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기도 외에 대안은 없습니다. 본문: 빌립보서 4:6-7 서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그 지난했던 40년 동안의 광야 유랑을 마치고 요단을 건넜습니다. 더불어 그토록 꿈에 그리던 가나안 여리고에서 첫 유월절을 맞이합니다. 여호수아서 기자는 그때의 격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5:10-12절입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가나안에서의 첫 유월절 이튿날에 그곳에서 수확한 농산물로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으며 절기를 지켰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가나안의 첫 소출로 먹을 수 있게 되자 40년 간 광야에 내렸던 애증의 내용이었던 만나가 그쳤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왜 이 내용을 굳이 여호수아서 기자가 여기에 기록했을까?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광야 40년 동안의 삶과 생활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돌보심이 능동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였음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가나안에서의 삶은 반대로 너희들 즉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직접 만나를 찾으면서 살라는 의미이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은혜를 찾으라는 메시지 말입니다. 그래야 살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 말입니다. 재 강조하지만 은혜의 만나를 주님이 광야 40년 동안 당신의 백성들에게 말 그대로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광야는 그래야 했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온 날부터는 너희들이 만나를 스스로 찾으라는 주님의 독촉이 선포되었습니다. 마땅히 주님이 권하실 수 있는 내용입니다. 스스로 만나를 찾아 내 나라를 침노하라고 종용하신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저는 마태복음 11:12절의 말씀을 믿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말씀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만나를 찾으라는 은혜의 침노는 과연 무엇으로 가능한 것일까요? 본문에서 찾아볼까 합니다. 본론) 본문으로 교우들을 초대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칭찬한 초대교회 중에 데살로니가 교회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교회 중에 하나였습니다. 비록 교회는 소규모의 교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교회는 바울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며 기쁘게 해 준 교회 중에 하나였습니다. 어느 정도로 바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었습니까? 빌립보서 1:8절이 그 대답을 해 줍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러브스토리가 듬뿍 담겨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그렇다면 바울이 이렇게 칭찬한 빌립보 교회는 완벽한 교회였습니까?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 청년이 담임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는 사랑이 너무 부족한 교회입니다. 서로 미워하고 질시하고 다투기도 하고 너무 형편없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려고 합니다. 부탁이 있는데 목사님이 추천해 주실 수 있는 좋은 교회가 있으면 추천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난 담임목사가 그 청년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런 교회는 없다. 왜냐하면 네가 그 교회를 가면 그 교회는 또 좋은 교회가 안 될 테니 말이다.” 완벽한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빌립보교회도 완벽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빌립보서 4:2-3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립보 교회 공동체 안에 서로 반목하고 있었던 두 자매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입니다. 유오디아가 누구인지, 순두게가 누구인지 빌립보서 내증으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두 명의 여인은 빌립보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여인들로 추측합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여전도회든 아니면 또 다른 모임이든 그 소그룹의 리더 혹은 부 리더 정도가 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두 사람의 사이기 별로 안 좋았던 것입니다. 적어도 이 여인들이 이름 값만 했어도 괜찮은 신앙인이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유오디아는 ‘순조로운 여행’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순두게는 ‘행복한 기회’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 두 여인이 본인들의 이름대로 라이프 스타일을 행하며 살았다면 별로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무슨 문제인지 확실하게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두 여인은 서로 라이벌로 살았고, 그 결과 서로가 반목하며 빌립보 교회 공동체를 힘들게 했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의 반목과 더불어 빌립보 교회에 관련한 또 한 가지의 정황을 나누고 싶습니다. 빌립보서는 우리들이 잘 아는 바울의 옥중서신입니다. 아마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잠시 투옥 당했을 때 즉 주후 55년에 이 편지를 썼을 것으로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쓴 이 편지를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 공동체에 전달했다고 설명합니다. 이 때의 정황을 조금 세밀하게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투옥되어 있을 때 에바브로디도라는 빌립보 교회의 형제에게 빌립보 교회의 지체들은 자기들이 서로 모금한 사역(선교) 헌금을 바울에게 전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 요청에 에바브로디도가 수락을 하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그 사랑의 헌금을 받아 바울에게 전달하기 위해 에바브로디도는 에베소로 갑니다. 바울을 만난 사랑의 헌금을 전달하고 돌아와야 하는 데 에바브로디도가 그곳에서 심하게 병이 듭니다. 감옥에 있었던 바울이 에바브로디도 형제를 돌볼 수 없었기에 자기가 쓴 편지에 에바브로디도를 잘 치료해 줄 것을 기대하는 마음을 담아 에바브로디도 인편에 빌립보서를 들려주고 다시 빌립보로 보내게 됩니다. 아마도 이 과정에 에바브로디도에게 빌립보 교회의 영적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바울이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너무 잘 성장하고 있을 것만 같았던 빌립보 교회에 지금 두 가지의 골칫거리가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하나는 3장에 언급되어 있는 거짓 율법주의자들의 침투요, 또 하나가 앞에서 언급한 두 여인의 반목으로 인해 당하고 있는 교회의 시험거리였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어려움을 이기기 위한 목회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세 가지입니다. ① 빌립보서 3:2절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율법주의자들은 개와 같은 존재들이니 조심하고 삼가라는 권면이었습니다. ② 빌립보서 4:3절입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누구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나와 같이 멍에를 멘 동역자에게 두 여인들의 반목을 잠재울 것을 위탁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빌립보 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권한 바울의 목회 방법론이 오늘 본문 6-7절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바울이 권한 목회 방법론을 조금 단순화시키겠습니다. 6절이 무슨 권면이었습니까? 기도하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렇다면 7절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바울의 선포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말씀의 대목에서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받게 됩니다. ※ 교회와 성도에게 있어서 승리의 대안은 기도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투적인 메시지 같지만 오늘은 이 상투성을 저 또한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 성도와 교회가 기도해야 합니까? 6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말할 것도 없이 아멘 해야 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통해 역발상의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본문 6절을 거꾸로 생각하면 이런 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간구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때 생기는 것이 있습니다. 염려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염려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메림나오’는 ‘생각이 쪼개지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정신의학에서 ‘Anxiety disorder’라는 병명이 있는데 바로 ‘불안장애’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비정상적, 병적인 불안과 공포로 인하여 일상생활에 장애를 일으키는 정신질환입니다. 이 장애의 특징이 바로 생각과 정신이 쪼개져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되는 정신병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적용하면 대단히 유용한 적용이 가능합니다. 기도하면 성도가 신앙의 여정에 집중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 분명하게 인식됩니다. 마땅히 신앙의 승리가 이루어집니다. 반면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 정신장애가 나타납니다. 마음이 나뉘고, 생각이 나뉘어 신앙생활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이 의미를 바울은 오늘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교회에서 발생하는 일체의 염려거리, 성도에게 발생하는 이모저모의 생각의 분리나 헷갈림의 원인은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학기에 대학원에서 강의를 할 때, 제자들에게 중요한 책 한 권을 제시했습니다. 현장에 나가는 제자들의 손에 꼭 쥐어주고, 뿐만 아니라 그 책을 쥐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암송하는 것처럼 반복해서 들여다보아야 할 책으로 E.M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입니다. 기도의 사람으로 평생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선 바운즈는 이 책에서 불을 토하는 여러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사역을 맡고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와 그분의 교회를 죽이는 장의사와 마찬가지다.”(p,184) 그는 또 이렇게 불을 토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절대 배우지 못한다. 기도 없는 사역은 결코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 (같은 페이지) 그러면서 바운즈는 이렇게 쐐기를 박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다.”(p, 210) 부인할 수 없는 기도의 황금율과 같은 사자후입니다. 김기석 목사가 ‘거둠의 기도’ 프롤로그에서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가 한 말을 인용했습니다. “아무 데로나 가려는 자는 그 어느 곳도 가지 못하는 법, 그 어떤 항구도 목적지로 삼지 않는 자에게는 바람도 아무 쓸모가 없다.”(김기석, “거둠의 기도”, 두란노, 2019년,p,6.)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세인 교회가 가려는 목적지는 이 땅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삶으로 인해 다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영광의 면류관을 쓰고 궁극적으로 도착하는 것입니다. 마치 존 번역이 ‘천로역정’에서 소개한 크리스천처럼 말입니다. 동시에 우리 모두가 목적하고 항해하는 최종적인 항구 역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야 할 그 하나님의 나라라는 궁극적인 목적과 항구가 설정되어 있는 행운아들임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한 가지 더 거룩한 욕심을 내야 합니다. 그 항구에 잘 도착하려면 바람을 잘 타야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과 세인교회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설정하신 아름다운 목적지로 항해하도록 순풍을 도구로 주셨습니다. 그 순풍이라는 도구가 바로 기도입니다. 누가 기도하지 않습니까? 기도 안 해도 괜찮다고 믿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누가 기도와 담쌓은 자입니까? 그렇게 살아도 살아보니 살만하다고 느끼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기도하지 않아도 살만하다고 여기는 자들은 들으십시오. 오늘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에서 기도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와 별로 큰 차이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나 안 하나 별 차이가 없다고 기고만장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기도한 이후에 눈에 보이는 효과가 그렇게 크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기에 과학적인 메커니즘에 길들여져 있는 오늘의 현대적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상당수 기도의 능력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는 자들이 수두룩할 것입니다. 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유감스럽지만 기도하며 방향성을 곧추 세운 기도의 사람들과는 전혀 비교될 수 없는 것들이 그런 자들에게는 이미 존재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일까요? 이미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단절되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본인만 모르거나 아니라고 버티는 것뿐이라는 비극입니다. 이미 하나님과의 영적인 호흡이 끊어진 자들이 무슨 하나님과의 관계를 운운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왜 교회와 성도에게 있어서 승리의 대안이 기도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늘 설교의 레마로 정했을까요?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20장을 보면 우리는 염려를 주께 맡기고 주님을 바라봄으로 승리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입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현재진행으로 설정한 대표적인 인물 중에 하나입니다. 역대하 20장을 보면 모압과 암몬과 마온이 3개국 연합으로 유다를 침공합니다. 이들 연합군이 엔게디에 모여서 여호사밧 왕을 치러 온다는 전갈을 받습니다. 당시 여호사밧이 이끄는 남 유다의 전력으로는 3개 동맹군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두려웠습니다. 절대로 군사력이나 물리적인 힘으로는 이 싸움에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여호사밧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해서 이 역사적인 보고를 하고 있는 역대기 역사가는 당시 여호사밧의 심리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0:3절 전반절입니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기에 ‘두려워하여’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야레’의 원뜻은 ‘경기를 하다’는 뜻입니다. 어린이들이 자라면서 경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경기를 할 때 잘 잡아주고 치료하지 못하면 심각한 후유증이 나타난다는 정도는 우리 모두가 압니다. 얼마나 여호사밧이 두려웠으면 경기를 할 정도로 두려웠겠습니까? 그런데 여호사밧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믿음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현재진행형으로 맺고 있다는 믿음의 극치였습니다. 다시 역대하 20:3절 전체를 읽겠습니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여호사밧은 두려워하며 경기하는 것으로 본인의 삶을 자포자기(自暴自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갖고 있었던 장점을 살펴보십시다. 그는 여호와께로 낯을 향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의 번역 중에 가장 의미 있게 읽은 번역이 있습니다. 영어성경 NASB 번역입니다. “turned his attention to seek the LORD.”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주를 찾기로 자기의 의도를 바꾸었다.” 내 의도를 주장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무리 믿는다고 떠벌여도 그는 주님과의 관계를 현재진행으로 설정한 자가 아닙니다. 이전에 경험했던 하나님 정도로 믿는지 아니면 운이 좋으면 앞으로 나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겠지! 의 막연함으로 도배되어 있는 자일뿐입니다. 내 하나님께 물러보기로 했다는 여호사밧의 신앙의 극치는 내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지금 나의 삶의 현재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느끼겠다는 위대한 신앙고백인 것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그래서 이 전쟁을 주께 의탁했습니다. 두 구절만 소개하겠습니다. 역대하 20:6절과 12절입니다.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 (6절)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12절)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현재진행임을 설정한 여호사밧에 임한 감동이 무엇입니까? 이 기사의 마지막 엔딩 스토리를 역대기 기자는 제사장 야하시엘의 입을 빌려 이렇게 후대의 독자들에게 보고합니다. 역대하 20:15-17절을 소개합니다.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기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현재진행형으로 설정한 자에게 주어지는 감동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대신 싸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대신하여 이루시는 구원을 우리는 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보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인교회와 함께 하시는 것을 보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겠습니다. 오래 전, 레오나드 레이븐힐은 이렇게 목회자인 나를 타격했습니다. “기도는 전투를 위한 준비가 아니다. 전투 그 자체이다. 의로운 설교자의 뜨겁고 효과적인 기도는 그가 설교단 앞에 서기 전에 이미 마귀를 무장해제 시킨다. 마귀는 설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귀는 기도한 설교자는 두려워한다.” (레오나드 레이븐힐, “하나님의 방법으로 부흥하라”, 규장, p,173.) 이번 주부터 수요 심야기도회가 시작됩니다. 더불어 26일부터는 2020년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을 맞습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특별히 새벽 시간은 기도의 시간으로 영적 체질을 바꾸려고 종은 노력할 것이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종은 기도로 준비해 왔습니다. 수요일에 나오는 성도들에게 이미 사탄의 견고한 진이 파해지는 역사를 위해 기도해왔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기도하는 자들이 승리하도록 중보해 왔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들이여! 종은 2020년 세인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사역으로, 프로그램으로 경험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종이 박차를 가하려고 하는 것은 2020년 세인 공동체를 향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도의 능력으로 맛보려는 것입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공포가 우리 교회도 밀려 닥쳐들었습니다. 신자들이 마스크를 쓰고, 손을 부지런히 닦고, 개인의 청결 유지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질병 예방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에 소홀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적인 건강에 목을 걸면서도 이미 영적 호흡이 끊어진 것에 대하여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29절입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나의 영적인 승리와 교회의 견고한 승리를 가져오는 것은 기도 외에 다른 대안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이 찬양은 제가 주님을 처음 인격적으로 만나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로 드렸던 찬양입니다. 1절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2절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주시고 늘 지켜주시리 후렴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