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사오정 같은 행동을 하는 나의 일상을 나눠 봅시다. | 경배와 찬양 (WORSHOP) ● 예수 닮기를 ●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찬 452장) ●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찬 455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사사기 11:12-28 ● 제목 : 말과 삶 1) 입다와 암몬 왕과의 두 번에 걸친 협상이 결렬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입다가 암몬 왕을 논리적 역사적으로 반박한 협상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 본문 15-22절: ● 본문 24-25절: ● 본문 26-27절: |
3) 입다가 협상의 자리에서 보여준 그의 말과 후에 그의 행동이 동족에게 보여준 모습에서 우리가 얻을 영적 교훈을 사도행전 1:1-2절의 말씀을 접목하여 나누어 봅시다.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셀원들의 기도 제목을 위하여 ② 신약성경 통독 사역을 위하여(매주 화-금) ③ 감기 등 건강 약화로 인한 환우들을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수요 셀별기도회 참석을 위해 서로 독려하기 ② 지역셀 사역에 동참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16일(주일)오후예배 후 셀별 윷놀이 대회 7)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2014년 2월 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63번째 강해) 본문 : 사사기 11:12-28 제목 : 말과 삶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아마도 말과 삶의 일치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길르앗의 머리 즉 통치자의 자리를 꿰차고 드디어 상대인 암몬 왕과 전쟁 전에 피를 흘리지 않고 암몬의 불법 점거를 해결하기 위한 입다의 정치적인 수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입다는 18년이라는 세월을 괴롭히며 길르앗을 장악하고 있는 암몬의 퇴출을 위해서 사절단을 두 번에 걸쳐 암몬 왕에게 보냅니다. 첫 번째 사절단을 보낸 이유는 암몬이 요구하는 조건이 대화로 풀 수 있는 것인지 혹은 금전적인 보상 같은 것으로 해결을 할 수 있는 것인지를 가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절단을 통해서 제일 먼저 입다가 암몬 왕에게 질문한 내용은 왜 우리들의 땅을 치러 왔느냐? 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암몬 왕은 반대로 지금 그들이 점거하고 있는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 즉 요단강 동편 쪽이 되는 땅은 원래 우리 암몬의 땅인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오면서 자기들의 땅을 빼앗았기에 그 땅을 되돌리기 위함이라고 항변합니다. 이렇게 첫 번째의 사절단 파송을 통한 협상이 결렬 되자 입다는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로 협상단을 보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협상단을 보낸 자리에서 입다는 사절단의 입을 빌어 암몬 왕의 요구가 어처구니가 없는 억지 요구임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에 이릅니다.
입다가 본문에서 두 번째 사절단을 통해 암몬 왕의 요구가 부당함을 지적하는 내용을 이해하려면 민수기 20-21장, 신명기 2장의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진두지휘 아래 애굽에서 탈출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하나님이 주신다고 약속하신 지금 사사기 시대의 배경이 되고 있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데 무려 4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 40년이라는 세월동안 이스라엘은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특별히 조심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가나안으로 가는 노정에 이미 가나안 근동에 살고 있었던 형제국가들에 대한 예의였습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자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리적으로 먼 친척 지간이었던 모압과 에돔이 살고 있는 지경을 통과해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절단을 구성하여 에돔 왕에게 그 땅을 지나갈 수만 있도록 해달라고 공손하게 요청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에돔 왕은 일언지하에 거절을 합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먼 길이기는 하지만 에돔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 땅을 피하여 우회하여 돌아가는 수고를 민수기 20-21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장은, 이스라엘의 헤스본 통치의 기록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향하여 진군하는데 도처에 복병들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아모리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아모리 왕 시혼에게 사절단을 보내 그의 영토를 지나가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아모리 왕 시혼은 이스라엘의 부탁을 거절하고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킵니다. 이스라엘은 어쩔 수 없이 아모리 왕 시혼과 전쟁에 임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싸워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 결과 문제의 땅이었던 아모리가 징악하고 있었던 헤스본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헤스본이 오늘 본문에서 암몬이 점거한 땅의 수도와 같은 중심도시였습니다. 이 헤스본을 빠앗은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지 의도적인 빼앗음이 아니었음을 역사는 증언합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문제의 지역을 자연스럽게 차지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역사가 증명을 하지만 이스라엘은 에돔, 모압, 아모리를 의도적으로 무너뜨려 땅을 빼앗았거나 물리적인 군사력을 동원하여 영토를 침범한 일이 없음을 본문 15-22절까지 장황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을 입다는 사절단을 통해 암몬 왕에게 설명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주목할 것은 앞서 보았던 민수기와 신명기의 기록에서 보았듯이 상대했던 족속은 에돔, 모압, 아모리였지 오늘 본문에 입다가 대치하고 있는 암몬이라는 나라가 언급되고 있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입다는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아르논에서 얍복강과 요단강에 이르는 요단 동편의 땅은 너희 암몬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땅임을 논리적, 역사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또한 본문 24-25절을 보면, “네 신 그모스가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한 것을 네가 차지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서 어떤 사람이든지 쫓아내시면 그것을 우리가 차지하리라 이제 네가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느냐 그가 이스라엘과 더불어 다툰 일이 있었느냐 싸운 일이 있었느냐” 입다는 역사적인 맥을 기가 막히게 관통하고 있었던 언변의 달인이었습니다. 입다는 암몬 왕에게 암몬의 신은 그모스 신인데 그모스가 차지하게 해 준 땅에서 사는 것을 만족해야지 왜 그모스 신을 믿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우리 땅에까지 와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인가? 를 꼬집습니다. 더불어 이전에 광야에 거하면서 가나안을 입성을 할 때 너희들의 선왕이었던 발락도 함부로 이스라엘을 건드릴 수가 없어서 극도로 조심했는데 지금 너는 너의 선왕의 그 지혜도 없으니 선왕의 지혜를 배우라고 충고하기까지에 이릅니다. 더불어 너의 선왕도 인정한 헤스본, 아로엘, 아르논에 이르는 이 모든 지경을 이스라엘이 차지하여 산 지도 300년이 되었는데 그 동안에는 감감 무소식이었다가 이제 와서 그런 억지를 부리는 것이 말이 되는가? 를 집요하게 입다는 물고 늘어지며 암몬 왕을 압박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 26-2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마을들과 아르논 강가에 있는 모든 성읍에 거주한 지 삼백 년이거늘 그 동안에 너희가 어찌하여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하건대 심판하시는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였으나”
입다의 협상이 여기까지 왔으나 본문 28절에서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가 사람을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결과는 결렬되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입다는 암몬과의 전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정확한 역사적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건달로, 깡패로 살았던 자가 어떻게 이렇게 뛰어난 역사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을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할 정도의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변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심리적인 분석력도 탁월했습니다. 도무지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명한 분석력을 토대로 상대를 압도하는 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이 정도라면 지도자로서 흠이 없는 리더십의 소유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암몬 왕은 말로는 도저히 입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귀를 닫았습니다. 적어도 말로는 안 되지만 군사력에 있어서는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암몬의 왕이 이렇게 힘으로 대항하겠다고 한 것은 역으로 이야기하면 적의 왕이 갖고 있는 탁월한 능력을 싫지만 인정했다는 빙거가 됩니다.
입다의 언변은 완벽했지만 문제는 이렇게 완벽한 언변의 능력을 가졌던 입다를 후대의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에 용기를 내지 못합니다. 입다가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사사인가? 를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도리어 입다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실패한 사사 쪽이 더 가깝습니다.
입다는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쟁이 끝나자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입다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우리들을 왜 부르지 않았는지에 대하여 항의를 합니다. 기회주의 분파인 에브라임의 협박에 기드온은 그들을 달래서 위기를 모면하지만 입다는 ‘우리들을 배제한 입다의 집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동족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에게 기드온처럼 그들을 달랜 것이 아니라 군사를 모집하여 에브라임 지파의 사람들을 짓밟아 죽입니다. 그리고 에브라임 사람들만이 쓰는 억양과 사투리까지 찾아내서 에브라임 지파 사람 42,000명을 죽이는 잔인한 폭거를 행합니다. 이방 민족이었던 암몬과는 최선을 다한 협상을 벌여 피를 흘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막상 동족이었던 에브라임과의 내전에서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무참히 그들을 짓밟는 잔인함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입다의 모습에서 보는 영적 교훈이 이것입니다.
*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반드시 말과 삶이 하나이어야 합니다.
입다처럼 이방 민족인 암몬에게 행했던 말로 인한 정치가 그의 철학이었다면 그는 반드시 그의 철학을 동족인 에브라임의 집단적인 반발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똑같이 말로 협상하여 그들과 함께 하려는 삶으로 연결시켰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이며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입다는 그의 말과 삶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1-2절을 보면,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누가는 자신의 두 번째 책인 사도행전의 시작을 ‘데오빌로’라는 상당한 직책의 사람에게 첫 번째 편지인 누가복음에서 나는 당신에게 예수께서 행하셨던 일을 말씀드렸는데, 이제는 당신에게 그 분이 행하셨고 가르치셨던 일들로 인해 사도가 된 자들이 성령의 인도함 따라 행했던 일들을 당신에게 전하기를 원한다는 글입니다.
사도행전의 기록들은 사도들이 ‘예수님께서 먼저 행하셨던 것들’을 심비에 새겨야 할 도전입니다. 예수님이 말과 삶으로 본을 보이셨던 것을 그대로 행하였던 기록이 바로 사도행전이라는 말입니다. 이 과정의 신학적인 진의는 예수님이 당신이 말로 행하셨던 일련의 모든 일들을 삶으로 실천하지 않았다면 사도행전은 존재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역으로 사도행전이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들의 행동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행동하심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됩니다. 말은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신뢰하는 사회적 신뢰도가 자꾸만 추락하는 이유는 말과 삶에 있어서 진정성이 있는 일치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흉내는 내지만 흉내 냄이 삶의 진정성과 복음의 감격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 율법 교사들로 총칭되는 종교지도자에게 선포하고 싶었던 주님의 강력했던 메시지가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이었습니다. 말과 삶이 똑같아야 한다는 주님의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행하신 그 삶에 대한 감동과 감격이 없이는 우리 조국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조국교회의 희망은 주님이 행하셨던 것처럼 똑같이 살 때만 다시 싹틀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신 주님은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삶으로 실천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런 삶이야 합니다. 말과 삶이 동일한 사람이 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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