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9일 주일 예배 설교 제목: 대가 없는 승리는 없다. 본문: 느헤미야 1:1-11 서론)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을 졸업한 깊은 산속 옹달샘이라는 명상 센터를 운영하는 작가 고도원이 쓴 ‘꿈이 그대를 춤추게 하라’를 보면 사람마다 겪는 슬럼프 이야기를 하나 소개합니다. 작가는 슬럼프라는 이 단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음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① 성장통인 시련을 겪어야 한다. ② 자꾸 넘어져 보아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방법을 시련과 고난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하면서 나름 의미 있는 말을 내놓았습니다. “그만큼 긴 인생을 놓고 보았을 때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슬럼프는 재산이다.”(p,130) 가만히 보면 작가의 말이 귀하게 다가옴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주어진 일련의 시련, 넘어짐 등등은 그만큼 내가 자라나는 데에 필수적인 대가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대가가 없는 승리는 없다. 세상적인 시각에서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위대한 일을 이루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의 일입니다. 하물며 영적인 면에서야 재론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성도가 성도로서의 삶을 승리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예언자 에스겔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신탁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에스겔 36:33-3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하게 하는 날에 성읍들에 사람이 거주하게 하며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할 것인즉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폐하게 보이던 그 황폐한 땅이 장차 경작이 될지라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폐하더니 이제는 에덴동산 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주민이 있다 하리니 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에스겔 예언서의 배경을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주전 586년, 하나님은 유다를 멸망시키시고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 멸망의 시기는 한시적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대로 7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실 것을 예언자 에스겔에게 알려줍니다. 예루살렘 성읍의 회복될 것이고, 백성들은 다시 그 땅에 거주하게 될 것이며, 황무한 땅도 개간하게 될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에덴동산처럼 회복되되 그 땅으로 돌아온 남은 자들이 이 일을 행하게 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의 회복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을 선언하신 하나님은 에스겔 36:37절에서 아주 중요한 당신의 일하심을 신탁을 통해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 36:37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이 구절에서 우리들이 놓치지 말아야 하는 신탁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이 구절을 히브리어 본문대로 직역하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가 이것이 그들을 위해 행해지도록 이스라엘 족속으로 하여금 구하게 할 것이라” 어떤 면에서 섬뜩해지게 만드는 신탁이 아닙니까? 이 본문 내용을 오늘의 언어적 감각으로 풀겠습니다. “내가 유다를 반드시 회복시킬 것이다. 완벽하게 에덴동산처럼 다시 만들며 그 땅에 남은 자들이 다시 거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승리를 그냥 주지는 않는다. 내가 이미 이렇게 정했지만 이 일을 이루도록 유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할 것이고, 그 기도에 응답하여 내가 이 일을 이룰 것이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그 철저하신 일하심의 방법이 보이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반드시 이스라엘로 하여금 기도라는 대가를 지불하게 만드신다는 엄위하신 신탁이 읽혀지십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가 성도로서 승리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대가를 분명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기도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난 뒤에 승리의 노래를 부른 대표적인 주인공 한 사람을 교우들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만나보겠습니다. 본문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느헤미야의 시대를 전 이해로 알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다는 주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했습니다. 바벨론은 아주 강대한 세력이었고 힘이었습니다. 허나 이렇게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바벨론은 주전 539년에 바사의 고레스에 의해서 멸망을 당합니다. 영원한 제국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바벨론은 속국이었던 이스라엘을 강압하는 정책을 폈지만 이에 반해 바사는 바벨론과는 사뭇 다르게 이스라엘을 유화정책으로 다스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레스는 바사의 강력한 국가적 카운터파트로 부상한 이집트를 지정학적으로 막아 줄 수 있는 절충지역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명했기에 예루살렘에 사람을 거주하게 만들어야 했고, 그 성읍을 강하게 만들 정치적인 포석까지 어우러져 그곳에 자신을 대리할 강력한 총독을 선정해 파송함과 동시에 포로로 끌려왔던 유대인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시켜 그들로 하여금 이집트의 방패막이를 하도록 하는 일석이조의 정책을 핍니다. 해서 바사의 고레스는 바벨론에 끌려와 거주하던 이스라엘의 포로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정치적 결단을 내립니다. 성경의 역사는 4차에 걸쳐 바사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의 본국 귀환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① 1차 귀환: 주전 538년 유다의 왕족이었던 세스바살(포로로 끌려왔던 여호야긴 왕의 아들)의 영도 하에 진행되어 성전 재건을 꿈꾸었지만, 유브라데 강 건너편을 통치하던 르훔과 심새 그리고 닷드내와 스달보스내 총독의 집요한 방해 공작으로 성전 재건이 중단됩니다. ② 2차 귀환: 주전 521년 즈음에 제사장 예수아와 왕족 스룹바벨의 영도 하에 이루어졌던 귀환으로 42,350명이 함께 돌아왔는데 세스바살 이후 16년 동안이나 중단된 성전 재건을 학개와 스가랴 예언자가 독려하여 드디어 주전 515년에 스룹바벨 제 2 성전을 재건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③ 3차 귀환: 주전 458년 학사 에스라가 중심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귀환을 말하는 데 이 때, 에스라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오경(pentateuch)을 갖고 귀환했고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영적으로 다시 세우는 일에 공신이 됩니다. ④ 4차 귀환: 주전 445년에 총독 느헤미야가 주도하여 돌아온 귀환인데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총독 신분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보위하는 성벽 재건에 성공하는데 이 일을 정치적으로는 이집트의 공격에 대비한 포석이기도 했습니다. 이 내용을 전제할 때, 느헤미야의 사명은 성벽 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일련의 시대적인 정황을 전 이해하여 살펴야 이해가 되는 본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총독으로 귀환하기 전까지는 바사 궁에서 아닥사스다 왕의 독살을 막는 중요한 직책을 맡은 고위 공무원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주위를 언제나 경호하고 살펴야 하는 분주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포로 출신의 유대인이었지만 통치 국가의 왕의 신임을 받고 출세의 길을 가고 있었던 자였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해 포로 신분이었지만 별로 아쉬울 것이 없던 행운아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아 자신은 바사에서 출세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항상 본인이 유대인임을 명심하고 살았던 역사의식이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항상 그는 조국 예루살렘의 근황에 대해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느헤미야는 자신의 조국 예루살렘에 다녀 온 친척 하나니에게 뜻밖의 우울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고향 예루살렘이 폐허로 버려진 상태로 있다는 비보였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입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느헤미야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어떤 곳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영원한 안식처였습니다. 영원한 신앙적인 고향이었습니다. 아무리 히브리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식민의 백성으로 살고는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유일한 소망이었던 예루살렘이 있었기에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그는 예루살렘 제 2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주전 515년에 재건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불어 제사장 겸 학사였던 에스라에 의해 영적으로도 어느 정도 바로 조국이 세워지고 있다는 소식에 감사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 성읍이 훼파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온 것입니다. 그 성읍이 공격을 받아 불에 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주변 국가가 그렇게 공격했다는 것은 느헤미야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 분명합니다. 해서 느헤미야는 무언가를 결심하고 행동하였음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4-11절이 보고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4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그렇습니다. 느헤미야는 슬픈 소식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보고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으로 맞추어 해석한다면 느헤미야는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도라는 대가를 지불하려면 반드시 공감해야 하는 대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 비정상적인 영적 상태에 대한 1인칭적인 아파함이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니의 비극적인 보고를 받은 뒤에 수일 동안 울었다고 했습니다. 본문 4절에 ‘울고’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바카’를 70인 역에서는 마태복음 26:75절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통곡하였다.’고 기록한 단어 ‘에클라우싸’와 동일한 단어로 기록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느헤미야가 하나니의 보고를 그냥 운 것이 아니라 통곡하며 울었다는 말입니다. 왜 그는 이렇게 통곡을 했습니까? 조국 땅에서 일어난 일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닌 영적으로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통곡의 아픔 때문에는 그는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대가를 지불한 느헤미야는 적어도 조국 땅 예루살렘에서 작금에 일어난 비극적인 일에 대한 이유를 살피다가 마음이 심쿵 할 정도의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본문 6절을 주목해 주십시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 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 하여” 무슨 말입니까?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느헤미야는 선조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고백하고 있는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사실 엄격한 의미로 말한다면 느헤미야는 포로 2세였기에 이스라엘의 성읍이 훼파된 것에 대한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 하여” 지금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아픔에 대한 1인칭적인 적용은 느헤미야의 이 기도가 참으로 중요한 기도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교과서적인 실례입니다. 오늘 느헤미야의 이 통곡의 기도를 이렇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지난주, 굿모닝 정형외과에 비타민 D주사를 맞기 위해 다녀왔습니다. 3개월 한 번씩 맞아야 하는 주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사 처방을 받기 위해 원장실에 들어가 지난 3개월 동안의 이런 육체적인 바이오리듬에 대한 진단을 받고 처방전을 받았습니다. 이 원장께서 처방전을 써주고는 꼭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안수 기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기도 부탁을 받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간절한 마음으로 강복했습니다. “하나님, 거룩한 믿음의 욕심으로 기도를 받는 원장님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게 해주시고, 병원에서 치료하는 일체의 환자들이 치료되는 귀한 병원이 되게 해주십시오. 더불어 원장님에게 하나님의 지속적인 돌보심이 인격적으로 임하게 해주십시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제가 반드시 첨가하는 기도문구가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하옵소서!”입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한다는 말은 정말로 중요한 기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의 1인칭적인 교제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우리의 참회기도, 자백기도, 회개기도도 마땅히 1인칭적인 인격적인 기도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복은 1인칭으로 임하기를 원하면서도 회개의 기도라는 부담스러운 기도가 복수적인 기도가 되거나 3인칭적인 기도가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내 기도는 “하나님!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보다는 “내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나 1:12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잘 아시는 것처럼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하다가 배 안에서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런 위기가 왜 임했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뽑혔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즉각적으로 이렇게 반응한 것입니다. ‘나의 연고니라’ 그렇습니다. 요나는 지금의 풍랑이 자기 때문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철저한 1인칭적인 적용이었습니다. 요나는 1인칭적인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이렇게 1인칭적인 대가를 지불한 요나였기에 그는 이어지는 2장에 기록된 위기의 순간에 이런 진정성이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 2:1-9절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중략)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요나의 이 기도의 주어는 철저히 1인칭 단수입니다. 느헤미야는 민족의 아픔을 1인칭의 아픔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이기기 위해 철저한 개인적인 기도라는 대가를 지불하였고 그 결과 느헤미야는 그렇게도 꿈에 그렸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기회를 거머쥔 뒤에 다시는 외부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을 성벽 재건을 완성하게 됩니다. 2) 대가를 지불하는 기도는 유불리를 계산하지 않고 기도한 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본문 7-10절을 읽겠습니다.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만일 너희가 범죄 하면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 이들은 주께서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들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그렇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언약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그 약속은 여전히 유효함을 하나님께 확인하며 기도했습니다. 모세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흩기는 하겠지만 다시 회복을 시키시겠다는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의 내용이 이제 느헤미야 자신에게 해당되는 언약임을 확신하고 기도했다는 점은 놀라운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약을 붙들고 기도했던 느헤미야는 본문 마지막 절 11절에서 위대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11절을 주목하십시다.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잘 해석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비보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결단을 합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어렴풋하게 있습니다. 바보들은 언제나 결단만 하다가 끝난다고. 하지만 느헤미야는 바보처럼 결단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저 황폐한 땅 예루살렘으로 내가 가야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자신이라도 가서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결단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의 술 관원이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닥사스다의 허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의 기도문으로 “아닥사스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끝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한 대로 자기가 그 일을 이루는 도구가 되겠다고 행함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느헤미야의 의지가 어떻게 느껴집니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느헤미야는 지금 바사의 수산 궁에서 최고의 안락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건이라고는 하나도 되어 있는 것이 없는 불모지입니다. 더군다나 그 곳에는 거민들이 공격과 위험도 있었습니다. 우리기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참으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 곳에 누가 가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 곳에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악의 중보를 위해서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행동으로 자신이 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 기도마저도 자신의 유리함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음을 압니다. 기도도 자신에게 손해가 되면 그 기도를 합리화시킨다는 말입니다. 그건 기도가 아닙니다. 차준희 교수가 쓴 기도법칙을 보면 예레미야 예언자의 기도를 소개하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기도는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입보다 손과 발로 드러나는 삶을 주목하십니다. 기도는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더불어 하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 기도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무모한 울부짖음에 지나지 않습니다.”(차준희, “기도법칙”, 교회성장연구소,pp,155-156.) 친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20세기의 선지자로 불리는 아이든 토저는 이렇게 현대인들의 기도에 대하여 비판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세상적이고, 얼마나 세속적인가! 그들은 가구, 텔레비전, 야구, 축구, 골프, 자동차, 호화주택 그리고 정지 이야기를 한다. 천국과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저를 더욱 가까이 이끄소서! 더 가까이 이끄소서! 라고 기도한다.” (아이든 토저, “GOD”, 규장, p,245.) 어불성설도 이런 어불성설이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기도의 진정성이 있는 대가 지불에 망설이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께 진정성이 있게 기도했다면 그 기도의 응답에 따라 하나님을 저울질 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은 응답은 언제나 하나님의 식으로 완벽하게 응답하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다. 그 응답이 내게 손해가 되어 보여도,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하심을 믿으십시다. 그게 대가를 지불하는 기도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주 철원평화교회 집회를 기도해 주셔서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너무 추운 날씨였고 많은 눈이 내렸지만 준비된 교회 부흥회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습니다. 첫째 날, 저녁 집회를 마치고 교우들과 인사를 하는데 집회 내내 예배당 뒤에서 훌쩍이던 성도가 인사하는 차례가 되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40대 중반 즈음의 자매가 저에게 눈이 충혈 된 상태에서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이 집회에 나오기까지 많이 망설였는데 하나님은 제가 실수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주신 말씀대로 살아보겠습니다.” 그 날 설교는 축복을 쏟아내는 설교가 아니라 똑바로 살라는 메시지가 주제인 까칠한 설교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말씀대로 살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교회가 기도에 집중하려는 역동이 있습니다. 말씀에 움직이지 않는 성도들까지 제가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지난 수요일, 말씀에 움직이려는 성도들이 보여 나름 감사했습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1인칭적인 하나님의 아파하심을 더 많이 느끼는 감동의 중보자가 되기를 바라며, 동시에 기도를 드린 대로 살겠다고 다시 한 번 결단하는 지체들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대가 없는 기도의 승리는 없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님이 흘린 눈물은 십자가의 무거움이 아니라오 우리의 무지함으로 아파하시며 흘리신 눈물이었소 골고다 그 언덕길을 우리 위해 걸어야 했던 그는 비난과 손가락질에 물과 피를 흘려야 했건만 험난한 주님의 십자가 몹시도 무거웠건만 우리의 비난과 채찍에 제물 돼야 했던 주님의 아파하심으로 나 구원 얻었으니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이 한 몸 받치리다 당신은 알고 있나요 죽음으로 사랑을 하신 것을 우리의 주님께서 자기 몸 다하여 죄인을 사랑 하신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