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연대 출신들은 뽑지를 않는데…” 저는 사랑하는 제 모교 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마쳤습니다. 이어 신학의 지평을 조금 더 넓혀야 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 입학해서 또 다른 학위 과정을 접했습니다. 그때의 소회가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뒤돌아보면 담임 목회를 하면서 연대에서 전업 학생의 모습으로 학업을 병행하기란 참 쉽지 않았습니다. 경험해 보신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공부를 해야 하는 양도, 질도 이전 공부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빡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두 가지로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 예로 이양호 교수께서 강의한 ‘교부신학 세미나’는 정말로 잊지 못할 과정이었습니다. G.W. Butterworth 의 ‘Origen on first principles’의 발제를 맡았는데 300페이지가 넘는 원서를 번역해서 정리하고 소논문식의 발제를 준비하다가 코피 터졌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김균진 교수가 강의했던 ‘자연신학’ 강의에서는 서울신학대학교 출신을 가볍게 여기는 왠지 모를 비하감에 분노하여 보란 듯이 원수를 갚는다는 심정으로 이를 갈면서 D.T. Hessel 의 ‘Christianity and Ecology’에 매달려 논지를 외워가며 공부에 전념하다보니 스트레스로 인한 위장 장애와 편두통까지 발병하여 육체적으로 심히 힘들었던 소회도 있습니다. 당시 섬기는 교회 지체들에게는 정말로 미안함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었지만, 학위 논문을 쓸 때는 거의 목회는 접고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집중하여 논문을 작성했던 웃픈 추억도 있습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던 연대 학위과정을 통해 얻게 된 결과물들은 보수적 관점에서의 신학만을 배웠기에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의 신학 지평이 넓어질 수 있었던 것이었고, 목양의 현장에서도 이타적 사역에 눈을 뜨게 되는 학문적 도움을 받게 되는 아름다운 것들이었습니다. 몇 달 어간, 부족한 사람을 사랑해 주는 지인들을 통해 몇 가지의 제안과 사역 여백의 기회를 추천받게 되었습니다. 모 신학대학교 대학원에서 진행될 다음 학기 강의에 대한 추천과 모 기독교 방송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구약 파트 성경 강해에 대한 사역 추천입니다. 이 두 사역에 대한 추천을 받으면서 공히 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원래 연대 출신들은 뽑지를 않는데…” 친구들이 남긴 여운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저는 너무 잘 압니다. 선입견일 테지만 연대에서 신학을 한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한 경우가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너무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사상이 마음에 안 든다는 에두름일 것입니다. 진보적인 성향에 대한 경계일 것입니다. 해서 가만히 생각을 해봅니다. 헌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조금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방어적 본능인 것 같습니다. 바른 목회를 고민했기에, 바른 신학의 길이 무언인지에 대하여 몸부림쳤기에, 역사의 순환 고리에 있었던 베이비부머인 목사로서 바른 역사의식에 대한 통찰에 목말랐기에 택한 대학이 연세대학교였는데, 그래서 그곳에서 한 일은 정말로 열심히 공부한 것이 전부였는데 왜? 라는 억울함이 스며들었습니다. 금년 초에 읽었던 ‘신학이란 무엇인가?’를 쓴 성공회대학교 권진관 교수의 갈파가 아직도 저의 뇌리의 한 복판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신학은 역사와 사회 속에서의 우리들의 신앙(마음의 지향)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위해 근본적인 질문, 즉 신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학문이다.”(p,12) 연세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바로 이것을 질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연대 출신들은 뽑지를 않는데…” 키리에 엘레이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