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스물한 번째 강해) 제목: 잃을 걸 잃어야지! 본문: 고린도후서 5:11-15 서론)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재앙이 있다면 그건 무감각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말씀드리는 무감각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靈通(영적인 통증)의 상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20-2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이를 야곱 집에 선포하며 유다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예레미야 예언자 시대의 남 유다의 형편은 입으로 거론하기조차 부끄러운 완전히 영적으로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태를 직시하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위임하시면서 세 가지의 영통의 상실을 알려주셨습니다. ① 지각이 없다. ② 눈이 있지만 보지 못한다. ③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마치 영적인 한센 병에 걸린 상태임을 시사하신 것입니다. 제가 이 구절을 교우들에게 설교를 시작하며 인용한 이유는 ‘지각’이 없다고 하신 그 지각이라는 단어의 의미 때문입니다. ‘지각’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레브’를 다른 단어로 바꾸면 ‘마음’ 즉 ‘심장’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영적인 무감각은 심장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남 유다는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지 심장이 움직이지 않는 영적 심장마비의 상태였음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 유명한 예레미야 20:9절을 소개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영적 심장마비 상태인 남 유다의 바로 그 시대에 고독했던 예언자 예레미야의 절절한 선언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불붙었던 장소가 ‘마음’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레브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신앙의 행위는 마음이 움직이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싸움인 것이 분명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공동체에 대한 반응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11-12절입니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우리나라 개역개정판 번역이 선명하게 머리에 확 들어오지 않으실 것 같아, 공동번역 성경으로 11-12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우리를 사실대로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또 다시 우리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주어 속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만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의 말을 반박할 수 있게 해주려는 것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전 강해에서 설명 드린 것처럼 고린도교회 안에는 바울의 적대자들이 적지 않게 포진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적인 권위를 흔들며 도전하였고, 이로 인해 바울은 상당한 곤란함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을 곤란하게 뒤흔든 것은 추천서의 유무였다고도 했습니다. 추천서가 없었던, 그래서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 방어를 위해 본문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방어적인 성격이기는 하지만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의 요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영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승부를 걸려는 자들의 심각한 오류를 경종시키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12절에서 분명히 알려줍니다. 바울은 비록 유대 종교 수뇌부가 작성해 준 어떤 종교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추천서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더 중요한 영적인 권위가 있음을 강력하게 선언합니다.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이 누구인지를 신분 보장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고 계십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메시지에서 이 구절을 기막힌 터치로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얼마나 잘 하는지를 하나님만이 아시겠지만, 우리가 얼마나 깊고 얼마나 많이 마음을 쓰는지 여러분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바울은 말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 없는 고린도교회를 사랑하는 격정 때문에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마음 씀을 아주 과격한 용어로 대치하고 있습니다. 13절이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저는 이 구절이 과격하다고 표현했습니다. 통상적으로 보통사람들의 대화에서 쓰지 않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바울과 디모데)가 만일 미쳤다면 그건 하나님을 위한 열정적인 반응에 불과한 것이라고. 반대로 우리들이 온전한 상태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그것은 너희 고린도교회의 동역자들을 위한 우리들의 열정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 표현을 한 이유는 바울의 적대자들이 바울을 폄훼하면서 비난했던 내용 중에 하나가 바울을 정신병자라 몰아세운 것이라는 방증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정신병자라고 몰아세우며 누명을 씌우고 있는 자들에 대한 방어 논리 때문에 이렇게 과격한 표현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본문 14절 전반절에서 정말로 중요한 내용을 담아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모두를 향하여 내가 고린도교회를 손에서 놓지 않고 이렇게 열정적으로 케어 하려는 이유를 기막힌 터치로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바울 사도의 범접할 수 없는 사도적인 권위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통쾌한 메시지입니다. 풀겠습니다. 내가 너희(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적대자, 지지자)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선언합니다. 헌데 그 사랑의 방법을 주목할 만한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시선을 모아야 합니다. “강권(强勸)하신다.” 그렇습니다. 강력하게 권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단어를 원어에 있는 단어 설명으로 조금 더 강화하겠습니다. 헬라어 ‘쉬네코’의 번역이 ‘강권하다’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주후 1세기의 농경문화에서 탄생한 단어입니다. 밭이나 논을 갈 때 가축들을 이용한 것은 동서양이 공히 동일합니다. ‘쉬네코’는 ‘소몰이하다’는 단어입니다. 농부들이 소가 가야하는 곳으로 몰고 갈 때 동서남북에서 사람들이 압박하는 행위가 바로 ‘쉬네코’입니다. 이 압박 행위로 인해 소는 겁을 먹지만 농부들이 원하는 안전한 장소에 도착하게 됩니다. 영어성경에는 강권하다는 단어를 ‘억지로라도 하게 하다.’ (COMPEL), 혹은 ‘거북하게 하다’(CONSTRAIN)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 강력했던 압도하시는 사랑 때문에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도무지 포기할 수 없다고 토로한 것입니다. 조금 강하게 표현해 보십시다. 나에게 적대적인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보면 나도 인간인지라 너희들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주님의 압도하시고 거북하게 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바울이 포기하고 싶어도 할 수 없도록 만든 그 사랑의 정체를 밝혀야 합니다. 본문 14절 후반절에 그 답이 아주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사랑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 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대속적인 사랑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너무 많이 들어 식상할 정도인 기독교 교리의 정수,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사랑입니다. 너무 중요한 기독교의 전부와 같은 메시지이지만 더 이상 강조하지 않겠습니다. 역시 식상한다고 할까봐.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한 가지는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아니 지나치면 목사로서 치명적인 직무유기이기에 이건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자인 저와 여러분이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교훈 말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상실해서는 안 되는 저와 여러분의 레브(마음) 깊숙한 곳에 새겨야 할 레마 말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인 1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바울의 촌철살인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 사랑을 강권적으로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나를 위해 죽으신 분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삶을 본문 고린도후서에서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적어도 그의 여타 서신에서 성도라면,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자라면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신앙인의 강령을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20-21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갈라디아서 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로마서 14:8-9절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이제 본문 해석을 통하여 8월 첫 주일에 주시는 말씀의 은혜를 새기십시다. ※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을 잃어버리지 마십시다. 이 테제를 잃어버리지 않고 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신앙 교육입니까? 성경 백독입니까? 제자 훈련입니까? 주일 성수입니까? 신앙생활의 경력을 반추하는 것입니까? 모태신앙인으로 학습된 기억을 되살리는 것입니까? 교회 안에서 내가 행하고 있는 일체의 봉사사역이 그렇게 만들어줍니까? 나는 목사니까, 장로니까, 권사니까, 안수집사니까 당연하게 이 정도의 신앙은 뛰어넘는 수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하나의 방법론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교육도 하고, 성경도 읽게 하고, 예배도 사수하게 하고, 직분자도 세웁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런 일련의 일을 하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앞에서 열거한 것들은 부차적 도구(second method)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내는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날마다 나를 강제하시고, 소몰이하듯 쉬네코 하시며, 압도하시면서 공급하시는 강권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오늘, 지금 여기서 체휼하며 경험하는 것입니다. 가끔 아들에게 이런 야단을 많이 맞습니다. “아버지, 라떼요!는 이제 그만하세요. 그러면 꼰대 소리를 들어요.” 나는 이 말이 맨 처음에는 카페라떼는 그만 먹으라는 말인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어렸을 때, 내가 소싯적에는,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등등의 꼰대들이 쓰는 말을 비아냥거리는 속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간에 글 하나를 부탁받아서 이런 제목이 글을 썼습니다. “꼰데가 그립습니다.” 제 글의 주된 요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꼰대가 없었다면 오늘 나도 없었다.” 저만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김기석 목사의 초기 작품을 보면 아주 옛날 우리나라 공동체의 기본 요소인 마을에는 다섯 부류가 살고 있음을 말해 주는 글이 있습니다. ① 동네 사람들이 무서워하지만 존경하는 어른 ② 늘 말썽만 부리거나 버릇없는 후레자식 ③ 일삼아서 이 집 저 집으로 말을 물어 나르는 입이 잰 여자 ④ 틈만 있으면 우스갯소리로 사람들을 웃기는 익살꾼 ⑤ 좀 모자란 반편이나 몸이 부실한 장애인 이 다섯 부류를 소개한 김 목사는 글 끝에 이런 부연 설명을 남겨놨습니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이것이 얼마나 적확한 분류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을은 그처럼 다양한 사람들을 품어 안았다는 점입니다.” (김기석,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청림,p,54.)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공동체의 비극은 어찌 보면 ‘동네 사람들이 무서워하지만 존경하는 어른’이 없는 시대라는 점일 것입니다. 헌데 그것보다 더 무서운 비극이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무서워하지만 존경하는 어른’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세태가 더 강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는 현실 일 것입니다. 권위주의의 꼰대는 시대를 좀 먹는 존재라는 젊은 세대의 말을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그들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있습니다. 권위주의 꼰대가 아니라 무섭지만 존경하는 어른의 권위마저도 사라져야 하고 그들이 말하는 가르침조차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무감각의 행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으로 가르쳐주신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1:23-24절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예수님도 당신이 권위를 갖고 일하셨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예수님의 권위는 신학적 사변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으셨던 무소불위의 권위가 아니었습니다. 그 분이 나타나셨던 권위는 삶의 권위였습니다. 만에 하나, 예수님이 삶으로 가르치셨던 영적 권위를 부인하거나 거부한다면 그는 신앙인일 수 없으며, 그런 교회가 있다면 그건 교회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대명제를 전제로 우리 세인교회 지체들에게 조금의 물러섬이 없이 담대히 선포하고자 하는 담임목사의 메시지는 그 분이 삶으로 실천하셨던 십자가 대속의 권위를 믿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이 땅에서 우리는 분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 옳다는 메시지입니다. 신천지 교주 이만희가 구속되었습니다. 신천지 집단에서 30만 명 전부를 구속시키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실은 포털에 댓글부대들의 전쟁이 터졌습니다. 그 중에 눈에 들어오는 댓글 하나, 신천지뿐만 아니라 교회 먹사도 이참에 모두 다 구속시키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글을 보다가 이런 회한이 제게 임했습니다. 얼마나 교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으면 이런 수모를 당한단 말인가! 수모의 원인은 딱 한 가지입니다. 목사도, 성도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돌아가신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 분을 위해 진정성이 있는 삶을 살아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요인 말입니다. 결론) 김기석 목사의 글 하나, 설교를 마무리하며 소개하겠습니다. “교회는 공신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의 신비를 말하고, 우주의 무한함에 대한 외경과 기다림을 말하는 사람들은 철부지로 취급받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러려면 그러라지요. 저는 제 속도에 따라 살겠습니다.” (위의 책,p,65.)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세인성결교회 지체 여러분! 이강덕 목사는 주님의 보폭을 따라 걷겠습니다. 그냥 주님이 걸으신 것처럼 아무리 꼰대라는 소리를 들어도 그 속도에 맞추어 걷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속도에 따라 살고 있습니까? 그렇게 걷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그 분이 가르쳐주신 강권하셨던 그 사랑의 감각에 무뎌지지 않고 있습니까? 무뎌지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가 이렇게 말했다지요? “성경은 기득권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 된 사랑이다.” (강영안, “믿는다는 것”, 복 있는 사람,p,128.) 이 편견 된 사랑을 받은 최고의 수혜자가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렇다면 이 최고의 사랑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 5:15) 잃어버릴 것 잃어버려야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살라는 하명을 잃어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왜 나를 깊은 어둠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내 자아가 산산이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