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은혜를 믿기는 합니까?
본문: 고린도후서 6:1-2
서론)
“우리는 이미 들은 메시지를 굳게 붙잡아 떠내려가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지난날에 천사들을 통해 전한 메시지가 유효해서 아무도 그것을 피해갈 수 없었는데, 하물며 최근에 우리가 받은 이토록 장엄한 구원의 메시지를 어떻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유진 피터슨 목사의 메시지 번역으로 히브리서 2:1-2절을 읽어드렸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에게 분명한 팩트를 전하고 있습니다.
장엄한 구원의 메시지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권고였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상당히 많은 설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렇게 접근할 수는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서 대단히 큰 영향을 받은 히브리 출신의 지식인일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저자보다는 수신자입니다.
제 지인으로 히브리서를 가지고 박사 학위 논문을 쓴 김성목 목사의 글을 보면 그녀가 히브리서의 수신자를 이렇게 가늠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로서 배교의 위험에 처한 자들이다.”(김성목, “히브리서 기독론”, CLC,p,63)
김 목사께서 이렇게 정의한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안에 저자가 이들을 부를 때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형제들이라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 형제라고 번역된 단어 ‘아델포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자’를 일컫는 고유 명사였기에 분명히 히브리서의 수신자는 그리스도인일 것이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수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된 자인 거듭난 그리스도인인 것은 분명한 데 이들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팩트가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배교 직전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적용입니다.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대체적으로 히브리서의 저작 시기를 주후 70년 이전으로 산정하는데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안에 등장하는 형제들은 두 종류의 박해를 경험한 세대라는 해석이 가능해 집니다.
① 주후 49년에 있었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박해입니다.
이 때 로마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에서 추방을 당했고, 공개적인 조롱, 학대, 투옥, 재산 몰수 등의 박해를 당했습니다.
② 주후 64년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박해입니다.
우리는 이미 네로의 이 박해시기에 수많은 로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를 불태운 범죄자라는 누명을 쓰고 사자의 먹이가 되는 순교를 당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때 목숨을 잃었습니다.
여기서 머물지 않고 히브리서의 수신자 해석은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는데 아마도 이들은 로마라는 대도시의 주류 사회로부터 왕따를 당하던 신앙의 2세대일 가능성일 것이라는 추론입니다.
이 당시는 로마 황제 숭배, 여러 잡신들을 섬기는 다신론적인 제의의 시대였기에 그리스도 예수의 신앙공동체에 있었던 자들은 당연히 주류였던 다신론자들에게 이지메를 당하며 주류 계층들에 의해 밀려나 소외된 상태로 살고 있었기에 히브리서의 수신자로 여겨지는 부류들은 이중의 고통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는 점입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왕따를 당하던 로마 공동체 안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인들의 2세대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배교도 가능한 세대였음을 히브리서의 내증이 증언합니다.
그 대표적인 내증이 바로 설교를 시작하면서 언급해 드린 히브리서 2:3절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편지를 받는 자들에게 이런 소회를 남겼습니다.
처음에 그 복음을 들었던 자들(1세대)은 복음을 통해 주어진 구원의 은혜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재 강조하지만 이들은 복음을 받은 1세대들입니다.
반면 이런 구원의 은혜를 소홀히 여기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증언합니다.
이들은 분명 2세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는 이들은 1세대와는 달리 얼마든지 복음의 은혜와 등질 수 있는 세대였고 또 그런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히브리서 저자는 제 2세대들에게 히브리서 6:1-2절에서 대단히 강한 권면을 날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여기까지 히브리서의 내증을 이렇게 요약해 보십시다.
히브리서는 이미 순교적인 각오를 갖고 복음의 능력을 전하고 있는 저자가 수많은 신앙적인 박해와 사회적인 소외를 당함으로 로마에서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저버릴까를 고민하고 있는 즉 배교의 위험에 처해 있는 2세대 그리스도인들을 굳게 하기 위해 기록한 목적의 서신이라고.
다시 언급한 히브리서 2:3절 전반절을 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등한히 여기면’을 유진 피터슨은 ‘소홀이 여기면’이라고 해석했다고 했습니다.
아주 은유적인 표현이지만 ‘소홀이 여기다.’를 유진은 ‘떠내려 보내는 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유진 피터슨 목사의 해석이 적절하다는 데에 동의합니다.
‘등한히 여기다’로 번역한 헬라어 단어 ‘아멜레오’는 직역하면 ‘관심을 갖지 않고 무시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본론)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적대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1절)
히브리서에 언급된 단어로 적용하겠습니다.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라”는 메시지와 동급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버젓이 존재했던 바울의 적대자들은 유대교 신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갖고 있는 제일의 생각은 복음의 능력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도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최고의 관심은 바울을 제거하여 고린도교회의 종교적 주도권을 갖는 것이 우선순위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몸을 버리셨던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었고 오직 한줌의 재도 안 되는 추천서와 같은 종잇장이었습니다.
흔히 하는 시쳇말처럼 중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자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던 바울의 반대자들이요, 적대자들이었습니다.
왜 이들은 이런 삶을 추구했을까요?
※ 구원의 은혜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은혜를 받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은혜를 흘려보내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설교의 서두에서 언급한 히브리서 저자의 말로 다시 바꿉니다.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라”
바울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주목해야 하는 명제를 하나 던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는 언제나 민감해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입니다.
실로 이것은 매일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영적 명제입니다.
영국 글래스고우 대학의 어네스트 베스트 교수는 본문 2-3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했는데 탁월한 해석으로 여겨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우리는 매일 구원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아무리 믿음 안에서 견고한 뿌리가 박힌 기독교단체도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이 헛되이 받지 않았는지 반복해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또한 개별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개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이 초기에 가졌던 열정이나 헌신 된 마음이 희석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쓰고 있는 ‘날’은 오늘이며 그리스도가 재림하기 전까지 계속되어질 하루하루이다.”(어네스트 베스트, “고린도후서 현대성서주석”, 한국장로회출판부, pp,103-104.)
무엇을 베스트교수가 독자들에게 역설했습니까?
지속적인 구원의 은혜에 대한 복기입니다.
우리 교회가 속해 있는 나사렛성결교회가 믿는 웨슬리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교리가 하나 있습니다.
“책임적 반응”이라는 교리입니다.
무슨 교리인지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입니다.(Total depravity)
그러므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0,1%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해서 이대로라면 우리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은 물론이기에 당연히 멸망을 당해야 하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이렇게 멸망을 당할 우리들을 불쌍하게 여겨 방치하시지 않고 구원의 시작을 알리는 최소한의 은혜인 ‘선행은총’(preventing grace)’ 주셨습니다.
이 은총이 주어짐으로 갖게 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로서 합당한 그 무언가를 보여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책임적 반응입니다.
이 책임적 반응은 구원의 은혜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웨슬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믿음의 반응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수용하여 회개하게 하는데 이 회개가 이루어진 자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 쳐주시는 칭의(justification) 혹은 중생(new born)의 은혜가 임하게 된다고 역설합니다.
이것을 웨슬리는 초기 성결이라고 말합니다.
이 초기 성결을 경험한자는 자범죄에서 용서함을 받게 된 뒤에 점진적 성결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 점진적 성결의 과정을 통과하는 자는 전격적인 성령 세례의 체험을 하게 되고, 이 체험을 한 자는 결국 성결교회 교리의 극점이라고 할 수 있는 원죄가 해방되는 온전 성결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주일 설교를 통해 성결교회 교리의 뼈대를 설명한 이유는 ‘책임적 반응’이라는 교리의 강점을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책임적인 반응’을 오늘 설교의 테마로 바꾸겠습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기 위해 바로 오늘 그리고 지금 그 구원의 은혜를 곱씹고 복기하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 구절만 놓고 본다면 구원의 시제는 현재입니다.
이 구절만 놓고 본다면 은혜의 시제는 현재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은혜가 주어지는 것은 지금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물론 우리는 아주 상식적으로 구원의 완성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시점이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재림하셔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실 때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며 은혜의 때라고 적시했을까요?
조석민 교수가 이렇게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실현되었다면 그 은혜를 지금 직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구원의 현재성을 강조한 것이다. 현재의 구원은 미래의 구원을 보장한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며 오늘은 미래와 연결된다. 오늘의 구원이 없다면 미래의 구원도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조석민, “이해와 설교를 위한 고린도후서 주석”, 이레서원,p,142.)
기막힌 주석이요, 성찰적 해석입니다.
은혜는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강력한 기름부음이라는 말입니다.
더 주목할 것은 이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은혜는 지금 여기라는 현재에서 체휼된다는 점입니다.
사정이 이런데 오늘 이 은혜를 무시하고 소홀히 여겨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은혜의 역사를 강물에 떠내려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은혜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시는 강복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은 입술로 말만 하며 거적 대는 삶을 살았던 자가 아닙니다.
그는 구원의 은혜를 날마다 복기하며 살았던 증인 중에 한 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고린도후서 1:8-10절에서 이렇게 담대하게 간증하지 않았습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지난 주간, 새벽예배 시간에 다루었던 본문 중에 한 구절, 호세아 10:12절을 소개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인애가 사라지고, 공의가 무너진 땅인 북 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예언자 호세아는 듣는 자가 없어도, 귀담는 자가 없어도, 새기는 자 없어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라”
NLT 영어성경 번역은 벼락같이 번역해 놓았습니다.
“Plow up the hard ground of your hearts.”
“너의 심장에 딱딱하게 굳어있는 땅을 갈아엎어라”
예언자의 소리로 비수와 같은 메시지를 받습니다.
은혜를 무시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마음의 밭이 들어 있는 심장이 콜타르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다시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갈아엎는 것뿐입니다.
때마침 호세아 10:12절의 연결 글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은혜를 복기하는 것은 지금이지 내일이 아닙니다.
은혜를 무시하는 자들은 내일을 기약합니다.
은혜의 현재성을 믿지 않는 자는 언제나 내일을 말합니다.
명심합시다.
은혜는 어제도 있었고 내일도 있을 것이지만 앞서 언급함 조석민 교수의 주석의 일갈처럼 그 연속성을 이어가는 자는 오늘 그리고 지금 그 은혜를 기억하고 묻고 사모하는 자입니다.
은혜는 오늘 나에게 임하는 것을 인정하고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금년 들어 유감스럽게도 점심식탁공동체를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면 식사는 코로나 19 확산에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금년은 이 상태가 지속될 것 같습니다.
우연히 아내가 사용중지 중인 교회 주방에 나가 정리를 하는데 기계음 소리가 들려 근처에 가보았더니 김치 냉장고에서 나오는 경고음이었습니다.
해서 김치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상태를 살펴보니 김치냉장고의 아랫부분에 있는 연결선이 몹시 상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 AS를 요청했습니다.
이윽고 방문한 기사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수리 불가 폐기처분해야 함”
부품을 바꾸어 수리해서 쓸 수 상태가 아니라 수리 방법이 없는 한쪽 부분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11년 전에 샀으니까 수명이 다 되었다고 자위했지만 그래도 방치만 되지 않았어도 조금은 더 연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속해서 묻히면 재생 불량으로 폐기처분하게 됩니다.
재생 불량이 되기 전에 수리해야 합니다.
그것은 날마다 주어지는 은혜로 나의 굳어진 심장을 갈아엎는 것입니다.
은혜는 날마다 주어집니다.
당신은 이렇게 날마다 주어지는 은혜를 믿기는 합니까?
그 은혜를 정말 믿는다면 딱딱하게 굳어진 심령의 마음 밭을 은혜를 복기함으로 갈아엎으십시오.
은혜의 날이 지나기 전에,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