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현재진행형입니까?2024-02-28 18:09
작성자 Level 10

2020 8 1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스물세 번째 강해)

 

제목현재 진행형입니까?

본문고린도후서 6:3-10

 

서론)

 

우리 기독교적인 용어 중에 간증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그 증거들을 혼자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나누기 위해 증언하는 일입니다.

제 주변에 이렇게 어떤 사람이 은혜 받은 일 즉 간증을 듣고 예수를 믿은 지인들이 꽤 있는 것을 보면 간증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반면 이런 간증을 듣고 있노라면 아주 가끔은 매우 위험스러운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한 예로 이런 경우를 경험했습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인지를 다 아는 인지도 높은 어떤 사람의 간증을 어느 집회에서 처음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만난 하나님그가 받은 하나님의 복을 들으면서 참 대단한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부러움까지 들었습니다.

그 간증 집회는 참 은혜로웠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몇 년이 지났습니다.

마침 제가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던 그 분이 제가 시무하는 지역에 간증 집회 강사로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몇 년 전그 은혜가 기억이 나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할 겸 해서 참석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나오면서 너무 큰 아픔이 밀려왔습니다.

이유는 그 간증자는 간증자가 아니라 간증꾼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들었던 그 간증의 내용에 붙은 살과 뼈들이 제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 결과 몇 년 전에 제가 들었던 그의 그 순수해 보였던 간증은 내용의 진정성까지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최악의 집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그 집회에 참석한 이유는 제게 처음에 은혜를 주었던 그의 간증 뒤에 일어난 그의 삶이 어떠했을까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는데 삶은 고사하고 본인이 경험했던 간증에 살과 뼈를 붙여 더 드라마틱한 간증으로 변질시킨 사기극으로 각색해 버린 그의 행태를 보면서 참 가슴 아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김기석 목사는 그의 책에서 이런 교훈을 던졌습니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신앙고백은 공허한 말놀이에 지나지 않는다.”(김기석, “청년 편지”,성서유니온,P,52.)

너무 적절한 가르침이 아닙니까?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신앙고백이라는 문장의 무게감이 크게 다가오는 주일입니다.

이 문장을 긍정문으로 바꾸어 문제제기를 해보겠습니다.

삶으로 번역하는 신앙고백이 무엇일까요?

신앙적 삶을 진행형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받았던 은혜에 함몰되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체험했던 은사에 매몰되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와 은사를 오늘 나의 삶의 현장에서 성육신적인 모습으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우리가 지금 추적하며 은혜를 나누고 있는 바울 사도입니다.

 

본론)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에게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변호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이전 강해를 통해 고린도후서 2:12-7:16절까지가 바울의 변호의 글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자신의 사도권 방어에 대한 변론의 절정이라고 말해도 괜찮을 한 복판의 메시지임에 틀림없습니다.

본문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바울 사도는 적대자들에게 아주 분명히 말한 내용입니다.

풀면 이런 내용입니다.

지금 너희들은 나와 디모데를 비방하고 있다그러나 나와 디모데는 너희들에게 비방을 당할 일을 한 적이 없다그러므로 우리 두 사람은 정정당당하게 사역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한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이 직접 하명하신 사도의 직을 감당하기 위해 감당했던 것을 본문 4절 전반절에서 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마음을 아리게 하는 내용입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

그렇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상태를 이렇게 표한 것이 분명합니다.

많이 견뎠다.’

그러면서 바울은 많이 견뎌야 했던 내용을 구체적으로 9가지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4절 후반절-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여기에 열거된 9가지의 고통을 조석민 교수가 아주 뛰어난 감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조석민, “이해와 설교를 위한 고린도후서 주석” 이레서원,pp,144-146.)

① 정신적 고통환난궁핍고난

② 타인에게 당한 물리적 폭행매 맞음갇힘난동

③ 육체적 고통수고로움자지 못함먹지 못함

사정이 이 정도면 사도로 살면서 자신의 직분을 이어간다는 것이 결코 녹록하지 않은 것임을 누구든지 인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어지는 본문에서 이런 고통 가운데에 있었지만 포기했다고 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의 또 다른 감동의 메시지를 이어 보겠습니다.

본문 6-7절에서 도리어 사도이기에 날마다 재무장한 8가지의 영적 태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 깨끗함순결을 의미하는 단어로 하나님을 만나는 데에 필요한 조건입니다.

Ⓑ 지식사도의 능력으로 가르치는 데 필요한 조건입니다.

Ⓒ 오래 참음그리스도인의 가장 기초적인 덕목입니다.

Ⓓ 자비함하나님의 성품 중에 하나입니다.

Ⓔ 성령의 감화모든 덕목의 원천이자사도직 수행의 필수 요소입니다.

Ⓕ 거짓 없는 사랑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 진리의 말씀복음을 의미합니다.

Ⓗ 의의 무기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열거한 사도로서 경험해야 했던 부정적인 고통 9가지와 반드시 지녀야할 8가지의 내용을 기초로 바울이 적대자들에게 선포하는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마지막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8-10절 본문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 구절은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사태를 바로잡을 때도칭찬을 받거나비난을 받거나존경을 받을 때도 그리합니다우리는 의심을 받을 때도 있지만우리의 말에 정직합니다세상이 우리는 무시하지만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정해 주십니다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우리는 멋지게 살아왔습니다우리는 거의 죽을 정도로 맞았지만죽지 않았습니다우리는 슬픔에 잠겼으나항상 커다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우리는 후원에 의지하면서 살았지만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합니다우리는 가진 것이 없지만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지역 교회 하나를 섬기는 목사로서그리고 작금의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의 서글픈 정황의 한 복판에 서 있는 목사로서 이 구절을 본문에서 만나면서 울컥하는 영적 목매임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당하고 있는 정황은 지금 한국교회의 정황보다 더 좋을 리 없는 상태라는 것을 본문에서 발견했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더 악조건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이렇게 9가지로 본인이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면서 감내해야 했던 내용들을 열거했지만 11:23-27절에서 바울은 본인이 당했던 고통을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랬는데도 바울의 토해냈던 사자후가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교회 적대자들아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의심하지만 나는 정직한 삶을 살아왔다세상이 나를 무시하지만괜찮다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기 때문이다내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너희들이 헛소문을 퍼트렸지만 괜찮다나는 멋지게 살아왔으니까나는 죽을 만큼 맞았지만 괜찮다죽지 않았으니까고난이 커서 슬픔에 잠겼던 적도 있지만 괜찮다도리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항상 커다란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으니까나는 후원에 의지하면서 산 가난한 사람이지만 괜찮다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해 주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셨으니까나는 가진 것이 없지만괜찮다왜냐하면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니까.”

이 대목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뭔가 뜨거운 액체가 내 심장에서 올라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눈이 충혈 되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바울의 의도적인 자기 합리화에 동변상련하였기 때문입니까?

왠지 모를 작금의 박탈감이 바울의 토로를 통해 위로 받았기 때문입니까?

만에 하나 그렇다면 저는 앞에서 잠시 언급한 설교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에 하나제가 그 정도로 무감각하고무뎌진 상태라면 저는 목사직을 내놓으면 놓았지 그런 상업적인 목사로 살 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바울의 이 선포를 준비하면서 제 마음이 뜨거워진 것은 오늘 주일에 저 뿐만이 아니라 우리 세인성결교회 지체 모두에게 강하게 역설하시는 레마의 적용 때문입니다.

 

※ 살아 있는 신앙고백은 삶의 고백이 현재 진행형일 때만 가능한 고백입니다.

 

마태복음 15장의 메시지를 잠시 나누겠습니다.

주께서 게네사렛 주변에서 약한 자들을 고치시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일로 인하여 주님의 대중적인 인기몰이는 세속적 관점에서 볼 때 폭발적이었습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더 이상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는 조바심을 갖고 예수께 나와서 시비를 겁니다.

시빗거리는 대단히 유치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전통(율법적인 규례)에 따라 손을 씻지 않고 먹음으로 율례를 범하고 있다는 시비였습니다.

이 딴지 검을 경험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썩을 대로 썩어 있는 그들의 위선을 들춰내십니다.

소위 말하는 고르반 사건입니다.

게네사렛으로 몰려와 예수께 시비를 걸고 있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율법이 제정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법을 고르반이라는 용어 사용으로 악용하여 부모 공경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유익만을 채우는 악한 일을 도모했다고 그들에게 경고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6절입니다.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주목할 주님의 메시지를 발췌해 보십시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과거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으로부터 하명 받은 율례입니다.

이 율례는 분명 전통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뭐라고 종교지도자들을 힐문하십니까?

전통을 빌미로 오늘의 현장에서 실천해야 하는 부모 공경을 사장시켜버렸다고 비난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언어적인 감각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과거에 하나님이 적시하신 내용입니다.

이렇게 과거에 적시하신 부모 공경은 전통으로 기념하라고 하명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율법적인 명제는 고르반이라는 언어로 사장하면 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으로 이어져야 하는 유대적인 신앙인의 명제요 행동 강령이어야 함을 주께서 강하게 역설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의 내 삶으로 이어지고 실천되어져야 하는 믿음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오늘 내 현장에서 현재진행으로 살아내야 하는 고백적 삶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전통을 숭배하며 존중히 여기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을 삶으로 번역해 내는 것에는 눈감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허울뿐인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예언자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시는 뽑을 수 없는 치명적인 비수를 던지셨습니다.

마태복음 15:7-8절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십시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전통을 소중히 여기며책상머리에서 주판알 퉁기며 어떤 것이 내 종교적인 안락함을 유지하게 해 줄까를 머리 굴리고 있는 적대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정면 돌파하면서 그들과 기분 좋은 충돌을 합니다.

오늘의 언어로 바울의 삶의 고백을 재차 전하겠습니다.

고린도교회 적대자들은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의심하지만 나는 정직한 삶을 살아왔다세상이 나를 무시하지만괜찮다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기 때문이다내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너희들이 헛소문을 퍼트렸지만 괜찮다나는 멋지게 살아왔으니까나는 죽을 만큼 맞았지만 괜찮다죽지 않았으니까고난이 커서 슬픔에 잠겼던 적도 있지만 괜찮다도리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항상 커다란 기쁨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으니까나는 후원에 의지하면서 산 가난한 사람이지만 괜찮다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해 주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셨으니까그래서 나는 가진 것이 없지만괜찮다왜냐하면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니까.”

앞서 설명 드린 이 긴 장문의 메시지를 이렇게 줄이면 어떻겠습니까?

고린도교회에 있는 적대자 형제들에게 말한다나는 사도의 권리에 대한 행정적인 근거와 정치적인 뒤 배경에 대해서는 단 1%도 관심이 없다내가 너희에게 전하고 싶은 간절한 메시지는 이것이다형제들아나는 지금 나의 삶의 오늘의 현장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선포한다그리고 그 몸부림은 어제만의 일이 아니고 오늘도 나의 삶의 현장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는 진정한 신앙고백이라는 점도 말한다이 신앙고백의 현장 그 자체가 나의 사도적인 권위다.”

그렇습니다.

감히 제도나조직이나인위적인 권력이 결코 건드릴 수 없는 기름 부으심의 사도적 권위가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어제 새벽 예배 시간에 나눈 말씀을 전 교우들이 예배드리는 주일 예배에 다시 건드립니다.

요엘 예언자의 시대에 영적 붕괴로 인하여 무엇이 하나님이 정말로 기뻐하는 제사인지조차를 분별할 능력이 난 유다에게 사라졌습니다.

해서 이미 종교적으로 학습되어 있는 남 유다의 종교적인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제물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포도주도 찾으려고 했고메뚜기 재앙으로 인해 사라진 곡식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무화과나무석류나무대추나무에서도 제물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사를 드릴 제물들이 사라져 버린 비참함에 빠져 있는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진짜로 드려야 할 제물은 바로 이것으로 명시하셨습니다.

요엘 1:13-14절입니다.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하는 신앙고백이 무엇입니까?

모양도 아니요외형도 아니요겉도 아니요언어도 아니요종교적 헌물도 아니요번지르르한 제물도 아닙니다.

오늘 내가 현재진행형으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내는가를 곱씹고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신앙고백은 마치 삭개오처럼 돌 무화과나무에서 내려와 주님을 자기의 집으로 모셔 들이는 삶의 현재적 행위요동시에 재산을 반으로 나누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착복한 물질이나 토색한 물건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는 실천적 삶의 이행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 주간에 강영안 교수의 글 읽는다는 것을 손에 들었습니다.

강 교수는 유학시절당시 유명한 선교사이지 학자인 레슬리 뉴비긴과 가졌던 뜻깊은 만남을 소개합니다.

존경하던 학자인 뉴비긴과의 만남에서 잊지 못할 에피소드를 하나 전합니다.

강 교수가 레슬리 뉴비긴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복음주의자이십니까?”

그러자 뉴비긴이 이주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요나는 복음주의자가 아닙니다.” (참고로 뉴비긴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안수 받은 목사입니다.)

대단히 의아해서 다시 물었습니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뉴비긴이 강 교수에게 잊지 못할 말을 건넸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강영안, “읽는다는 것”,IVP, p,22.)

여기까지가 강영안 교수의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부연하는 설명을 들으셔야 합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소위 말하는 뼛속까지 보수의 보수를 담지하고 있는 교단입니다.

거의 청교도적인 규칙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수적인 사람들이 성경을 안 읽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궤변이지.

그런데 강 교수는 레슬리 뉴비긴의 그 말을 십분 이해했다고 술회합니다.

레슬리 뉴비긴이 말한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아요!’라는 단말마적인 외침이 이 소리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기만 하지읽은 말씀대로 전혀 살지 않아요!”

다시 교회 예배와 다른 모임과 집회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국가의 명령이 서릿발처럼 내렸습니다.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는 서글픈 시대에 교회는 그냥 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왜 이리 무기력한 교회와 성도가 되었는가?

이유는 백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종합하면 하나입니다.

성경을 읽은 결과의 신앙고백을 삶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살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참담하고 또 참담한 신앙의 현실을 다시 원상으로 돌리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들의 신앙고백을 현재진행형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는 희망이 없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세인성결교회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생명수

 

타오르는 인생의 사막 길을 걸을 때

갈급하여 지치고 쓰러지던 발걸음

생명수는 어디에 솟아날까 어디에

애태우던 발걸음 생명 샘을 찾았네

사막 길이 끝없어 쓰러지고 말 때에

그 누군가 다가와 생명수를 주시네

인자하신 그 모습 나의 구주 예수님

두 팔 벌려 날 안고 참 평안을 주시네

인생길이 험하나 낙심하지 마세요

생명이신 예수님 그 안에서 살면서

목마르지 아니할 생명수를 마시며

영원토록 샘솟는 소망으로 살아요

저 천국이 내 가슴 설레이게 하네요

광채 나는 주 영광 끝없이 핀 꽃무리

유리 바다 황금 길 열두 진주 문들과

주님 계신 저 천국 내가 갈 곳 저 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