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 가족은 인격적 관계의 보루입니다. 본문: 에베소서 6:1-4 서론) “어머님, 이번 설에는 친정 갈게요!” 한겨레신문에 실린 90년생 며느리의 이유 있는 설 명절에 대한 반항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준 글을 보다가 시선이 멈추어졌습니다. 저 역시, 모르긴 몰라도 90년 생 며느리를 보아야 할 시아버지 군에 속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가볍게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글을 읽다가 그 기사에 달린 댓글이 웃펐습니다. 몇 가지만 나누어 볼까 합니다. 먼저 90년 생 며느리들의 이런 행태에 대한 냉소적인 글들입니다. “앞으론 결혼하지 말고 각자 집에서 살자. 뭐 하려고 결혼 하냐!” “결혼하지 말고 네가 벌어 살아라.” “새언니에게도 자유를 주시길” “결혼할 때 집 마련도 남자가 하지 말고 같이 하자.” “너는 친정가고 나는 본가간다. 시비 걸지 마라.” “같은 성씨는 본가에 데리고 간다.” 이제는 응원의 글입니다. “90년생 최고” “시어머니에게 제일 듣기 싫은 말- 시누 온다고 하는데 보고 가렴, 극혐” “전 싸주는 시어머니의 음식은 휴게소로 직행” “떡국 말고 떡볶이 먹고 싶다. 나에게 자유를 달라.” “화이팅! 아예 명절을 없애자.” 지금 제가 소개한 90년 생 며느리들의 반항에 대해서 이렇게 사람들의 각자 위치에 따라 반응이 극명하게 갈릴 것입니다. 호불호가 생길 것이라는 말입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댓글들을 읽다가 어떤 경우에는 웃기도 했고, 또 어떤 경우에는 마음이 찹찹해서 씁쓸했습니다. 가족학의 권위자인 유영주 박사는 가족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가족은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고루 겪고 있는 인간과 사회에 대하여 건강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허브로서의 중요한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유영주, 새로운 가족학“ 신정 간,p,3.) 사이언스로 가족을 이해할 때 정의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측면으로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하여 말을 할 때 유 박사의 설명에 2% 부족함의 여운이 보입니다. 영적 측면에서의 가족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고전적인 심리적 기제는 희생해도 괜찮은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형제를 위해 희생을 해도 괜찮았습니다. 왜 가족이니까. 내가 손해를 봐도 괜찮았습니다. 왜 가족이니까. 내가 대신 아파도 괜찮았습니다. 왜 가족이니까. 그런데 오늘의 시대에 가족 개념을 떠올리면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들이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내가 먼저 있고나서 형제도 있는 것이고, 부모도 있고, 남편, 아내, 자식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한 것이 사실입니다. 사정이 이런 데 90년생 며느리가 어머니, 이번 설에는 친정 갈게요! 라고 말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조금 씁쓸한 것이 사실입니다. 90년생이 온다! 라는 책을 읽고 나서 북 리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제 리뷰의 주된 내용은 실은 계층별 책임감을 강조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베이비부머는 베이비부머대로, 90년생은 90년생대로 계층별 책임감이 동일하다고 생각하고 글을 썼습니다. 작가 임홍택은 ‘90년생들이 온다.’에서 90년생의 심리적인 이해 없이 그들과 함께 갈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역설했습니다. 90년생들에게 꼰대 역할을 하는 자는 결코 개방적이며 앞서가는 가는 삶을 살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읽으면서 동의할 부분은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 있음도 숨길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기성세대는 90년생을 이해해야 하는 세대이고, 90년생이 무언가를 요구하면 그것은 타당성이 있는 것이므로 반드시 기성세대는 눈과 마음을 열고 이해하려고 노력해 주어야하는 실체라는 접근 말입니다. 제가 볼 때에는 이런 발상과 요구는 도리어 90년생들이 저지르는 역차별적인 폭력으로 비추어졌습니다. 인간관계는 철저히 상대적인 인격성이 전제되는 관계입니다. 한쪽만의 관계만을 이해하라는 것은 공산주의적인 발상입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인 송호근 교수의 글 중에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소위 베이비부머 세대라는 1955년생부터 1965년생의 이야기를 아주 진솔한 사회학자의 성찰로 풀어낸 양서입니다. 저자는 베이비부머의 가장 독특한 특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자식들에게는 다 해줘야 한다는 무모한 의무감이 있다. 어찌 보면 주제넘은 욕심이다.”(p,44) 제가 1961년생이니까 베이비부머의 한 복판에 있는 사람입니다. 정말로 그런가를 반추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속내를 들킨 것 같다는 소회입니다.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부모세대에게는 의지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한 편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에는 내 자식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고 베풀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생을 달려온 것이 사실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베이비부머들이 가지고 살았을까요? 사회역학적인 접근이나 해석을 차치하고 말한다면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는 것이 자식의 마땅한 도리요,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부모의 모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겠습니다. 그게 가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희생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근래에 들어서 이런 가족의 도가 뿌리 채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유감스럽고 안타깝습니다. 어떻게? 부모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존재이고. 자식은 마땅히 그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어처구니없음이 상식이 되고 있다는 유감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적어도 성서적이지도 않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봅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본문을 보면 분명하게 바울이 제시한 구도가 제일 먼저 눈에 띱니다. 1-3절은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하는 신앙관계적 내용이고, 4절은 반대로 부모가 자식에게 행해야 하는 신앙적 내용입니다. 어느 한 쪽에 일방적인 쏠림으로 바울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쌍방에게 해야 할 내용을 동일하게 권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1-3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자녀들이 부모에게 드려야 신앙적인 행동 강령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순종하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휘파쿠오’의 원뜻은 ‘경청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잘 들어준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가 대단히 적절하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를 존중한다는 것은 그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누군가를 멸시한다는 것은 멸시하는 자가 말하는 일체의 말을 무시하고 듣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공식에 대입해 보면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부모님이 말하는 것을 잘 들어주는 것이 곧 순종이요, 효도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태도를 바울이 본문에서 제시합니다. 2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공경하다.’라는 헬라어 단어 ‘티마오’ 는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부모의 가치가 얼마입니까? 제가 읽은 글 중에 참 감동적인 내용이 하나 기억에 있습니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명화들이 즐비하다고 합니다. 해서 작품마다 그 작품들의 가치가 평가되어 어느 정도의 재산상의 가치가 있는지 감정되어 있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작인 ‘모나리자’만은 평가 금액이 없고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priceless 무슨 말입니까? 값을 매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평가 불가라는 말입니다. 부모의 가치가 얼마입니까? 평가를 한다는 것이 배은망덕한 일입니다. 부모의 가치는 priceless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고, 공경의 도를 다해야 합니다. 자식들이 조금은 불편할 것 같아 이제 또 하나의 숙제로 눈을 돌려 보려고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노엽게 하지 말라’는 의미의 진의는 마음대로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 부모들이 자녀들을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까?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대단히 비 성서적인 생각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시편 127:3절입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성경은 자식이 부모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식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나에게 양육을 위임하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께 되돌려드려야 하는 존재가 자식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자식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본문의 말씀을 앞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하는 관계적인 실천 내용으로 동일하게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무엇입니까? 자식의 말도 잘 들어주어야 합니다. 지난 주간 새벽 성경 통독 시간에 읽은 사무엘상 역사서에 나오는 성경적 내증을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무엘상 20장을 보면 사울과 다윗과 요나단 이 세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울은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른 사건 뒤에 심각한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악신에게 사로잡혀 사위였던 다윗을 정적으로 여겨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죽음의 위기를 피하여 라마나욧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라마나욧으로 쫒아 갑니다. 이것을 안 다윗이 사울의 아들이자 자기와는 둘 도 없는 우정을 쌓고 있는 요나단에게 찾아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의 부당성을 알립니다. 이 일을 들은 요나단이 다윗을 돕기로 합니다.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음모를 알리고 다윗을 아버지 사울의 음모에서 구출하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월삭의 날 가족 식사 시간에 다윗을 죽이려는 음모를 갖고 있던 사울이 그 자리에 다윗이 없는 것을 보고 아들에게 묻습니다. 왜 다윗이 보이지를 않느냐? 그러자 요나단이 이미 다윗과 약속한 대로 다윗이 제사를 드릴 일이 있어서 베들레헴으로 보냈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 때 사울이 아들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지면서까지 대노하면서 야단을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무엘상 20:30-31절입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도전이 임했습니다. 다윗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전적인 사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야 사울이 죽어야 요나단이 왕위를 이어 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들 요나단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자기는 왕위를 계승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왕위를 이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자는 다윗이라고 믿었습니다. 단지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내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사울은 요나단이 내 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들을 힘으로 제약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울이 불행해진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예수께서 12세가 되는 유월절에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가 제사를 드리고 내려오는 길에 아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사흘 동안 염려함으로 아들을 찾다가 성전에서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대화하며 논쟁하는 아들 예수를 찾았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에게 우리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느냐고 핀잔을 주자 아들 예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2:4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자 이어지는 누가복음 2:50-51절은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맨 처음에는 아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깨닫지 못했지만 하나의 여운을 마리아가 남겼음을 누가가 보고합니다.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KJV 번역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His mother kept al these sayings in her heart.”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속에 간직했다.) 자식의 말을 경청하는 것, 그것은 자식을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설 명절 끝날 주일에 저와 여러분이 가슴에 새겨야 하는 은혜를 한 가지 정리하고 설교를 맺도록 하겠습니다. 가족이 무엇입니까? ※ 가족은 이 땅에 존재하는 공동체 중에 가장 인격적인 관계의 보루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바꾸겠습니다. 가족은 철저한 이타적인 공동체이어야 한다고. 누가복음 15:20절입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그림 두 개를 보겠습니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입니다.
위의 그림은 전체 그림이고, 두 번째 그림은 아버지가 탕자를 감싸 안은 그림을 확대한 것입니다.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하단에 있는 아버지의 손입니다. 왼쪽 손은 농사를 지었던 거친 아버지의 손입니다. 그러나 오른쪽 손은 여성의 손 즉 어머니의 손입니다. 렘브란트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요? 탕자를 환영해 준 아버지의 사랑은 부성과 모성이 어우러진 사랑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식을 부성과 모성으로 품어주는 유일한 공동체는 가족 말고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족은 이 땅에 존재하는 공동체 중에 유일하게 인격적 관계를 이루는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당신의 아버지가, 어머니가, 그리고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직시하고 깨달아야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가족을 비인격적 공동체로 만들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계산하는 공동체로 가족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주판알 튕기는 공동체로 가족을 전락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21세기 반드시 이루어야 할 가족 공동체의 방향성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런 시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며느리에게 계산하지 않은 시아버지. “아버님, 이번 설에는 친정 갈게요.” 그래서 그런지 이런 며느리는 사양합니다. 하지만 이런 며느리는 환영합니다. “아버님, 이번 설에는 친정부터 먼저 다녀올게요.” 얼마든지. 내 며느리와 아들은 일 년에 두 번 있는 명절에 시댁과 처가를 기쁨으로 갔다가 오는 가족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은 이 땅에 존재하는 공동체 중에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는 최고의 극점이자 보루입니다. 남은 설 명절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동요 한 번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