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후서 아홉 번째 강해) 제목: 눈물로 쓴 편지 본문: 고린도후서 2:1-11 서론) “폐족에서 재주 있는 걸출한 선비가 많이 나오는 것은, 하늘이 재주 있는 사람을 폐족에게서 태어나게 하여 그 집안에 보탬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귀영화를 얻으려는 마음이 근본 정신을 가리지 않아 깨끗한 마음으로 독서를 하고 궁리하여 진면목과 바른 뼈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민으로 배우지 않으면 못난 사람이 되고 말지만 폐족으로 배우지 않는다면 마침내 도리에 어긋 지고 비천하고 더러운 신분으로 타락하게 되며 아무도 가깝게 지내려 하지 않아 결국 세상의 버림을 받게 되고, 혼인길마저 막혀 천한 집안과 결혼하게 되며, 물고기의 입술이나 강아지의 이마 몰골을 한 자식이 태어나면 그 집안은 영영 끝장나는 것이다.”(박석무,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한길사,pp,397-398)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이미 폐족이라는 자괴감을 갖고 공부에 정진하지 않는 스물 한 살의 큰아들, 열여덟 살의 작은 아들에게 추상같이 내린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이 글을 편집하여 소개한 박석무 교수는 이 글을 소개한 뒤에 이런 사족을 달았습니다. “절망의 세월에 절망을 넘어서 희망을 앞세우는 불굴의 의지가 담겨 있고, 자식들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심정이 무섭도록 절실하다.”(같은 책, p,399) 정약용이 이렇게 아들들에게 절절하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실패하지 않는 아들들이 되기를 바라는 에비의 마음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으로 적용해 본다면 정녕 아들들에게 자유롭지 못한 유배지에서 눈물로 쓴 에비의 편지일 것입니다. 다산의 편지를 다 소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쓴 편지의 전문을 읽다보면 읽혀지는 줄거리가 보입니다. 바르게 사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는 눈물이 담보된 편지라는 교훈입니다. 아마도 이런 진리를 지금도 여전히 소리치는 존재는 이 땅에 부모와 스승 말고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주간, 작가 위기철이 쓴 ‘아홉 살 인생’을 읽었습니다. 작가의 전지전적인 소설인 이 작품에서 시골에서 살던 2학년짜리 아홉 살 주인공이 그린 담임선생님은 ‘월급기계’였습니다. 스승이라는 이미지라고는 1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의 불편한 일을 겪으면 언제나 아직 열 살도 안 된 앳된 제자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하는 선생, 돈은 밝혀 부자 아이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운 선생, 그러면서 때가 되면 월급만 또박또박 받는 월급기계 같은 선생 말입니다. 작가의 프로필을 보니 공교롭게도 저하고 동갑내기인 1961년생인 것을 보니 저도 작가와 같은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저의 12년 동안인 초 중 고등학교 시절, 저에게는 스승은 고 3 담임 선생님 말고는 별로 기억에 나지를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월급기계였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유독이 제 기억에 남아 있는 단 한 분의 스승은 고 3시절, 본고사를 앞둔 제게 이런 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강덕아! 너는 유독 내 고등학교 시절을 많이 닮았단다. 선생님도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힘들게 공부했던 것도 그렇고, 과목 중에 영어를 좋아했던 것도 그렇고, 교회를 다녔던 것도 그렇구나. 예비고사 점수가 생각 한대로 나오지 않아 힘들지? 지금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잘 이기자. 네가 믿는 하나님은 내가 믿는 하나님인데 하나님께서 강덕이를 응원해 주실 게다. 이 다음에 훌륭한 영문학 교수가 되어 있는 걸 선생님은 기대한다. 마지막 남은 본 고사,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잘 치르자.” 이 편지를 받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왜? 스승의 절절한 마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 3 담임 선생님의 진정성이 있는 따뜻함이 제 인생의 한 획을 긋는 지침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렇듯 진정성이 있는 글은 누군가 그 편지를 받은 수신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 바꾸어 놓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일 설교는 편지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본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네 번째 편지를 썼다고 했습니다. 그 네 번째 편지가 바로 고린도후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바울의 적대자들에게 적지 않은 공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방문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취소하였는데 그것을 트집 잡아 신의가 없는 사람, 가볍고 천박한 사람 등등으로 몰아세우며 그들이 적지 않은 비토를 하였음을 살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결코 그가 약속을 헌신짝 버리듯 가벼운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그가 고린도에 가서 이런저런 압박을 가할 것을 알았기에 그러지 않고 고린도교회 지체들의 자정능력을 기대하며 스스로 교회답지 않은 것에 대한 회복과 사도권의 거부라는 치명적인 반대에서 돌아설 것을 기대하며 고린도 방문을 철회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고린도 방문 철회에 대한 바울의 개인적 소회와 더불어 개인적으로 행했던 편지 보내기 이후에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한 상황에 대한 바울의 목회적인 반응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바울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고린도에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본인의 결단이었음을. 그렇다면 왜 고린도에 가지 않았습니까? 지난 주에 설교의 내용으로 전했던 핵심적인 내용을 본문 4절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은 내가 고린도교회를 향한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적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고린도 공동체가 자정적인 능력으로 바로 서 줄 것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본인이 가게 될 경우, 본의 아니게 지나치게 간섭할 것에 대한 미연의 방지 등등이 바로 바울의 사랑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회의 적대자들은 이런 바울의 의도를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그들 그룹 중에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어떤 자가 바울에 대하여 근심하게 할 정도로 매도한 일이 있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여기에 기록한 헬라어 단어 ‘뤼페오’는 ‘근심하게 하다’로 번역했는데 조금 더 원어적으로 가깝게 해석하면 ‘아프게 하다, 고통스럽게 하다. 불편하게 하다’의 의미입니다. 바울을 고통스럽게 하고, 아프게 하였으며, 불편하게 했던 일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 강해 때 말씀드렸던 사도권 거부입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바울의 심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개인적인 명예가 훼손되는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경우 고린도교회 공동체를 향한 영적인 리더십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영적 리더십이 무너진다는 것은 결국 복음의 능력이 원만하게 증거 되지 못한다는 것과 직결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말씀드린 대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공동체에게 강력한 경고성 메시지가 담겨 있는 세 번째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냈다고 교우들에게 설명했습니다. 이 세 번째 편지는 바울에게 있어서 강력한 경고성 메시지인 것은 분명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목회자 바울의 절절한 내용이 담겨 있는 눈물의 편지이기도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강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에 대한 애증이 담겨 있기 때문인 것처럼 바울 역시 그랬습니다. 바울의 이 정서적, 심리적 상태가 본문 4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분명히 반대자, 적대자들 때문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그들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목회자는 목회자의 영적인 권위와 사역의 진정성을 인정하고 중보해 주는 대대수의 사람들 때문에 힘들지 않습니다. 몇 몇의 부정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반대자 때문에 힘이 듭니다. 바울의 심정을 목회자인 저는 충분히 공감합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며 쓴 눈물의 편지를 디도가 가지고 고린도 교회로 갔습니다. 인편으로는 디모데가 응원자로 협조자로 직접 가서 고린도 교회의 지체들을 독려했습니다.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를 가지고 간 뒤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다고 했습니까? 5:5라고 했습니다. 반 정도의 사람들이 회복되었다고 했습니다. 추측하기로는 고린도교회의 대세가 바울의 편지, 디도와 디모데의 협력 사역 등등이 힘을 발휘하여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울 때의 초심으로 상당수 돌아서는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 근거 자료가 본문 5-6절입니다.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아마도 고린도교회에서 벌어진 일 중에 하나는 바울의 적대자들에게 벌이 내려진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법으로 말하면 징계의 치리가 이루어진 셈입니다. 여기에 ‘벌’이라는 단어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티미아’는 문자적으로 ‘강하게 멱살이 잡힌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대단히 강한 물리적인 압력이나 압박이 가해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이 정도의 물리적인 심판은 바로 출교였을 것입니다.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영적 격리 상태입니다. 아마도 초대교회에서는 이 징계가 가잠 무거운 징계였을 것을 가늠하게 해 주는 성경적 내증이 요한복음 9장에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실로암 못가에서 눈을 고친 시각장애인이 요한복은 9장에 등장합니다. 아들이 다시 보게 된 사건은 부모들에게 얼마나 엄청남 감격의 사건이겠습니까? 보지 못하던 자가 눈을 뜨게 된 날이 안식일인데 바리새인들이 이 일을 트집 잡아 예수를 공격하기 위해 증거를 남기려는 사악한 일을 자행합니다. 다시 보게 된 사람에게 너를 보게 한 자가 누구인가를 묻자 나를 보게 한 자는 선지자라고 말을 합니다. 이윽고 아들을 고친 사람이 누구인가? 를 그의 부모들에게 묻자 부모들은 유대인들 즉 바리새인들의 저의를 알고 두려워하여 이렇게 답변합니다. “우리는 아들이 다시 보게 된 것만 압니다. 그 외는 잘 알지 못합니다. 내 아들이 다 컸으니 직접 물어보십시오.” 이렇게 소극적으로 부모들이 말한 이유를 요한이 부연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9:22절입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출교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든 사회적 활동을 끊어버리는 사형선고와 같은 치명타였습니다. 그러기에 시각장애인의 부모들이 유대 공동체에서 출교를 당할까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공동체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바울의 사도권을 거부한 자들은 고린도교회의 대세가 바울의 영향권으로 돌아서자 징계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 징계는 그들에게는 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사도권을 거부한 자들에 대하여 고린도공동체가 징계를 내린 것에 대하여 정당성과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렇게 판결했습니다. 마땅하도다.(6절 하반절) 이제 교통정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토록 가슴앓이를 하게 한 고린도공동체가 바울이 원했던 대로 다시 원상회복이 되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그러면 ‘사건 번호 ○○ 종결’로 끝나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음을 본문이 알려줍니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본문 7-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무슨 말입니까? 징계를 당한 자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징계를 당한 그 당사자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라고까지 역설합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을 보여주는 순종을 하는지 내가 지켜보겠다고 합니다. 병 주고 약주는 것도 아니고 대단히 당황스럽고 난처하게 보이는 장면일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너무 우유부단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는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쐐기를 박는 발언을 마지막 부분에 기록합니다. 만에 하나 고린도 교회 공동체가 징계를 내린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바로 사탄의 계책에 우리가 넘어지는 것이며 나는 그렇게 사탄의 공격에 교회가 넘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하게 권면하기에 이릅니다. 사정이 이 정도면 이미 결론이 난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왜 이토록 강하게 자신을 불편하게 했던 자들을 용서하라고 했을까요? 오늘 본문은 바울이 쓴 네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입니다. 세 번째 편지가 눈물의 편지라고 했는데 네 번째 편지는 어떤 편지였습니까? 바울의 의도대로 고린도교회가 정상으로 회복되고 다시 바울의 사도권이 인정된 그래서 바울의 권위가 회복된 승리를 노래하는 편지가 고린도후서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오늘 보내고 있는 이 편지 역시 목회자의 심정을 구구절절 담고 있는 ‘눈물의 편지 2’ 즉 속편인 고린도후서입니다. 해서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눈물로 쓴 편지’라고 정한 것에 대해 별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고린도교회의 일부 형제들을 치리함으로 완전히 정리하면 훨씬 더 매끄러울 텐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바울의 뜻대로 골칫거리였던 자들을 정리했던 형제들을 향하여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용서했으면 좋겠다는 눈물의 편지를 바울은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9절에 남겨 놓은 바울의 이 문장이 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 세인교회를 목회하는 저에게 가슴 절절함으로 다가옵니다.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바울이 쓴 이 기록은 곧 눈물의 편지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오늘 설교의 교훈을 받겠습니다. ※ 목사와 성도가 눈물로 편지를 쓰고 있는 교회는 반드시 승리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서울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 목사가 몇 주 전, 서재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온라인 예배를 드린 지 한 달이 넘어 두 달이 되어가는 지경에 너무 지치고 짜증도 나고 해서 설교 준비조차 잘 안 되어 힘든 상태가 지속되어 하나님께 불만 섞인 모습으로 항변하는데 갑자기 주께서 이렇게 조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임 목사야, 지금 네 이웃들은 바이러스로 인해 여기저기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너는 오직 예배를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서만 슬퍼하고, 내가 사랑하는 자들이 슬퍼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구나.” 이 조명을 받은 친구 목사는 충격을 받고 서재에서 한 동안 나오지 않고 대성통곡을 하며 회개했다고 전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일, 오프라인 예배에 나온 장로님들에게 이 회개의 뜻을 전하자 당회원들도 함께 통곡하며 회개했다고. 춘천에서 목회하는 친구 목사는 두 달 여 수없이 많은 목회서신을 써서 교우들에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 편지를 쓰며 많이 울었다는 전언도 해주었습니다. 그 교회 성도들은 도리어 온라인 예배 기간 동안 담임목사님의 절절한 케어를 받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는 보고도 전해 주었습니다. 지난 두 달 여 동안, 기도 시간마다 절절하게 기도했던 제목이 세 가지 정도였습니다. ① 하나님, 득규와 유정이와 최 목사가 외국에 있습니다. 코로나의 위기 속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저들이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게 하옵소서. ② 하나님, 성도들의 경영 장소가 많이 힘이 듭니다. 자영업자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공통의 어려움이지만 결코 도산하는 경영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③ 하나님, 온라인 예배의 ‘온’자도 모르는 지체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저들이 실망하지 않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스피커폰으로 예배를 드리는 지체들이 참 많이 힘들다는 고백을 받고 가슴이 메어졌습니다. 이제 나름 예배가 회복되어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온라인 광고를 통해 온라인 예배에 익숙하지 않은 지체들을 위해 아내가 스피커폰 예배를 생각해서 권사님들을 돕는다는 광고를 듣고 교우 한 분은 그 따뜻한 사랑에 눈물겨웠다는 전언도 들었습니다. 강단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 교회가 어찌 쓰러질 수 있겠습니까? 교우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목사가 있는 교회가 어디 성도에게 인분을 먹이는 엽기적인 교회가 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20:18-21절입니다.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하략) 그러자 고별설교를 마친 뒤에 그들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사도행전 20:36-38)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당신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신들의 아버지가 직장에서 수없이 무릎을 꿇었던 그 수모를 견딘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당신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신들의 어머니들이 남모르게 흘렸던 수없이 많은 눈물의 결과입니다. 당신들이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의 영혼이 다치지 않도록 숨죽여 울며 기도했던 주의 종들의 눈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로 지금까지 설 수 있었던 것은 독생성자를 죽이셨던 아버지 하나님의 눈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지금 우리는 2000년 전 신앙의 선배였던 바울의 절절한 눈물의 편지를 받고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들의 후대를 위해 눈물의 편지를 믿음으로 써내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써내려간 눈물의 편지 때문에 우리들의 후손들이 믿음의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또 이겨내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 교회는 물론, 한국교회가 다시 찾아야 하는 것은 눈물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꿈 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 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린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