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19일 주일 낮 설교 제목: 성령께서 기름 부으시는 지성이 있는 교회 (3) 본문: 고린도전서 2:1-5 서론) 지난 주간, 제천에서 청소년들을 섬기며 찬양 사역을 하고 있는 젊은 전도사님 한 명이 저를 찾아 왔습니다. 어줍지 않은 목회 선배에게 이런 저런 들을 것이 있나 싶어 거룩한 욕심을 낸 것이지요. 함께 대화를 하다가 그 전도사님이 이런 전언을 해 주었습니다. 본인은 감리교단에 속해 있기에 연합 집회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류의 집회는 대단히 정치적이고, 사람 중심적이라서 많이 씁쓸하고 유감스럽다는 전언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화가 나는 일은 집회에 정치적인 색깔을 갖고 참석한 내빈을 소개하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 왜 사람을 소개해야 하며, 왜 그에 대한 정치적인 입지를 세워주어야 하는지 정말로 속상하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가 그래도 목회 선배에게 무언가를 듣기 위해 찾아온 이제 막 현장 목회에 들어온 전도사에게 어떻게 격려를 할까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전도사님, 그렇게 잘 배우면 되요. 잘.” 오히려 그 전도사님에 일련의 일들은 반면교사를 삼을 수 있는 너무 좋은 공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선거 시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제철 맞은 정치인들은 아마도 여지없이 우리 교회를 비롯한 제천에 산재해 있는 조직 교회에 찾아와 조금이라도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사력을 다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찾아오는 사람이야 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 교우들은 최선을 다해 종교적 중립을 지키고 결코 선거 시즌에 정치에 휘둘리지 않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주기를 기대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세속의 정치에 휘둘리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론의 기초가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어떤 곳인가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뿌리가 견고하면 결코 그런 망령된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금년 들어 우리가 살피고 있는 교회론에 대한 분명한 공부와 인식은 대단히 중요한 접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2주를 복기 해보십시다. 성령께서 기름 부어주시는 지성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적인 역동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함을 2020년 첫 주일에 선포했습니다. 더불어 지난 주일에는 성령이 기름 부으시는 지성적인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그런 교회는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먹고 마시는 데에 혈안이 된 내 만족을 위한 삶을 사는 백성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의(디카이오수네)를 이루고 평강(에이레네)의 은총을 누리며, 그로 인해 진정한 기쁨(카라)을 느낄 수 있는 신앙의 본질을 붙들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냄으로서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경주해야 하는 교회임을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금년도 우리 교회 표어로 진입하기 위한 마지막 세 번째 신앙의 행동강령을 살피려고 합니다. 본론) 성령이 그름 부으시는 지성적인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 캐리그마(십자가 선포) 신학을 사수하는 교회입니다. ‘캐리그마’라는 헬라어 단어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풀면 ‘설교’ 혹은 ‘권위의 선포’ 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를 사용하던 예수님 사역 당시의 캐리그마는 어떤 것을 의미했을까요? 가장 적합한 성경의 근거는 사도행전 2:22-24, 32-36절에 기록하고 있는 성령 받은 이후 처음 선포한 베드로 사도의 설교입니다. 먼저 22:24절을 만나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그리스도의 죽음)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그리스도의 부활)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중략) 32-36절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그리스도의 부활)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그리스도의 승천)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리스도의 주 되심) 캐리그마가 무엇입니까?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선포요, 설교입니다. 환언하자면 캐리그마 신학은 그러므로 십자가 선포 신학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바울의 고백으로 표현하자면 분명히 2절의 고백을 사수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의 이 고백과 선포를 접하면서 이렇게 바울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자들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소통을 거부한 극단적 폐쇄주의자. 아무리 착각은 자유고, 생각도 자유라지만 적어도 이 정도의 극단적 해석을 하는 자라면 그야 말로 정말 소통 불가의 구제 불능자입니다. 적어도 바울이 왜 이런 강력한 표현을 했는지에 대한 본문 정황에 대한 치열한 고민 없이 문자주의적인 해석에 고착된 전혀 지성적이지 않은 무식한 해석을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지역으로 들어왔던 시기를 신약학자 C,K 바레트는 주후 50년 3월경이라고 진단합니다. 이어 그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거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51년 9월 즈음에 수리아를 향하여 떠났다고 해석했습니다. 또 다른 정보 하나는 다른 여타 신약학자들이 고린도전서 저술 시기를 에베소에서 약 53-55년 즈음에 썼을 것으로 예측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적어도 이 편지를 쓸 때는 자신이 고린도라는 도시에서 겪어야 했던 일련의 모든 일을 경험한 뒤에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썼다는 점에서 이의(異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정보를 통합하면 이런 시대적 정황 이해가 가능해 집니다. 오늘 본문으로 제시된 고린도전서 2장의 바울이 갖고 있었던 영적 정황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 본문 3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세 동사가 보이십니까? 약했다. 두려웠다. 떨었다. 바울이 왜 이리 심약했을까요?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하기 전, 사역했던 곳은 바울에게 있어서 큰 상처를 안겨준 아덴(아테네)이었습니다. 이미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가 주지하여 알고 있다시피 전도여행을 통해 승승장구하던 바울은 아덴에서 예기치 않은 패배(?)를 당합니다. 아덴은 종교성(당시 헬라적 철학을 신봉하는 지성적 우상 숭배, 로마의 황제 숭배, 헬라 지역을 휩쓸고 있었던 영지주의, 신비주의 등등)이 강한 자들이 즐비했습니다. 해서 바울이 제시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대단히 싸늘했습니다. 사도행전 17:32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여기에 ‘조롱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클류아조’는 ‘입을 삐죽대며 빈정거리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자 믿을 말을 하라고 빈정댔다는 말입니다. 웬 미친 자가 말하는 실성한 말로 폄훼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가 참으로 비참했음을 이어지는 사도행전 17:33-34절이 보고합니다.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바울은 몇 몇 사람들이 보인 긍정의 반응을 뒤로 하고 아덴을 떠났다고 누가는 증언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패배하고 도착한 곳이 바로 아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시 고린도였습니다. 그런 심정으로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그는 혈혈단신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돕는 자가 없었습니다. 전혀 연고가 없는 이 땅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외딴 섬에 유배된 것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바울의 참담함과 더불어 그를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게 만들었던 또 한 가지의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고린도에 첫 발을 디딘 바울이 고린도라는 도시의 제반적인 영적 상태를 직면하고는 이곳에서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도무지 스스로 이겨 나아가기가 쉽지 않은 곳임을 직감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당시 헬라 지역에 만연했던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즉 미의 여신인 비너스 신을 섬기는 큰 신전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더불어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도시에는 아폴로 신전까지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폴로 신은 태양의 신이었지만 동시에 그는 남성미를 상징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를 섬기는 이방적인 종교성들이 고린도에 가득하였기에 남성들은 육체를 탐미하는 잡류들로 항상 들끓었고 이 현상은 고린도로 하여금 동성애가 가장 활성화된 지역으로 발돋움하게 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고린도는 당시 최대의 항구 도시였습니다. 항구 도시의 특징은 현금 통용이 활발하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상업적으로 경기가 활성화되어 있어서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들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바른 삶을 사는 자들이라면 경제적인 부가 도리어 큰 자산이고 나눔의 도구들이었을 텐데 고린도의 상황은 정반대였습니다. 고린도와 별 반 멀지 않은 아테네 사람들이 연극을 할 때 그들만의 고유한 상징어를 만들어냈는데 ‘문란하다.’, ‘간통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던 단어가 ‘코린티아제스타이’ 였습니다. 번역하면 ‘고린도사람처럼 행동하다.’라는 단어입니다. 당시 고린도 사람들이 얼마나 방탕한 삶을 살았는지를 고변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고린도는 영적으로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이런 고린도에 바울이 도착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다시 3절을 의미 있게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사정이 이 정도이라면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 정서상 맞습니다. 3절만 놓고 보면 바울은 당연히 고린도 사역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단한 반전이 오늘 본문 나머지 구절에 담겨 있음에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린도의 정황으로 볼 때 고린도적인 세속의 풍성한 말잔치, 언어의 유희, 그리고 고린도라는 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헬레니즘의 총아라고 하는 소피아(지혜)로 하나님을 증거 하지 않았다고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며 전합니다. 그러면서 본문 4-5절에서 바울이 사용했고 의지했던 영적 무기를 그들에게 다시 복기합니다. 무엇이었습니까?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렇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무기는 성령의 나타나심,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런 무기를 사용하여 고린도 사역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요? 그 선명한 답이 오늘 본문 2절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본문을 오늘 설교 제목으로 바꾸겠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사역을 승리로 견인할 수 있었던 무기는 캐리그마 신학의 사수 즉 십자가 신학의 사수였습니다. 바울은 무식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주후 1세기 석학 중에 석학이었습니다. 그는 최고의 출신 성분도 갖고 있는 특혜 받은 자였습니다.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시대적 하드웨어는 대단히 강력한 무기였고 물리적인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인이 태생적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획득한 일체의 유리한 세속적 무기들을 사용하여 고린도 사역을 승리로 이끈 것이 아님을 본문 2절에서 밝힙니다. 그가 고린도 사역을 승리로 이끈 것은 당시 가장 위험하고 불온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예수가 유일한 그리스도라는 사실과 그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끔찍한 사실을 붙들었다고 선포합니다. 이런 어리석은 객기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에게 가장 위험한 인자였던 것을 천명하고 붙들었다는 본문의 선포는 오늘 이 글을 읽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벼락과 천둥소리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시인은 순교를 각오한 고백입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다시 말해 사형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나도 그 십자가를 지겠다는 단호한 의지 표명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얼마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존재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선포하더니 전례에 의하면 결국 로마에서 그 예수 때문에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결론만 놓고 보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꽃길 인생을 망친 허망한 삶을 산 사람이라고. 정말로 그렇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바울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없었다면 이 땅에 지금 기독교가 존재할 수 있었겠냐고 반문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께 이루시기에 바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바울의 영향력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에 저는 지지를 표합니다. 문동환 박사 같은 바울 비평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바울의 신학은 삶의 경험에 바탕을 둔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사고에 뿌리를 둔 관념에 불과하다.”(문동환, “예수냐 바울이냐”,삼인 간,p,13) 문 박사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한국교회가 예수보다 바울을 위에다 두려는 해석과 평가에 대한 강력한 비판 때문입니다. 바울주의자들의 행보 중에는 바울을 예수보다 더 위대한 존재로 평가하려는 어불성설이 있습니다. 저 역시 이런 시도에 대하여 조금의 여지를 두지 않고 반대합니다. 동시에 바울이 말한 여러 가지 편향된 시각(여성 폄훼, 찬탈된 국가 권력에 대해서도 순종 등등)에 대해서도 냉철한 비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저는 수용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바울이 갖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기독론적인 신앙고백마저 개인의 의지와 사고라는 공격에 대하여는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바울은 철저한 예수의 캐리그마로 무장한 예수의 사람이었고, 십자가의 신학을 천명한 예수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로 인하야 살았고. 예수로 인하여 죽었던 예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아는 것으로 인해 자신이 알고 있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던 예수의 사람이자 십자가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기름 부으시는 능력을 공급 받아 예수를 증언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던 캐리그마 신학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상의 본문 정항에 따른 해석을 기초로 성령이 기름 부으시는 지성적 교회가 가져야 할 세 번째의 캐리그마(십자가) 신학의 정수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 캐리그마 플러스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어제 읽었던 새벽 예배 성경 강독의 텍스트를 한 구절 소개하겠습니다. 사무엘상 4:5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엘리가 실로에서 제사장으로 사사로 사역할 때 이스라엘의 영계는 만신창이였습니다. 엘리는 가정 목양에 실패한 무능력한 자였습니다. 단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함 이외에 그의 자식들이었던 홉니외 비느하스를 방치하여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아들들로 떨어지는 데 일조한 무능한 자였습니다. 마침 그 때, 블레셋이 아벡에 진을 치고 영적으로 무기력했던 이스라엘을 유린하며 괴롭혔습니다. 아벡 전투에서 4,000명가량의 군사들이 떼죽음을 당한 이스라엘은 멘붕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패배한 것은 엘리의 무능력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패역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였는데 그 영적 민감함을 알 리 없었던 이스라엘의 장로 무리들은 우리가 아벡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는 하나님의 법궤가 전쟁의 현장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론을 내세워 실로에 있었던 법궤를 전쟁터로 옮기는 해프닝을 벌립니다. 이스라엘의 진영으로 하나님의 법궤가 들어올 때 이스라엘은 이미 전쟁에서 이긴 것을 가정하고 큰 소리를 외치며 열광하였다고 사무엘상 4:5절은 증언합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의 법궤가 이스라엘 군대 진영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안 블레셋 진영은 더 강하게 단결하여 전쟁에 나섭니다. 사무엘상 4:6-11절입니다.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우리는 이 구절에서 대단히 중요한 영적 지침과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의 자백처럼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견인하여 자유하게 하셨고 해방시켜 주셨던 하나님의 상징이자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법궤가 도착한 이스라엘은 백전백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법궤가 이스라엘의 진영에 도착한 이후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도착하기 전에 당했던 패배보다 8배에 달하는 더 큰 참패를 당합니다. 무엇을 시사 하는 성경의 교훈입니까? 아벡 전투에 끌려나온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전인격적인 하나님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아벡 들판으로 질질 끌려나온 법궤는 이스라엘에게 유리하고 필요할 때만 사용되던 얼마든지 만들고 또 만들 수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당용 부적에 지나지 않는 도구였습니다. 다시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이스라엘은 아벡 전투에서 하나님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비슷한 그 어떤 플러스를 동원한 종교적 쇼를 벌였다고. 그러면 이길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이런 경거망동이 어디 사무엘 시대만 일어나는 망령된 일이겠습니까? 지난 주일 제가 전한 낮 예배 설교 동영상을 시청한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대학원 제자가 다음과 같은 피드백을 보내주었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12일 설교를 듣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목사님께서 왜 기도하지 않는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기도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믿고, 자판 두드리면 방법이 나오니까, 안 해도 살 수는 있으니까 기도하지 않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어쩌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고 간구하지 않은 이유도 이와 같지 않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하나님의 나라)이 아니어도 살 수 있으니까, 교회 밖에서도 살 수 있으니까, 믿음이 약한 평신도들이나 타락한 목사님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긴장감 없이 들리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 설교에 감사드립니다. 예전 설교랑 연결해서 들으면 더 풍성해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설교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기도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기도라는 말은 결코 말장난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기도를 대치할 수 있는 영적 대안은 1도 없습니다. 왜 성도가 기도하지 않습니까? 기도보다 기도 같은 것과 동행하니 살 만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기도보다 권모술수를 부려서 돈을 더 많이 벌면 기도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학문적인 습득을 통한 지식이 기도를 안 해도 살게 해 주는 것 같고, 정치적인 줄을 잘 서면 출세 길이 열리지 기도가 출세를 보장하는 것 같지 않기에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도리어 기도 같은 것에 목을 매는 것입니다.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를 한 미국의 복음주의자로 이름을 떨쳤던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는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충분하심을 굳게 붙들고 결코 거기에서 아무 것도 더하거나 빼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해졌다. 그리고 아무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분리할 수 없다.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한가?”(존 맥아더,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한 기독교”, 부흥과 개혁사,p,193.) 그렇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참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얍삽한 신자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짊어지기 부담스러운 십자가, 그런데 안 짊어지면 왠지 찝찝한 십자가의 대안을 부담스럽지 않을 것으로 만들어 그것을 만족시키며 살겠다는 그 얄팍함으로 변장한 자들이 너무 많은 현대 교회가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장입니다. 분명히 선포하지만 캐리그마의 선포를 기초로 하는 십자가 신학을 대치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십자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유일하게 집중해야 하는 것은 십자가이고 더 집중해야 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당신과 나의 구주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명제입니다. 성령이 기름 부으시는 지성적인 교회는 여기에서 0,1도도 빗나가 있지 않습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호주 몰링 대학교 선교학 교수인 마이클 프로스트가 이탈리아에 있는 바티칸에 방문해서 남긴 글을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나는 대리석이 깔린 성 베드로 대성당 바닥 위를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정처 없이 걸어 다니고 있는 가난하고 조롱당하는 갈릴리의 한 목수를 상상하며 거의 울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을 따르라고 부르셨다. 바티칸 박물관의 그 모든 화려한 중세 미술품과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벌거벗긴 채로 굳어 버린 자신의 피를 뒤집어쓰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분의 손에는 주교의 직을 나타내는 관도 지팡이도 그리고 권력을 상징하는 그 어떤 상징물도 없었다. 그 분의 빈 손에는 그 분을 십자가에 매달기 위한 엄지손가락 굵기 만한 대못만이 박혀 있을 뿐이었다.”(마이클 프로스트,“위험한 교회”,SFC,pp,145-146.)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토설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는 또 이렇게 역설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만으로 충분한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주님만이 당신과 나의 주군이십니다. 이것을 선포하는 성령이 기름 부으시는 지성적인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무엇이 변치 않아 내 소망이 되며 무엇이 한결같아 내 삶을 품으리 그 누가 날 만족케 해 내 영이 쉬며 그 누굴 기다려 내 영이 기쁘리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아래 내 소망이 있네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아래 내 생명이 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