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반드시
본문: 고린도후서 5:6-10
서론)
어느 칼럼리스트가 했던 말 중에 지식인이라면 쓰지 말아야 단어 중에 하나가 ‘반드시’라는 단어라고 지적했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유를 두 가지로 말했던 것 같습니다.
① 유일하고 완전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라는 단어는 틀렸다.
② 자기만이 갖고 있는 확신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여 이 단어를 쓰는 자는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이 글을 읽다가 부분 동의했습니다.
부분이라고 말씀드린 것은 전자는 동의하지 않고 후자는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학위 과정을 공부할 때 교수님들이 재차 강조했던 가르침 중에 하나는 학설을 무너뜨리는 것이 학문이고, 또 무너져야 학문이 발전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듣고 보니 기막힌 가르침이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1900년대에 주장했던 학설들이 요지부동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그건 비극이지 않겠습니까?
전혀 발전하지 못하고 머물러 정체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학설이 나왔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학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또 다른 학설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공격한 학설이 정설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또 다른 새로운 학설이 나와 공격을 받아 무너진다면 정치가 아닌 이상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만큼 학문은 진일보하며 발전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마도 저를 가르쳐 주셨던 교수님들은 그렇게 학문의 이론은 날마다 무너져야 한다고 교육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어떤 칼럼리스트가 말한 ‘반드시’라는 단어는 학문을 하고 있는 지성인이 쓰지 말아야 하는 금기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반드시’라는 단어 사용에 대해 획일적 용법에 반대하는 후자의 주장에 대한 동의입니다.
하지만 칼럼리스트가 제시한 전자 즉 첫 번째의 항목에는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학문의 경우, ‘반드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인정하겠지만, 종교적인 영역으로 외연을 넓히면 동의할 수 없습니다.
신앙심이라는 매개로 믿는 대상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전제하는 종교에서 그 종교의 주체가 제시하고 가르친 내용이 유일한 진리라고 확신하지 않고 어떻게 그 종교에 귀의할 수 있겠습니까?
종교 전체를 예를 들어 접근하면 너무 폭넓은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니까 기독교만 갖고 예를 들겠습니다.
사도행전 4:12절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유대 종교의 절대적 본산인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목을 걸고 외친 베드로의 일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이름에게도 하나님은 구원의 법을 주신 적이 없다는 베드로의 이 선언은 다른 종교에서 기독교가 그래서 배타적이라고 공격받는 주된 요인 중에 하나입니다.
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진리를 믿는 자들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엄청난 무기이며 위로의 메시지입니까?
이 믿음의 자존감도 없이 무슨 기독교신앙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신앙고백이라는 말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낼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단어 ‘반드시’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론)
본문 10절을 읽겠습니다.
“이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바울이 선언한 이 메시지는 기독교신앙의 교리 중에 무엇을 분명히 선포한 것입니까?
두 가지를 한꺼번에 선언한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하나는 부활 사상이요, 두 번째는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묶어보면 결국 기독교 교리의 핵심적인 내용인 종말론적인 신앙을 바울이 갖고 있었다는 선언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양보할 수 없는 신앙의 양심에 따라 10절 본문에 ‘반드시’ 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도 세속적인 차원에서는 대단히 부정적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대 명제 앞에 전혀 성경을 믿지 않는 자들 그리고 교회 안에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갖은 현란한 사회학적, 과학적인 자료들을 들추어내며 이 교리에 대하여 신경질적으로 거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볼 때, 한 줌도 안 되는 가벼운 티끌과도 같은 세속적인 자료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허구성을 증명해 내려고 몸부림칩니다.
리처드 도킨슨과 같은 무신론적인 지성인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킨 슬로건이 있습니다.
“자기가 만든 피조물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자가 어찌 하나님일 수 있겠는가!”
종교적인 언어와 삶을 과학적이고 인지적인 접근으로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신은 없다고 말하는 일 자체가 얼마나 접근부터가 틀린 일인지에 대하여 한정된 주일 설교 시간에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없기에 약하겠지만, 여하튼 무신론자들의 이런 공격적인 시도의 그 원천에는 심판론의 무력화라는 거대한 담론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심판론을 좌초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한 처사이겠지만 부활의 교리도 인정하지 않아야 했기에 전적인 하나님의 신비의 사역인 부활을 생리학적, 의학적 자료들을 동원하여 이 허무맹랑한 부활을 믿으라는 것인가에 부침하며 부활 신앙을 믿는 자들을 무지한 자라고 맹공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영적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은 주후 1세기 고린도교회에도 매일반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 안타까운 상황을 직시한 바울이 매우 무모한 도전인 것처럼 보였겠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고 담대하게 외친 광야의 소리가 있습니다.
“이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10절)
바울이 이 엄청난 신앙의 핵심적인 키워드를 믿고 산 사람이었기에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선언 역시 과감하게 본 편지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8절이 그 대표적인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바울의 이 고백을 2000년이 지난 지금 독자이기도 하고 신앙의 후배이기도 한 제가 마음에 담으며 설교준비를 하는데 끓어오르는 감동과 부끄러움이라는 양가감정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8절을 나이브하게 여러분에게 전하면 이런 뜻입니다.
“이 땅에서의 육체적인 삶을 마감하고 주님께로 가서 주와 함께 거하고 싶다.”
이 선언은 형식적인 립 서비스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신실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에스라성경대학교대학원 조석민 교수는 바울의 이 엄청난 고백에 대하여 이렇게 본인의 책에서 주석해 놓았는데 의미 있게 읽었습니다.
“바울은 삶과 죽음의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바라는 것은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지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조석민, “이해와 설교를 위한 고린도후서주석”,이레서원,p,130.)
“어떻게 살 것인지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
조 교수의 이 주석적 갈파가 설교 준비를 하는 내내 가슴을 때렸습니다.
바울의 이 신앙고백적인 어마어마한 선언의 기초가 도대체 어디에 기인하고 있기에 이렇게 설교자인 나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는지에 대하여 집중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저를 전율하게 한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바울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선언하며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철저한 종말론적인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혹자는 히브리서가 바울이든지 아니면 바울의 신학을 이어받은 제자가 쓴 서신이라고 말합니다.
어찌했든 바로 그 히브리서 9:27절을 보면 바울이 갖고 있었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적어도 이 정도의 신앙의 소유자였기에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거침없이 이렇게 강조하고 또 강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6-7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바울의 궁극적 관심은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9절은 증언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제 우리는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토대로 오늘 주일에 주시는 레마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의 진리를 타협의 대상으로 변질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이 레마를 ‘반드시’에서 찾았습니다.
‘반드시’ 라는 이 단어의 극대화를 위해 성경적인 내증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느헤미야 13장을 읽으면 대단히 스펙터클 한 긴장감이 돕니다.
그 중에 한 예를 소개하겠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느헤미야는 바사국의 제왕이었던 아닥사스다(세계사적인 이름으로는 크세르크세스)의 윤허를 받고 총독의 신분으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내외적으로 수많은 반대세력들의 공격을 물리치고 성벽 재건에 성공합니다.
성벽 재건에는 성공했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스라엘 환 공동체의 영적 상태를 바로 잡기 위해 학사 에스라를 강사로 세운 영적 대 각성 집회를 수문 앞 집회로 만들어 성공적으로 마무리합니다.
집회를 마친 느헤미야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예루살렘에 거주하며 성벽을 지킬 당사자들을 세워 예루살렘 성을 지키는 인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도 완성합니다.
허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거주자는 물론 지도층 즉 제사장, 민장과 귀인들을 포함한 다수의 지도급 인사들에게 앞으로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지켜야 할 세 가지의 지침들에 서명을 하게하고, 그 권위를 상실하지 않도록 서명을 인봉하기까지 합니다.
그 세 가지는 안식일 성수, 십일조 드림, 이방인들과 통혼 금지였습니다.
문제는 이런 서약에 사인을 하고 봉인까지 했던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인사들이 변심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바사 당국의 조치로 인해 다시 바사로 귀환했다가 돌아와 보니 예루살렘의 상태는 성벽 재건 이전의 만신창이로 되돌아갔다는 데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바사 총독의 정치력을 발휘하여 다시 영적 질서를 바로 세우는 작업을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안식일에 대한 질서 회복의 건이었습니다.
이런 공식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제사장들은 지파들의 십일조를 받아 생활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기업이 없었기에 십일조를 지파 공동체에서 드리지 않으면 살아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바사로 돌아간 이후,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자들이 십일조의 약속을 무너뜨렸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살 길이 막막해진 제사장들은 성전 제사에 소홀해지고 성전 제사가 소홀해지자 영적으로 무너지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영적으로 무너진 예루살렘 신앙공동체는 다시 이방 여인들을 며느리와 아내로 삼는 혼합적인 비신앙적 행태들을 자행했고, 또 너무나 당연한 결과로 안식일 준수는 내동댕이처저 물거품이 되고 마는 악순환 고리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안식일을 무너뜨리자 전혀 종교적이지 않았던 예루살렘 밖에 살던 잡족들과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와 마음껏 안식일에 장사를 하며 이스라엘의 영적 자존심의 마지노선인 안식일을 자유자재로 유린하는 난장판이 벌어졌습니다.
느헤미야가 1차적으로 성 안에 있었던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경고성 멘트를 날린 것이 느헤미야 13:19절입니다.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갈 때에 내가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나를 따르는 종자 몇을 성문마다 세워 안식일에는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추측하기로는 느헤미야의 이런 정책에 대하여 심히 불편해 하던 자들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전에도 느헤미야를 적지 않게 괴롭혔던 귀인들과 민장들입니다.
이들은 마지못해 정치적인 리더였던 느헤미야가 요구했던 세 가지 지침에 순종하겠다고 서약서에 날인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느헤미야가 없는 틈을 타서 자신들의 입지를 다시 굳히며 하나님께 서약했던 일체의 약속들을 보란 듯이 파기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권(프리미엄)을 얻는 조건으로 예루살렘 성 안으로 이방인과 잡족 장사치들의 장사를 허용하였던 자들로 여겨집니다.
이런 악한 일을 보았던 느헤미야는 안식일이 시작되는 전 날부터 성문을 굳게 봉쇄하는 정책을 펴고 파수꾼까지 세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던 장사치들은 그들의 욕심을 버리지 않고 집요하게 예루살렘 성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계획을 짭니다.
안식일에 빈틈을 노리기 위해 성 밖에서 노숙하는 자들이 상존한 것입니다.
그러자 발본색원의 차원에서 느헤미야는 내린 철퇴가 느헤미야 13:20-21절입니다.
“장사꾼들과 각양 물건 파는 자들이 한두 번 예루살렘 성 밖에서 자므로 내가 그들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 밑에서 자느냐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잡으리라 하였더니 그 후부터는 안식일에 그들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아예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들의 근원을 제거하는 리더십을 보여 줍니다.
1%의 타협의 여지를 보이지 않는 느헤미야의 행동을 보면서 제가 찾아낸 단어는 ‘반드시’입니다,
무너진 안식일 정신을 반드시 다시 찾겠다는 의지의 표명을 행동으로 보인 느헤미야를 통해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의 진리를 타협의 대상으로 변질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 말입니다.
요 근래, 아주 맷집이 강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웬만한 펀치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나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잽을 맞는 버릇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정말로 실신 직전의 카운터펀치를 맞지 않는 한 좌고우면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매년 개최하는 제 37회 미래교회 컨퍼런스 강사로 섬긴 것이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다.
당시 주제는 ‘탈 교회 시대의 선교적 교회’라는 제하였습니다.
저를 비롯하여 현장 목회자들 중에 선교적인 목회를 위해 몸부림치는 세 명의 미서널처치 사역을 하는 교회와 목회자를 선정해서 교회만을 위한 교회, 지극히 이기적인 개 교회주의를 표방하는 교회가 아니라 이타적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미서널 목회자들의 현장 경험과 진정성이 있는 선교의 내용들을 심도 있게 논의하고 저변 확대를 위해 함께 중보 하는 알찬 시간을 보냈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주최 측에서 계획한 사역의 내용들을 모으면 교회는 물론, 대사회적으로도 교회가 기여할 수 있어서 함께 교회와 사회가 공생할 수 있도록 돕고 연착륙을 유도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아주 좋은 프로젝트였습니다.
우연히 지난 주간, 각 신문에서 기사화한 당시의 내용이 보여 2년이 지난 사역이지만 저 역시 당시 강사로 섬겼던 사람 중에 한 명이었기에 웹서핑을 통해 기사를 복기해 보았습니다.
참 많이 달린 댓글들을 보다가 참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달린 댓글들은 무자비한 폭력의 글로 도배되어 있었습니다.
아팠지만 도대체 무엇이 저들에게 이런 폭력이 가까운 막말을 하게 했을까에 주목하면서 댓글들을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소회에 도착했습니다.
“그냥 교회가 하는 일은 무조건 싫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교회는 적! 이유 없음, 무조건 교회는 타도의 대상임!, 논리, 이성, 분명한 기승전결에 따른 합리적 비평, 전혀 관심이 없이 교회가 싫음!”이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저 역시 이전에 생각하던 모드에 대한 패러다임을 다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정말로 깊은 고민을 하게 했습니다.
어떻게?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해 정력을 소비하거나, 설득하거나, 거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맡기고, 그냥 교회는 교회 본연의 일을 하면서 가는 것이 맞는 일이 아닐까 싶어지는 소회 말입니다.
칼럼리스트의 첫 번째의 말로 돌아갑시다.
“유일하고 완전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전에는 이런 질문을 하는 자들에게 뭔가 기독교변증의 차원에서 얼레고, 또 얼레서 설득하여 이해시키려고 했는데, 도무지 이런 자들에 대하여 뭔가를 변호할 자신도 없어지고, 심지어 그럴만한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아 저 역시 매우 유감스러웠습니다.
교우들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억에 담아둔 글을 하나 소개합니다.
몇 년 전에 풀러 신학대학교 존 골딩게일 교수가 쓴 ‘성경을 만나다’를 읽으면서 밑줄 친 내용입니다.
“나는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을 확실히 지키겠어.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겠지!’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따라 살아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 가운에 일어나는 또 다른 신학적이며 도덕적인 물음을 계속 던져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이 당시 상황을 살던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실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라고 하신 일이라고 말하려면 그 전에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이 말은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에 근거하여 지금,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이라고 예상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존 골딩게일, “성경을 만나다.”성서유니온,p,225.)
조금 이해하기 쉽도록 부연하겠습니다.
제가 골딩게일의 이 말을 담은 이유는 제 목회의 뒤안길을 대신 말해주고 있다는 보상심리 때문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제가 걸어왔던 목양의 길이 고루하다고 비평을 받았지만 그 길을 달려온 방법론에 대하여 마치 OK 사인을 받은 것 같은 감사 때문이었습니다.
골딩게일의 갈파는 성경을 수구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오늘의 상황에 맞추어 다시 질문하여 해석하고 읽으라는 말입니다.
성경 사건을 성경시대에 국한하여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데만 치우치면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편협하게 만드는 부정적 요인임을 골딩게일은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경을 읽어 그 시대의 메시지(TEXT)가 무엇인가를 이해했다면 반드시 오늘의 상황(CONTEXT)에 비추어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골딩게일 교수와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 가지를 더 첨부하겠습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다시 묻고 또 다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텍스트를 철저하게 연구하고 해석한 뒤에, 그 메시지가 오늘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고 조명하는가를 반드시 되새김질하여야 합니다.
그런 뒤, 그 해석까지 마무리했다면 이렇게 결론을 맺어야 합니다.
나에게 적용된 오늘의 해석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해석인가? 를 반드시 재차 질문해야 합니다.
지난 31년의 목회임상 상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해석은 반 기독적인 사람들에게는 결코 만족하거나 흡족해하는 해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야 하는 목사나, 성도의 삶은 고독하고 외롭고 아프기까지 합니다.
더 아픈 것은 예수께서 기뻐하는 일로 결론을 맺는 일을 하면 어처구니없이 교회 안에 있는 불신자들이 더 심각하게 공격을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맷집이 세져서 그런지 이런 믿음을 갖고 더 달려 나가는 저를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그들의 공격이 무섭고 떨려도 복음은 복음이지 복음 같은 것이라고 물 타기 하라는 공격에 주저앉아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오늘 설교 준비를 하다가 바울이 외친 10절은 감동의 감동을 주는 최고의 메시지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10절)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된다는 것을 진짜로 믿습니까?
진짜로 믿습니까?
반드시 고린도후서 5:10절의 날이 올 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사는 자로서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십시오.
헬스를 할 때 두 달 동안 네 번을 나가고 그만두었습니다.
재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탁구는 7년째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적어도 내가 아는 기독교 신앙생활은 기분 따라 하는 레저 활동이 아닙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기독교 신앙생활은 재미에 따라 하고 안 하는 운동이 아닙니다.
왜? 기독교적인 진리는 사장(死藏) 된 진리가 아니라 앞으로 내 삶의 직선적 끝자락에서 반드시 일어날 존재론적인 필연의 결과물이기에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마라나타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땅의 모든 끝 모든 족속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모든 열방이 주께 돌아와 춤추며 경배하게 하소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길을 만들자 십자가를 들고 땅 끝까지 우린 가리라
우리 주님 하늘 영광 온 땅 덮을 때 우린 땅 끝에서 주를 맞으리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