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기십니다. 하나님은
본문 : 스바냐 3:14-17
서론)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주 안에서 샬롬의 인사를 드리며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히브리어로 샬롬은 ‘평강’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오늘 담임목사가 드리는 샬롬의 문안은 그 진정성이 어느 때보다 특별합니다.
지난 주간, 제천의 모 교회 목사가 약 50명의 인원들을 데리고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다는 소식이 뉴스 채널에서 보도되었을 때 거의 반나절 동안 멘붕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후에 참석자 전원의 항체 검사 결과가 모두 음성을 판명되었다는 또 다른 문자를 받고서야 다시 정신을 곧추 세울 수 있었습니다.
어제 우리 제천에도 드디어 코로나 19 확진자가 발생했습니다.
또 다시 긴장해야 하는 나날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담임목사의 최대의 관심은 교회의 안위요, 성도들의 안전입니다.
상황의 긴박성을 인식하고 오늘 주일부터 교회 예배 시스템을 다시 온라인 예배 시스템으로 환원했습니다.
제천에는 확진자가 없는데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냐고 항변하는 교우들이 있겠지만 다시 강조하거니와 제 목회 틀의 최우선 목표는 교회의 안전이요, 교우들의 건강입니다.
그러기에 이미 공지한 대로 우리 세인교회는 약 2-3주 정도 온라인 비대면 예배로 작금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해 나아가려고 합니다.
오늘부터 주일 낮 예배 시간을 통해 함께 여행했던 고린도후서 강해를 한시적으로 중단하고자 합니다.
교회가 이론으로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고난의 시기를 겪고 있는 지금, 이런 터널 속에 있는 교회 공동체의 멤버들에게 성도들이 당하고 있는 그 위기의 의미를 성서적으로 솎아내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가? 를 진중하게 성찰하고 또 되새겨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에 이런 시도는 제목 설교가 합당할 것으로 생각되어 강해 설교를 잠시 동안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본론)
예언자 스바냐는 예레미야와 하박국과 거의 엇비슷한 시대에 예언한 예언자입니다.
이 점을 먼저 밝히는 이유는 그가 예언의 사역을 감당할 때의 시대적 배경이 주전 630년경임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주전 630년이라는 시대적 연표는 주전 622년이라는 남 유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해 주는 시기임을 알려줍니다.
주전 622년은 남 유다의 제 18대 왕이었던 요시야가 일으켰던 종교개혁의 해입니다.
그의 치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종교개혁인데 그 시기를 주전 621-622년으로 봅니다.
주목할 것은 오늘 본문의 배경인 예언자 스바냐가 활동하던 시기는 아직 이 위대한 사역인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이었던 주전 630년경으로 학자들은 산정한다는 점입니다.
요시야의 부친과 조부였던 아몬과 므낫세가 자행했던 극단적인 우상 숭배의 흔적이 남 유다에 진하게 남아 있었는데 바로 ‘그마림’과 ‘말감’의 우상이 버젓이 행세하던 시절이었음을 스바냐서가 제시하고 있습니다.
스바냐 1:4-6절을 한 번 읽어보십시다.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들 위에 손을 펴서 남아 있는 바알을 그 곳에서 멸절하며 그마림이란 이름과 및 그 제사장들을 아울러 멸절하며 또 지붕에서 하늘의 뭇 별에게 경배하는 자들과 경배하며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들과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그마림’은 바알종교를 위시하여 당시 모든 이교들의 사제들을 부르는 통칭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스바냐가 활동하던 주전 630년 경, 남 유다 안에는 상당수 많은 이교를 숭배하던 제사장 그룹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말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전통적으로 세 가지의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단어입니다.
① 암몬이 섬기던 밀곰을 의미한다는 해석입니다.
② 암몬이 섬기던 또 다른 신인 몰렉을 의미한다는 해석입니다.
③ 말감을 그들의 왕이라고 해석하는 것인데 왕이라는 개념은 고대 남 유다의 땅에 만연해 있었던 또 다른 우상들을 왕으로 섬기고 있었다는 해석입니다.
종합하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어떤 종류에 상관없이 남 유다라는 지경에 존재하던 일체의 우상이 즐비했다는 말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하나님의 분노가 극에 달했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해서 예언자 스바냐는 예언의 메시지를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해 나아갑니다.
Ⓐ 1;1-2:3절에서 하나님 백성에 대한 심판의 말씀과 회개의 촉구가 이어집니다.
Ⓑ 2:4-15절에서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을 경고합니다. (암몬, 블레셋, 모압, 앗수르)
Ⓒ 3:1-8절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예고합니다.
Ⓓ 3:9-20절에서는 이방 민족과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메시지로 마감합니다.
결론적으로 주전 630년 경 유다는 물론 유다와 관련이 되어 있는 주변국까지 하나님은 종교적인 혼합주의에 빠져 극도로 타락한 선민공동체 그리고 이방 공동체를 구분하지 않고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물으시겠다고 예언자를 통해 분명히 선포하고 있는 예언서가 바로 스바냐서입니다.
헌데 눈여겨볼 대목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단락입니다.
1:1-3:13절까지의 분위기는 매우 우울한데 갑자기 3:14절 이하의 분위기는 급반전된다는 점입니다.
1:1-3:13절까지의 분위기는 매우 비관적인 데에 비해 3:14절 이하의 오늘 본문 분위기는 대단히 희망적이고, 긍정적이라는 점에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14절 본문을 먼저 보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시온의 딸이 누구입니까?
남 유다입니다.
당신이 선택하신 선민 공동체인 남 유다입니다.
종교적인 혼합주의 즉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및 말감과 같은 이교의 우상들에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남 유다를 향하여 하나님은 먼저는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스바냐 3: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배은망덕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그대로 보이는 장면입니다.
한 구절 더 나아가겠습니다.
본문 3:7절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지만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였느니라”
저는 이 구절을 접하면서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보기 좋게 배신한 남 유다에게 심판을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그 속내는 돌이키기를 바라는 간절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 녹아져 있는 본문입니다.
이렇게 당신의 속내를 숨기지 않으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주어진 본문에서 그 절절한 짝사랑의 메시지를 남 유다를 향하여 선포하십니다.
다시 14절을 읽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크게 노래하고 기쁘게 찬양하며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십니까?
하나님은 왜 이리도 유다에 대한 사랑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요?
유다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속을 썩인다고 부모의 자식의 관계를 끊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차라리 내가 대신 죽는 한이 있어도 못된 자식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부모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게 부모입니다.
하나님도 매일반입니다.
유다의 죄는 대단히 크고 용서받지 못할 죄인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유다를 다시 안으시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리고 유다에게 용기를 불어넣으시면서 노래하라고 하십니다.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강하게 용기를 고취시켜주신 하나님께서는 본문 15-16절에서 가슴 떨리는 격려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이 구절에서 심비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하는 감동의 메시지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남기십니다.
15절 전반절입니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 구절에서 진하게 느끼는 감동이 무엇입니까?
‘나’라는 존재는 문장에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냥 나는 혜택과 은혜를 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 무언가를 행하였기에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고, 혜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한 형벌에서 자유 함을 얻는 것은 나로 인함이 아니라 주님으로 인함이었음을 15절 하반절이 알려줍니다.
또 하나, 나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원수의 척결도 내 힘이 아니었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체이셨고, 일하심의 주인공이셨음을 고지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적용해도 괜찮습니다.
설교의 제목으로 적용하겠습니다.
이기신 분은 하나님이지 내가 아니라는 교훈 말입니다.
그래서 감동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기시면 나도 이긴다는 은혜입니다.
이 명제에 아멘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본문에서 알게 해 줍니다.
※ 하나님이 내 삶의 한 복판에 계시기 때문에 이기는 것입니다.
본문 15절 하반절입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본문 17절도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15절 전반절을 영어성경 KJV에서 보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대 한 가운데 머무시는 그대의 하나님이신 주”(The LORD thy God in the midst of thee)
창세기 40장을 보면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억울한 누명 씌우기로 인해 옥중 생활을 하게 된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요셉이 그곳에서 만난 관원장 두 사람과의 에피소드를 창세기 기자가 소개하고 있는데 압권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공교롭게 옥에서 만난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이 꾼 꿈을 해몽해주게 되었고, 요셉의 풀이대로 풀려나게 된 술 맡은 관원장에게 요셉이 개인적으로 부탁한 메시지는 옥에서 방면이 되면 이곳에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건져내어달라는 청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창세기 40: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창세기 41:1절은 이렇게 요셉의 소원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을 보고한 뒤 곧바로 의미 있는 사건 하나를 소개합니다.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술 맡은 관원장의 방면 후,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 창세기 기자는 보고하면서 바로의 꿈 담론을 하나 던집니다.
이윽고 바로의 최측근 참모로 있었던 술 맡은 관원장은 2년 전, 자신의 꿈을 해몽해준 요셉을 기억해 냈고, 요셉이 바로 앞에서 서서 그의 꿈을 풀어주면서 인생 역전의 드라마가 쓰였음을 보고해 줍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 대반전의 역사를 읽으면서 그냥 물 흐르듯 한 모양새로 이해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 깊이 이 사건을 추슬러 보면 더 큰 감동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의 방면 이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갖고 만 이년을 옥에서 생활했을 그때의 심정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런데도 요셉이 그 사건 이후, 어떤 심정의 변화를 보였다든지, 급격한 추락을 경험했다든지 등등의 내용은 단 한 구절에서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냥 그는 또 그의 일상을 옥에서 덤덤히 감당했다고 추측합니다.
요셉은 혈기왕성한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견디기 어려운 이 시간동안에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추론하여 접근할 수밖에 없지만 충분한 근거가 될 만한 성경적인 자료를 그의 기사 내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두 군데를 소개합니다.
먼저 애굽으로 팔려와 보디발의 집 하인으로 살았던 시기의 자료입니다.
창세기 39: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또 한 근거는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던 어간의 증거입니다.
창세기 39:23절입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셉이 순간순간의 어려움과 고통의 언저리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그 과정을 잘 이길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스바냐 예언자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요셉의 삶 한복판에 하나님이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삶 한 복판에 거하셔서 요셉이 좌절할 때 즈음이 되면 하나님이 먼저 요셉의 주변 상황들을 이기도록 만들어주셨고, 그 앞서 일하심과 이기게 하심으로 인해 요셉은 모든 난관을 딛고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는 그의 전 인생의 삶을 디모데후서 4:7절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믿음을 지켰고, 선한 싸움을 싸웠고, 달려갈 길을 달렸습니다.
그리고 1791년 3월 1일 죽기 바로 전 날, 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지난 주간, 오 마이 뉴스라는 진보적인 포털 사이트에 한국교회로 볼 때는 아주 섬뜩한 글이 하나 게재되었습니다.
“2020년 8월, 한국에서 개신교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글의 내용은 개신교회는 대 한국사회에서 악의 축이 되었고, 각종 세속적인 프레임과 이기적인 교권주의에 함몰되어 전혀 세상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고, 각종 비상식적인 일들을 자행함으로 이제는 10,20,30대로부터 완전히 외면당한 당연히 해체되어야 할 쓰레기 같은 존재라고 강력하게 성토하고 있었습니다.
시민기자의 극도의 분노를 전제한 글을 읽다가 참 많은 대목에서 참담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그의 회초리를 맞아야 했습니다.
수구적이고, 극단적인 우파적 근본주의자들의 대단히 편파적인 방어논리로 대처하기에는 너무나 궁색한 한국교회의 일면을 고스란히 들킨 느낌이라 창피한 것을 뛰어넘어 뭐라 대응할 것이 없는 비참함 때문에 몸서리를 쳐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대꾸할 만한 방법이 없어도, 단 한 마디도 그의 말에 방어할 수 있는 내용은 없어도 그래도 그의 공격에 물러설 수 없는 신앙적 마지노선은 목사니까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이기실 것입니다.
주님이 이기실 것을 믿는다면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눈물로 작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엎드리고 있는 교회도, 성도도 이기게 하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지금, 교회가 존재의 의미를 말해야 하는 극단적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내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와 함께 하시며,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서 물러설 수 없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렇게 당신의 백성들을 이기게 하실 하나님께서 오늘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본문 16절에서 응원하고 계십니다.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무슨 말입니까?
기죽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기를 주셨습니다.
어떤 기입니까?
생기입니다.
생기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승리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 생기로 삽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 능력으로 세상을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 힘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기로 삽니다.
시편 18:1-3절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은 이기십니다.
반드시 이기십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
주는 나를 고치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