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본문: 열왕기상 18:1-6 제목: 오늘, 이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서론) “’신’이란 단어는 내가 혼자 있을 때만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혼자가 아니면 절박한 현실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즈가 미국의 칼리 지브란이라고 격찬했던 휴 프레이더 목사가 쓴 ‘나에게 보내는 편지(notes to myself)’에서 발견한 글입니다. 제가 이 글의 밑줄을 그은 이유는 신앙적인 사람이라는 표현을 할 때, 그 ‘신앙적’이라는 의미에 대하여 휴 프레이더 목사가 아주 적절하게 설명했다고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언제 신앙적인 존재가 되는지 아십니까? 상당히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고독할 때입니다. 즉 혼자 있을 때입니다. 우리는 열왕기상 19장에서 영적 침체에 빠진 엘리야를 만납니다. 갈멜 산에서 그 엄청났던 기개로 바알리즘에 빠져 있었던 당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었던 선지자 850명을 기손 시내에서 척결했던 엘리야를 만납니다. 문제는 갈멜 산상에서 위대한 승리를 경험했던 엘리야가 아니라, 이세벨의 살해위협을 두려워하여 비교적 안전했던 브엘세바 근처에 있는 광야로 들어가 로뎀 나무가 그늘 되어주는 곳에서 도착을 해서 이제는 나를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무기력해 보이는 엘리야를 만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엘리야에게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공급해 주십니다. 이윽고 그곳에서 천사들의 도움으로 음식을 공급받은 엘리야는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호렙 산의 한 굴로 은신처를 옮깁니다. 이미 성경을 통해 아시는 것처럼 그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엘리야에게 현현하셔서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고 물으십니다.(왕상 19:9) 이 질문을 받은 엘리야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지는 10절에서 이렇게 답변을 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열왕기상 19:10절)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는 일견, 엘리야의 이 심정에 정서적으로 동의하는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얼마나 많이 힘들고 외로웠으면 이렇게 표현했을까 싶어서입니다. 갈멜 산 전투는 결코 녹록한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일단 수적 열세가 엘리야의 기를 죽일 만한 비율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갈멜 산에 올라와 있는 사람들은 엘리야의 영적 리더십에 동의하던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줄타기하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이기는 자에게 붙겠다는 박쥐 근성이 있었던 기회주의자들이 하이에나처럼 엘리야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기는 강자에게 붙겠다는 머뭇머뭇 거리던 양다리 걸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갈멜 산 전투는 정말로 목을 건 싸움이었습니다. 이렇게 쉽지 않은 싸움을 극적으로 이겼건만 엘리야에게 돌아온 결과는 당대의 무자비한 권력자인 이세벨이 보낸 살해 통첩이었습니다. 이 살해위협을 피해 그가 숨어든 호렙 산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갈멜 산 승리 이후 분위기에 도취되어 엘리야를 따르던 부류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직 엘리야만 홀로 남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고독했고, 외로웠던 나날을 보내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시쳇말로 헛된 개고생을 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나만 혼자 남았다는 엘리야의 불평에 역사가는 이렇게 후속담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열왕기상 19:11-13절) 그렇습니다. 외로움에 지쳐 있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말씀으로 찾아오셨습니다. 혼자 있었던 엘리야, 그리고 혼자라고 생각했던 엘리야, 그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단히 감동적인 역설의 은혜를 받습니다. 어떤 역설의 은혜입니까? 이때가 어떤 의미로 보면 엘리야에게 있어서 사역의 전성기였다는 은혜입니다. 외로워서 죽을 것만 같았던 엘리야를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신 은혜를 봅니다. 오신 것뿐만이 아니라 아람의 왕으로 하사엘을 세우고, 예후에게 기름 부어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한 선지자로 세우라는 삼중의 미션을 위임하셨습니다. 사명을 재확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호렙의 엘리야에게서 발견됩니다. 그렇습니다. 홀로 있을 때, 가장 민감하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엘리야를 돌보신 은혜는 곧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주님의 사역을 하면서 외로우십니까? 신앙의 여정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 고독한 싸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용기를 내십시다. 그 때가 가장 역동적으로 주군께서 당신과 함께 하는 신앙의 전성기라는 것을 믿고 힘을 내십시다. 본론) 오늘 본문은 엘리야가 외로워하며 신앙의 경주를 할 때 하나님께서 철저히 함께 하신 또 한 명의 위대한 동시대적인 일군 한 명을 소개합니다. 오므리 왕조를 계승하여 왕이 된 아합은 사마리아에서 20년간을 통치하면서 재임 기간 최고의 경제적인 번영기를 이룹니다. 하지만 아합은 당시 두로의 왕이었던 잇도바알의 딸인 이세벨과 정략적으로 결혼을 한 이후 걷잡을 수 없는 종교적인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이세벨이 열렬한 바알의 숭배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아합과 결혼하여 정책적으로 바알 숭배를 독려했고, 당시 경제적으로 잘 살고 있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그 근원에는 바알이 돕고 있기 때문이라는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오도된 교육을 펼치자 북쪽은 하나님을 망각한 바알의 땅으로 변질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세벨은 하나님을 믿는 예언자들을 찾아내 그들을 살해하는 악행을 자행하기까지 합니다. (열왕기상 18:13) 북쪽 왕국은 철저히 바알을 숭배하도록 국가적인 종교로 바알리즘을 인정하기까지 합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바알 이외에 다른 신 즉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역설의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선민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 셈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런 참담한 영적인 붕괴의 시기에 국가 종교이자, 국가적인 기득권에 힘입은 바알숭배주의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초기 예언자가 엘리야인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엘리야는 예언자였기에 바알리즘과 싸우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하나, 엘리야는 바알종교의 심대한 영향을 받았던 요단강 서쪽의 출신이 아니라 도리어 야웨 하나님 신앙으로 깊은 영향을 받았던 요단 동쪽의 길르앗 땅 디셉 출신이었기에 종교 혼합주의로 망가지고 있는 북 이스라엘을 좌시할 수만 없었다는 타당성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또 한 사람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대단히 의외의 인물처럼 보입니다.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오바댜입니다. 본문 3-4절을 읽겠습니다. “아합이 왕궁 맡은 자 오바댜를 불렀으니 이 오바댜는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더라” 이 구절에서 저는 소름끼치는 아슬아슬함을 느낍니다. 열왕기 역서 기자는 오바댜의 정체를 이렇게 밝힙니다. ① 그는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종처럼 살라는 부모들의 소망을 안고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오바댜라는 이름이 ‘여호와의 종’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② 그는 바알리즘이 국가 종교로 인정받은 그 때에 왕의 궁정을 맡아 돕는 궁내 대신이었습니다. ③ 이런 야웨 종교의 흑암의 시대에 목숨을 걸고 야웨 선지자들 100명을 둘 씩 나누어 50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공급해 주었던 자가 ‘오바댜’였습니다. ④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이 정황만 놓고 보면 이런 추측이 가능합니다. 오바댜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영적 싸움을 지난하게 감당하고 있었을까! 의 소회와 감동을 말입니다. 자신의 직속상관이었던 아합의 아내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색출해서 그들을 죽이는 일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살벌한 분위기 속에 오바댜는 이세벨이 찾아 죽이려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은밀하게 숨겨 그들을 보호하는 반역의 일을 감당하였다는 사실에서 아슬아슬한 감동을 엿보게 됩니다. 오바댜를 통해서 본문 밑에 깔려 있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적 충격을 발견하게 됩니다. ① 오바댜의 이 죽기를 각오한 사역이 3년 6개월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② 그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녹을 먹고 있는 고위 공무원이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의 기독교적인 언어로 바꾸면 그는 철저한 평신도 사역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오바댜는 본인이 결정하여 진행해온 죽기를 각오한 하나님의 종으로의 섬김을 지속했다는 점은 대단히 큰 감동으로 밀려옵니다. 이제 오늘 본문 5절을 읽겠습니다. 5절입니다. “아합이 오바댜에게 이르되 이 땅의 모든 물 근원과 모든 내로 가자 혹시 꼴을 얻으리라 그리하면 말과 노새를 살리리니 짐승을 다 잃지 않게 되리라 하고” 3년 6개월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재앙을 만난 아합은 자신의 힘의 한 축이었던 말과 노새를 더 이상은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기를 느끼자 그가 신뢰하던 오바댜와 함께 동행 하여 물을 찾는 행보에 나섰음을 역사가는 소개합니다. 두 사람은 분명히 기르는 가축들을 살리기 위한 방책으로 야외로 나온 것입니다. 이런 비상 상황에서 두 사람의 행보를 밝힌 역사서 기자는 본문 마지막 절에서 아주 묘한 뉘앙스의 표현으로 6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제가 오늘 설교를 위해 본문을 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6절 때문이었습니다. 6절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말 그대로 두 사람이 더 극대화 된 효율을 얻기 위해 아합은 한 지경으로 갔고, 오바댜 역시 또 한 지경으로 갔다고 이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 구절이 그렇게 눈에 들어오지를 않고 또 다른 강력한 레마로 보였습니다. 아합은 아내가 믿는 바알 숭배를 허용하여 3년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재앙을 자초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고 있는 길에 서 있는 비극적인 주인공으로 보였습니다. 반면 오바댜는 그와는 반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직속상관이 자행하고 있는 바알 숭배라는 최악의 선택의 길과는 정 반대의 길에 서서 100명의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섬기고 있는 또 다른 진정한 주인공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바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에 서 있는 자였다는 말입니다. 이 기막힌 운명을 열왕기상 기자가 너무 예리한 역사적인 해석을 우회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본문 6절이 제 눈에 들어왔고, 제 심장을 타격했습니다.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이렇게 설정했습니다. “오늘, 이 사람이 더 필요합니다.” 오늘 더 필요한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 외롭지만 세류(世流)와 역류하는 길에 서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나무나 잘 압니다. 세류는 아합의 길인 것을. 그 길에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그 길에는 우리들을 결코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는 권력의 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며 말초신경적인 인간의 본능을 쾌락으로 인도하는 매력적인 신이 보장하는 꽤 괜찮은 유혹이 언제나 있는 길입니다. 거기에는 편안함이 있습니다. 그 길에는 안락함까지 보장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그 길을 꽃길 같이 넓습니다. 반면 오바댜의 길은 언제나 아슬아슬합니다. 동시에 그 길에는 언제나 불편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디 불편함뿐입니까? 그 길에 서 있는 자는 언제나 희생을 당하는 불이익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행동하기가 싫은 데 자기를 부인하라는 종용도 당합니다. 심지어 그 길은 들어가서 걷기에도 결코 녹록하지 않게 길까지 좁습니다. 결정타 하나, 그 길에 서서 걷는 자는 언제나 외롭고 고독해야 합니다. 자, 이 정도의 양 갈래 길인데 감히 누가 오바댜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할 수 있겠습니까? 정신병자가 아니고야 누가 오바댜의 길을 가겠다고 하겠습니까? 10명 중에 10명 모두가 선택하고 싶은 길은 아합의 길일 것입니다. 이제 저 역시 결정해서 성도들에게 취사선택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결정하겠습니다. 세인 교회의 지체들이여! 절대로, 그리고 결코 아합의 길로 가지 말고,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오바댜의 길로 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저 역시 정신병자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 저는 제 스스로 저를 스스로 다스리는 말씀을 언제나 끄집어내곤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강력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13-14절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오늘 목양터 이야기마당의 글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다시 한 번 교우들에게 읽어 드립니다. 애가(哀歌) 시대 복판에 서서 우리 교회는 3월부터 한시적으로 주일 낮 예배를 기존 2부 예배에서 3부 예배로 다분화해서 드리려 합니다. 주일 예배 인원을 분산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이 방법을 도입하기로 했습니다. 작금, 전염병 창궐이라는 돌발적인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인원 규모가 큰 종교 행사를 자제하라는 정부 정책에 대하여 나름 부분적으로 수용하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해서 주일 예배를 3부로 나누어 드림으로 함께 하나의 공간에서 예배를 드리는 인원의 규모를 축소시키고자 3월 첫 주부터 실시하려고 합니다. 더불어 주일 오후 예배는 당분간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이유는 예배 후에 나누던 점심 식탁 공동체의 위험성 때문입니다. 식사를 준비하는 지체는 물론, 함께 좌탁(坐卓)에 앉아 교제를 나누는 일까지도 매우 위험하고 불편한 일임을 알기에 내린 결정입니다. 어제는 교회 전 지역에 방역도 마쳤습니다. 혹시나 하는 교우들에게 정서적인 안정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지체들에게 마스크 착용을 자유 사항인 아닌 독려 사항으로 공지하고, 본당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손 세정제를 사용하도록 권고하기로 했습니다. 금년 2020년은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현장에서 목회를 시작한지 32년째가 되는 해입니다. 32년 만에 전례가 없었던 이 어처구니없는 일을 시행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실은 많은 고민이 저를 강타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민감하게 목회자를 타격한 팩트는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것인가! 에 대한 자괴감이었습니다. 순교적 각오로, 또는 하나님이 보호하시는데 뭘 그리 호들갑에 걱정이냐는 나름의 격정이 목사를 힘들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나온 예배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스스로 우울한 분위기에 편승하지 말라고 종용하지는 못할망정 마스크 착용을 권고하고, 교회 공동체는 말 그대로 ‘COMMUNALISM’(공동체주의)의 산실인데, 그 본질 자체를 스스로 와해하는 듯한 다분화 예배를 실시하는 것이 제 정신이냐는 호된 질책을 주군께서 하시는 것 같아 뜨끔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목사 개인의 자괴감보다 더 나를 힘들게 하고 염려스럽게 하는 것은 성도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여기게 될 ‘영적 무뎌짐’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얼마든지 상황에 따라 예배, 드림, 헌신 등등의 내용들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그 얄팍함과 무뎌짐이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문으로의 진입이 제게는 더 무서운 내적인 적수입니다. 그래서 일까, 이래저래 목사는 근래 더 민감하게 하나님께 엎드리는 요즈음을 살고 있습니다. 신앙의 행위는 계산하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을 향한 천로역정은 주판알을 퉁기는 일이 아닌데, 이 위기의 상황에서 목회자가 무언가를 결심해야 하지 않느냐는 교회 안팎의 무언의 압박들이 한 주간 나를 무척이나 힘들게 하며 조여 왔습니다. 몇 주 전, 새벽예배 시간에 읽었던 한 구절이 나에게 현실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습니다.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삼상 28:7) 현대판 엔돌에 살고 있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자가 사울이 아니라 혹시 이강덕 목사는 아닐까! 슬픈 시대의 복판에 서 있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주님이 위로부터 내리시는 지혜를 구해 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만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한 곳으로 모아졌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류와 같이 걸어가는 아합의 길에 서 있는 목사인가? 아니면 그 반대의 길로 가려는 오바댜의 길에 서 있는 목사인가? 세인의 지체들이여! 오늘 목양터의 이야기 마당에 기록한 글과 3월 한 달동안의 세인 교회의 목회적인 변화를 들으면서 혹시 안락함과 불편하지 않은 선택이라고 박수를 치는 분이 계실까봐 심히 두렵습니다. 저는 코로나 바이러스 19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의 무뎌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그 마비됨에 빠지게 될지 모르는 세인공동체가 더 두렵습니다. 지난 주간 인터넷 공간에서 세류들의 폭력을 무차별로 당했습니다. 왜 교회가 이런 비상상황에서 교회 문을 닫지 않는가? “주일에 들어오는 돈 때문이다.” 수준 이하의 사람들과 맞서기는 싫지만, 한 마디는 남겨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들의 안목과 수준이 그렇게 천박하기에 나는 그 반대의 길을 목을 걸고 가려한다고. 왜 우리가 아합의 길이 아닌 오바댜의 길로 가야 합니까? 아합이 간 길이 아닌 오바댜가 간 길에 엘리야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8:7절입니다. “오바댜가 길에 있을 때에 엘리야가 그를 만난지라 그가 알아보고 엎드려 말하되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우리는 왜 불편하고, 외롭고, 고독한 길을 선택하며 가야 합니까? 그 길 끝에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길의 여정에 있는 자들을 위해 주님이 그 길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프레도 베버는 이렇게 저에게 도전을 주었습니다. “싸움은 무기로써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승리하는 것입니다.” (만프레도 베버, “정말 기독교는 비겁한 것일까?”, 국제제자훈련원, p,51) 제가 쓴 목양터 이야기 마당의 글을 본 차준희 교수가 이런 댓글로 저를 격려해 주어 너무 고마웠습니다. “북극성(주군)을 향해 끊임없이 흔들리는 나침반은 건강한 것이다. 고민하는 친구에게 응원의 한 표를 던진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정말로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자가 있습니다. 오바댜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정말로 불안하고 아슬아슬했지만 그래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삶이었음을 믿었던 오바댜는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그 길을 갔던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교회의 본질마저 흔들고 있는 오늘, 그것과 편승하여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수많은 종교인들이 판을 치고 있는 이때, 오바댜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또 어디에 없는가! 찾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한 주간 종도 고민했지만 세류에 타협하여 속절없이 무너진 사람이기에 큰 소리를 칠 입장은 아니지만 곧추 세기며 오바댜와 같은 여정에서 흔들리지 않기를 다시 한 번 주군께 기도하며 머리를 숙여 봅니다.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왕상 18:6) 오바댜의 길로 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신 축복/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 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