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내 삶에서 제거해야 할 것과 구현해야 할 것을 나누어 봅시다. | 경배와 찬양 (WORSHOP) ●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찬 91장) ●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찬 151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사사기 10:10-16 ● 제목 : 자리를 이동하십시다. 1) 이스라엘 공동체가 반복하는 관행적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진의는 무엇입니까? ● 삿 10:11-14절: ① 하나님의 반응: ② 하나님의 마음: |
2)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께 행한 부르짖음의 진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3) 주님의 진의를 따르기 위해 내가 REMEMBER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분의 꿈을 우리들의 꿈으로 간직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셀원들의 기도 제목을 위하여 ② 공동체 사역을 위하여 (셀리더와 인턴 워크샵-20, 21일, 신년 사업자 심방, 두날개 양육 사역) 2) 한 주간 사역하기 ① 셀리더 인턴 워크샵을 위해 중보하기 ② 수요 셀별 기도회 참석을 위해 서로 독려하기 ③ 담임목사님을 위하여 중보하기 3) 셀 그룹의 지체들 중에 나약한 지체들을 위하여 치유 기도하기 4)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② 셀 공동체의 지체들이 은혜를 받도록 중보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및 교제 7) 폐회: 주기도문 8) 파스타: 준비된 대로
| 설교요약 (SUMMARY)2014년 1월 1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60번째 강해) 본문 : 사사기 10:10-16 제목 : 자리를 이동하십시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아비멜렉의 끔찍했던 통치 기간을 경험한 뒤에 그 시대를 하나님께서 끝내시고 돌라와 야일 사사를 통해 45년간의 평화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평화의 행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잊어 야일 사사가 죽자마자 근동의 7개 나라에서 섬기던 모든 우상들을 들여와 집단적인 우상 숭배의 죄악을 저질렀다는 점입니다(삿 10:6절). 하나님은 집단적인 배교와 우상숭배를 자행하고 있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 암몬과 블레셋이라는 주변 국가를 들어 그들을 치게 하셨고 무려 18년 이라는 세월동안 전무했던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다(삿 10:9). “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여기에 번역된‘곤고’라는 히브리어‘야짜르’는 어원적으로 포위망이 좁혀져 운심의 폭이 아주 좁아진 위기를 말하는 단어로 숨쉬기가 힘들 정도의 아주 고통스러운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이전 사사 때에 관행처럼 했듯이 하나님을 다시 찾았습니다.
본문 10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이 말씀은 초대 사사였던 옷니엘 사사 때부터 들었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신이었던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근동의 메소보다미아의 왕인 구산 리사다임을 들으셔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한 행동이 사사기 3:9절에 기록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옷니엘 사사로부터 시작된 이 액션은 계속 반복되어 옷니엘이 죽은 뒤 에훗 때도 매일반이었고(삿 3:15), 에훗이 죽고 드보라 사사가 등장할 때와(삿 4:3), 기드온 사사를 하나님이 부르실 때도 그랬습니다(삿 6:7). 앞서 열거한 구절들의 공통점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입니다.
본문 10절 전반절 역시 별반 다르지 않고 조금 더 구체적인 부르짖음이었다는 정도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분명히 구체적으로 본인들의 죄악을 고백하는 업그레이드 된 고백인 것은 사실이지만 본문 11-14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반응은 충격적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이제 다시는 속지 않겠다’, ‘이제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그토록 섬기기를 원하는 너희들이 택한 그 신들에게 빌어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급변한 반응은 무죄입니다. 상습적으로 범한 죄를 참으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두 손을 내가 들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강력하게 말씀하신 의도는 이스라엘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속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셨던 당신의 사랑을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너무나 몰라주어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방식을 이렇게라도 토로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마십시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정말로 속이 상하셨고 마음이 상심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평강과 은혜를 주면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을 배신하고, 배신한 이스라엘이 자식이기에 하나님은 그들이 돌아오게 하시기 위해 징계하면, 이스라엘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순간 하나님께 부르짖어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바보 같으셔서 그들의 호소를 들으시고 사사를 들어 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그래서 다시 평화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안락함과 평화가 임하면 이스라엘은 다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배교합니다.
오늘 본문이 있기까지 무려 4번의 사이클로 이렇게 하나님을 우롱하였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향해 하나님이 화를 내시고 ‘이제는 더 이상 너희들을 구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며 너희들이 섬기는 우상에게 호소해 보라고 비꼬실 만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말씀의 진위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되는 것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비극적이고 슬픈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관심이 멀어지는 상태입니다.
‘REMEMBER’라는 영어 단어는 접두어‘RE’(다시)에 명사‘MEMBER’(구성원)라는 단어가 합쳐져‘기억하다.’라는 단어입니다. 기억한다는 의미는 다시 구성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구성원이 된다는 말의 진의는 관심을 갖겠다는 의미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사에서, 주님이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겟세마네로 들어가셔서 깊은 동산으로 들어가실 때 제 1차 동선에서 8명의 제자들을 머물게 하셨습니다. 이윽고 제 2차 동선까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신 뒤에 그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6:37-38절입니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그렇게 부탁을 하시고 주님은 혼자 더 깊은 겟세마네로 들어가셨고 그곳에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기도를 하신 주님은 세 번에 걸쳐 기도를 부탁한 제자들에게 와 보니 그들은 스승의 죽음과는 상관이 없이 졸고 있었습니다. 본인이 죽게 되는 상황에 고민되고 슬퍼하는 지경에서 중보의 부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보고 있는 주님의 마음을 마태복음 26:46절에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주님의 진짜 의도는 ‘일어나라 함께 가자’입니다. 나는 다시는 너희들을 구원하지 않겠다고 이스라엘에게 선포하시고 너희들이 그토록 목매는 우상 신들에게 소원을 아뢰어 보라고 억설하신 주님의 진의가 이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비로 이 순간만큼은 주님의 아파하는 마음을 헤아렸던 것 같습니다. 그 증거가 본문 마지막 두 구절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삿 10:15-16).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분노하심과 아파하심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입으로만 고백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사사기 서 전체를 통틀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그들이 섬기고 있는 이방 신들을 공동체적으로 척결하고 일소한 기사는 오늘 본문이 유일합니다. 우상 신들을 제하였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와 고백이 아니라 결의(決意)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유대인 신학자인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의 꿈을 우리들의 꿈으로 간직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이방의 신들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자기들 가운데에서 제하여 버린 그들의 결정은 잊고 있었던 하나님의 꿈을 내 꿈으로 REMEMBER 하겠다는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위대한 결정을 한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 뒤에 본문 말미에서 하나님의 상태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고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마음이 흔들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곤고한 상태로 인해 하나님이 근심하셨다고 까지 표현했습니다. 본문에‘근심하셨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카짜르’는 어원적인 의미가‘곡식을 짧게 자르다.’의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곡식을 짧게 자른다는 말은, 낫 알들이 무르익어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어 추수할 것을 결심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만큼 성숙했음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땅을 살면서 우리들의 삶으로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공간 이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로 이동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임을 기억하고 그렇게 신앙적 공간의 자리를 이동하는 세인공동체가 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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