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할 게 따로 있지2024-02-28 18:05
작성자 Level 10

2020년 6월 21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열다섯 번째 강해)

 

제목할 게 따로 있지

본문고린도후서 4:1-6

 

서론)

 

영국 글래스고우 대학교 신약학 교수를 역임한 어네스트 베스트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설교자들이 받는 유혹 중 하나가 바로 회중의 어떠한 특정한 그룹을 위해 말씀을 조정하는 것이다즉 말씀을 희석시키는 일이다나이 드신 분들이나 목소리가 큰 어떤 특정인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성서비평을 논하지 못한다거나죄에 대해 구체적으로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지 못하는 경우아니면 미지근하거나 또는 전도에 열심이거나아니면 사회정의에 관심이 없는 어떤 이들을 화나게 하지 않으려고 죄에 대하여 표면적으로만 공격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재정적으로 후하게 후원하는 어떤 이들의 발길을 돌리지 않게 하려고 견고한 믿음과 결단과 신앙을 요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설교자들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선한 목적을 위함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하여 다른 이들이 잘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들을 교묘히 속이거나 진실을 왜곡한다.” (어네스트 베스트, “현대성서주석시리즈 고린도후서”,p,73.)

베스트 교수의 이 일갈이 어찌 멀리 떨어져 있는 영국 글래스고우 지역 교회의 설교자들만이 이야기일까 싶어 원고에 담았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어떤 면으로 볼 때이런 기가 막힌 행태들이 더 심각하지 아닐까 싶어 말입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한국교회를 향하여 비평적 조크의 성격이 강한 글말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서울 강남 지역에 위치해 있는 대형교회에서 전하면 안 되는 절대 금기 조항이 있다고 합니다.

① 보수적이지 않은 진보적인 성향의 설교 ② 부동산 투기가 죄라고 지적하는 설교 ③ 부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원론적인 설교즉 지옥 설교 ④ 주일에 오락을 금한다는 일체의 설교((골프주초 금지 등등의 설교 ⑤ 세월호 설교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진보적인 성향의 교회에서 전하면 안 되는 금기의 설교도 있다고 합니다.

① 차별금지법 반대 설교 ② 동성애 반대 설교 ③ 미국지지 설교 ④ 미래통합당지지 설교 ⑤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비평 설교

읽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을 다 받아들이면 전할 수 있는 게 딱 한 가지가 있다고.

성경책을 열면 맨 앞에 나오는 것이 창세기이고 맨 뒤에 나오는 것은 요한계시록이다.”

20세기를 산 복음주의자 중에 최고의 설교가라고 추앙받았던 존 스토트 목사는 이렇게 참담한 교회 강단의 현실 앞에서 벼락을 내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던 글을 보며 전율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설교는 편안한 자들을 불편하게 하고불편한 자들은 편안하게 할 수 있게 해야 한다.”(존 스토트, “설교” IVP, p,183.)

이게 설교입니다.

이게 진실한 설교자가 목숨을 걸고 나아가야 하는 자세입니다.

저를 비롯한 수많은 목사들을 공격하는 비수들이 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술수입니다.

여기에 넘어간 목사들이 자행하는 자폭행위는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주후 1세기에도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자폭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본론)

 

본문 2절을 함께 나누십시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연이어 세 가지의 맥이 같은 설명이 등장합니다.

① 숨어서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것

② 누군가를 속이는 것

③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것

모두가 같은 말입니다.

일맥상통하는 행위라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십시다,

숨어서 부끄러운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람을 속이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속인다는 것은 또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에스라성경대학원 신약학 교수인 조석민 교수는 이 대목을 속임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파누루기아로 해석하며 설명했는데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헬라어 파누르기아는 간교함을 의미한다즉 복음을 전파하면서 사람을 속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사상을 교묘히 섞어 왜곡하는 것을 뜻한다.”(조석민, “이해와 설교를 위한 고린도후서 주석”, 이레서원,p,100.)

그렇습니다.

적어도 본문에서 사람을 속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불순물을 섞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헬라어 돌로오’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 혼잡하게 하다.’로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의 원 의미는 좋은 포도주를 희석시켜 질이 나쁜 포도주로 변질시키는 당시의 사기 행각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바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자연스럽게 본문 2절을 이렇게 풀 수 있는 것입니다.

주후 1세기 고린도교회 안에는 사람을 속이기 위해 은밀하게 행하는 죄악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정 진리를 희석시켜 자기들에게 유리한 말씀으로 왜곡하는 사기 행각이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이들이 자행했던 범죄의 절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궁극적 내 삶의 목적으로 말씀으로 적용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악한 일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기 위해 말씀을 혼잡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한 자들로 인해 고스란히 영적인 피해가 고린도교회 전 영역에 확산되었습니다.

어떻게 확산되었습니까?
본문 3-4절을 봅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바울의 지적은 대단히 단호했습니다.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자들로 인해 당하게 된 교회와 성도의 피해는 이러했습니다.

① 선명한 복음이 가려지는 참극이었습니다.

② 이 세상의 신(바울신학의 언어로 말하는 이 신은 전형적인 사탄입니다.)에게 굴복하게 된 것입니다.

③ 이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받은 자들이 그 분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는 불행한 존재로 추락했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이런 영적인 참극을 당하고 있는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을 향하여 자신이 사도로 부름을 받은 후 스스로를 양심에 따라 적극적으로 자천하였다고 다시 추천서에 대한 영적 권위를 2절에서 내세웁니다.

바울이 이렇게 집요하게 사도로 부름 받은 자신의 영적 권위를 증언합니다.

본문 1절이 이것을 지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렇습니다.

바울은 아무리 나를 공격하고 힐난해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선포합니다.

더불어 내가 사도라는 직분을 사수하는 이유는 자리에 연연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낙심하지 않는다.’는 표현에서 그 결의가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런 담대함으로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선포했던 그 궁극의 이유를 5-6절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저는 설교자로서 본문 5절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격과 기쁨인지 격한 마음으로 교우들에게 증언합니다.

바울은 사탄의 궤계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이 아닌 말씀 외의 것들을 첨가하여 말씀을 희석시키는 자들이 고린도교회 안에 즐비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직격탄을 날립니다.

이렇게 통쾌하게.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자들은 바로 자신들을 전하는 사탄에게 넘어간 자들이라고.

예리한 비수요 칼날 같은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비신앙적이요불신앙적인 작태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두 가지를 선포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신학의 핵심입니다.

1) 그리스도 예수가 주되심을 선포합니다.

 

5절 전반절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바울이 목을 걸었던 것은 로드십(LORDSHIP)이었습니다.

여러 차례 교우들에게 전했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이 편지가 작성되고 전해졌을 주후 1세 중반에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 황제의 절대적 통치의 영역이었다는 말입니다.

로마 황제 통치의 영역이라는 전제는 라는 헬라적인 단어인 큐리오스는 황제 이외는 붙일 수 없는 금기어가 통용되던 장소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황제 이외에 다른 존재에게 라는 단어를 붙이는 그것은 곧 반역이요반역자가 되는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의 의미를 갖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제도에서만 국한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지 순례 시기에 고린도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크게 눈에 들어온 것은 해발 555미터의 아크로고린도 언덕이었습니다.

마침 저의 성지순례 팀들이 도착한 때그곳이 공사 중이라 직접 보지 못한 아쉬움이 컸지만 가이드가 이렇게 전언해 주었습니다.

헬라의 다신교적인 신의 수장 격인 아프로디테의 큰 신전이 이곳에 있었다고 말입니다.

고린도라는 도시의 종교적인 는 나사렛에서 태어난 보잘 것이 없었던 듣도 보도 못한 예수가 아닌 아프로디테였다고.

하나만 더 언급합시다.

공교롭게 이 도시가 섹스의 도시였다는 것을 알려주듯이 아프로디테의 여신이 잠식하고 있는 것과 맞물려 이 도시에는 남성 신의 백미인 아폴로 신전도 존재했습니다.

아프로디테를 주라고 시인하기 어려운 가부장적인 권위를 가진 남성들의 는 단언하건대 아폴론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정치적종교적 큐리오스가 즐비한 이곳 고린도에서 바울은 목을 걸고 이렇게 외쳤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 세인 지체들은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영적 마지노선을 그어야 합니다.

오늘 이 땅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큐리오스역시 도처에 너무 많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무뎌지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는 막강한 큐리오스로 서 있습니다.

진영 논리에 사로잡힌 자들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유일하게 붙잡아야 하는 큐리오스로 여깁니다.

첨예한 대립의 입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땅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위도의 북쪽에는 3대에 걸친 정권을 절대적인 로 여기며 살아가는 병영국가가 존재합니다.

위도 남쪽인 곳에 살고 있는 자들은 천박한 자본주의의 망령에 사로잡혀 모든 중의 로 맘몬을 섬기고 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코린티아자인(korinthiazein)’ 즉 고린도인처럼 산다.’는 말의 고유 명사가 음란하게 산다는 뜻으로 해석될 정도로 비윤리적인 소굴이 고린도였던 것처럼 이 땅 대한민국에는 서울티안제인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음란함이라는 패역의 극치를 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부분별한 성적 방종이 이 땅의 큐리오스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큐리오스가 어디 이뿐입니까?

오늘 목양터의 이야기 마당에서 언급한 것처럼 오늘 21세기 이 땅을 완전히 점령한 큐리오스는 극단적 가족주의(RADICAL FAMILISM)입니다.

이타적인 공동체주의로 살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는 적용 무입니다.

조금도 가족이 손해를 보거나 불리한 일을 당할 즈음이면 그까짓 성경이 말하는 는 안중에 없습니다.

너무 많아 열거하기조차 못합니다.

주일 설교의 지면의 한계 때문입니다.

이 땅에 득실대는 나를 지지하는 는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형극에서 목사로설교자로 사는 저는 이런 모든 상황에 걸 맞는 대단히 부드러운 설교를 준비하고 아주 그럴 듯하게 교우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메시지를 준비하는 것이 작금의 한국교회의 현장에서 살아남을 목사의 길이라고 압박 받습니다.

저 역시 이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연한 마음으로 다시 옷매무시를 단단히 여미며 오순절 이후 세 번째 주일 설교를 선포하고자 합니다.

 

제천세인성결교회의 교우 여러분!

이 땅에 여러분을 흥분시키는 정치적인 체계와 제도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저와 여러분의 가 아닙니다.

자본주의를 지탱하게 하는 맘몬은 저와 여러분의 가 아닙니다.

나와 내 가족 외의 것은 도대체 수용하지 않는 극단적 가족주의는 결코 이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말초적인 쾌락과 향락을 부추기는 방종의 성적인 만족나와 여러분의 가 아닙니다.

이것들을 주로 인정하는 순간우리는 말씀을 혼잡하게 만드는 자들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선포해야 하는 유일한 큐리오스가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은혜를 전인격적으로 체험한 뒤에 거리로 나와 외쳤던 베드로의 담대했던 선포를 교우들에게 전합니다.

사도행전 2:36절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흔들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좌고우면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유일한 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임을 선포합니다.

 

본문 5절 하반절을 봅니다.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둘로스는 여러 차례 설교를 통해 전했던 것처럼 전신이 묶여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전혀 자유가 없는 자 말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어네스트 베스트 교수는 오늘 본문에 기록된 둘로스’ 즉 은 종이라는 단어보다 노예라는 단어가 더 적합한 단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다.” (어네스트 베스트위의 책,p,76.)

아마도 자신을 전하기에 급급했던 바울의 적대자들에게 바울의 이 선언은 아마도 충격적인 발언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류호준 박사의 글에서 이런 신조어를 보았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정체성은 종교 비즈니스에 혈안이 되어 있는 소비자가 이끄는 교회(the consumer-driven-church)’.”

그는 이렇게 부연했습니다.

한국교회의 교회 운영이 언제부터인지 시장 경제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강한 자가 살아남는 치열한 경쟁의 현장 말입니다생산성과 효율성을 중요시 여겨 이익의 극대화를 꾀합니다고객의 입맛을 조사하여 판매 정책에 반영합니다홍보는 전략보다 우선됩니다고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각종 기발한 아이디어를 냅니다때론 재벌 기업이 골목 상권을 잠식합니다부의 편중 현상이 심해지면서 빈부의 양극화 현상이 목격됩니다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이상입니다타 종교인과는 가까워도 이웃 교회는 경쟁사가 됩니다전도는 자사 제품 홍보가 되었고교회들은 미끼 상품들로 떠돌아다니는 교인들을 경쟁적으로 호객합니다.” (류호준, “교회에게 하고픈 말”, 두란노,p,128.)

류 박사의 이 글을 읽다보니 불현 듯 이런 불길한 생각이 저를 압도했습니다.

그러므로 상업의 모든 영역에서 고객이 왕이듯성도는 최고의 대우 받아야 할 존재로 교회가 떠받들어야 한다.”

그런데 말입니다.

찬물을 끼얹겠습니다.

교회는 성도를 최고의 고객으로 존중해 주는 소비자가 이끄는 교회((the consumer-driven-church)’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성도는 언제나 자기를 부인하고자신을 버리고 주군이신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철저한 노예임을 가르치고양육하는 주님이 이끄시는 교회 (Christ-driven-church)’이어야 합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바울은 오늘 이 메시지를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대단히 강력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명심하십시다.

구원 받기 이전에 구원의 장으로 인도하기 위해 전도 대상자를 존중해 주고 아껴주는 곳이 교회임을 저 또한 인정합니다.

그러나 구원 이후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은 철저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말씀 안에 담겨 있는 로드십에 대한 이해요실천적 강령입니다.

 

결론)

 

지난 금요일 새벽에 교우들과 함께 읽은 구절이 에스겔 2장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의 그발 강가까지 급하게 심방가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다급한 신탁을 내리십니다.

1-5절입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 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이 구절을 읽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마음이 굳고 뻔뻔한 자는 에스겔 시대에도 있었고바울의 시대에도 있었으며또 오늘 2020년 6월 21일 제천에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주전 6세기 예언자 시대에는 에스겔이 있었습니다.

주후 1세기 고린도에는 바울이 있었습니다.

주후 21세기에는 세인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전히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에스겔에게 그랬던 것처럼바울에게 그랬던 것처럼오늘은 세인교회가 그래야 하는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적인 도구가 있고또 그 예언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전하는 선지자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언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오늘결코 말씀을 수단으로 삼아 말씀을 변질시키며 희석시키는 불신앙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할 게 따로 있지말씀을 혼잡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종(노예)입니다.

웨스티 민스터 대학 교수인 마이클 호튼은 그의 걸작에서 아주 의미 있는 성경 구절을 독자들에게 선물로 줍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소비자가 되든지 제자가 되든지 선택을 강요하셨다이윽고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다.”(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부흥과 개혁사, p,328.)

요한복음 6:68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은

어디 있느뇨 어디 있느뇨

내가 밤낮으로 눈물 흘리니 주여 어찌 합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불안하는고

너는 너의 하나님을 바라라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살아계시는 내 하나님을 너는 너의 하나님을 바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