찬송가 325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11:29-33
● 제목 : 흥정해서야 되겠습니까?
1) 입다가 하나님에게 드린 서원의 내용이 왜 하나님과 흥정한 것일까요? 설교를 중심으로 말해봅시다.
● 레위기 18:21 참고

● 입다의 성장 배경을 적용하여
  

2) 누가복음 9:59절 이하의 사람과 히브리서 11:24-26절에 기록된 모세와의 분명한 차이점은 무엇이었습니까?
● 히브리서 11:24-26

● 누가복음 9:59-60
  

3) 주일 설교를 통하여 우리들이 새기고 실천해야 하는 영적인 도전과 실천 계획들을 나누어 봅시다.
● 영적인 교훈:

● 구체적인 실천 과제: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환우들을 위하여
  ② 신약 성경 통독 사역을 위하여
  ③ 교회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곽보람,신요한,이장규,신예찬,이서연,이성재,오승은)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셀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교우들과 연락하기
  ② 성경통독 사역에 최선을 다하여 동참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2월 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64번째 강해)
본문 : 사사기 11:29-33
제목 : 흥정해서야 되겠습니까?

누가복음 9:59-60절에 나오는 기사에서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고자 했던 사람에게 세속적 저의가 있음을 아시고 그의 요구를 수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행한 것에 대한 보상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신앙으로 하나님과 협상의 자리에 앉고자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입다는 하나님을 인격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식물인간 같은 하나님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암몬과의 담판 대화가 결렬되고 어쩔 수 없이 입다는 암몬과의 일대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이제는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한다는 부담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본문 29절을 보면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입다는 자기의 고향 길르앗은 물론 므낫세와 미스베(미스바)까지 두루 다니며 그의 발품과 리더십을 통해 그가 원하는 군사들이 모집된 것으로 여겨지는 증거가 본문 29절 하반절에‘암몬 자손에게 나아갈 때’있습니다. 이제는 전쟁에 나아갈 정도의 군사력이 확보된 것이 분명합니다. 암몬과의 일대 전투를 대비한 준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사기 기자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29절 전반절의 시작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본문에 기록된 여호와의 영인‘루아흐’는 구약에서도 활동하셨던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일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는 구원하지 않겠다고 냉정하게 선언하셨지만 그래도 행동으로 우상을 철폐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셨으며 그 결과 구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직접 불러 세운 사사가 아닌 길르앗 사람들의 순전한 계산에 의해 세워진 입다가 마음에 차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가 암몬과의 전쟁에 나갈 사사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자 하나님은 입다에게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 여호와의 영을 보내 주시는 엄청난 결단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인격적으로 이스라엘을 대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인격적인 다루심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입다의 행태가 본문 30-31절입니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입다는 만에 하나 이 전쟁에서 하나님이 나를 승리하게 만들어 주신다면 내가 승전하고 길르앗으로 돌아갈 때 제일 먼저 나를 영접하는 자를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속지 말아야 할 것은 입다가 하나님께 드린 서원의 문제점입니다. 입다는 분명히 하나님께 서원하고 그 서원의 대상이 하나님이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이 전쟁을 승리하게 해 주신다는 전제 조건을 달고 만에 하나 그렇게 해 주신다면 첫 번째 승전을 맞이하는 것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한 이 대목이 아주 비 신앙적인 일이었다는 점입니다.

본문 30절의 번역을 원문에서 보면‘대문에서 나오는 것’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나오는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의‘것’이 일반적으로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부연되었기에 이것은 분명히 동물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사 시대의 고대 근동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그 환영의 대열에 짐승이 동원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반드시 사람이 환영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그렇다면 입다는 분명 하나님께 서원을 한 번제물의 대상을 동물이 아닌 사람을 생각했던 것이 분명했다는 것입니다.

입다가 사람을 번제물로 드리려 했던 이유는 그는 어려서 길르앗에 만연해 있었던 모압의 그모스 신에 대한 종교적 제의 중에 하나인 어린 아이를 번제로 바치는 행위를 보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신은 달랐지만 역시 길르앗에 또한 섬김이 만연해 있었던 암몬의 신이었던 몰렉에게 바치던 종교적 행위인 인간 번제를 보고 자랐기에 그는 이방의 종교적인 습관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분명히 인간 번제를 금하고 있습니다.“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8:21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하나님의 이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죄악을 자행했습니다. 이 죄악은 이스라엘의 역사의 흐름에 따라 질기게 지속되었고 분열왕국시대에는 극에 달했습니다. 열왕기하 23:10절에서는 “왕이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도벳을 더럽게 하여 어떤 사람도 몰록에게 드리기 위하여 자기의 자녀를 불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이런 죄악으로 인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죄악을 통렬하게 비난했습니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바알의 산당을 건축하였으며 자기들의 아들들과 딸들을 몰렉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느니라 그들이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여 유다로 범죄하게 한 것은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예레미야 32:35절).

이런 죄악의 맥은 입다의 시대에도 만연했습니다. 그러기에 입다는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 번제를 분명히 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금하신 그 하나님께 인간을 번제로 드리겠다는 말도 안 되는 흥정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말이 안 되는 일들이 교회 안에 만연해 있습니다. 이런 기막힌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유는,

* 하나님과 흥정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입다는 하나님이 금하신 일을 가지고 도리어 하나님과 흥정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번제를 그것도 동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드릴 터이니 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세요.” 입다는 하나님과 시소를 타면서 하나님과 흥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흥정은 입다의 일방적인 흥정이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24-26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에 관심이 없었으며 그의 신앙고백의 으뜸은 도무지 세상의 이치로는 해석 불가능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는 선언입니다.

데이빗 라센은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교회가 세상 속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라고 갈파했습니다. 오늘날 성도라고 불리는 자들의 가장 큰 위기는 성도의 능력으로 세상의 논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논리가 성도들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과 흥정하려는 자들은 세상의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다루려는 무서운 범죄자들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테니 하나님 나에게 반드시 축복해 주세요.”,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교회에 많은 헌금을 할 테니 지난 주에 산 로또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되게 해주세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는데 당뇨병이 무엇입니까? 허리 디스크가 무엇입니까? 위장병이 무엇입니까? 물질적으로 이렇게 궁핍한 것이 말이 됩니까? 하나님, 나에게 쌓을 것이 없도록 부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멋있게 헌신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흥정하지 말고 도리어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질병이 나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려고 하네요. 하나님, 물질이 나를 시험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위협하네요. 하나님, 자녀들이 나를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네요. 그런데 하나님, 어림 반 푼 어치도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신앙은 흥정이 아니라 고백입니다. 이러한 신실한 헌신과 고백이 담보된 뒤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변하지 않는 은혜임을 기억하고 견고히 달려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