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령께서 기름 부으시는 지성이 있는 교회(1)
본문: 요한복음 16:13
서론)
저는 오늘부터 3주 동안 금년 우리 교회 표어를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 니다.
‘성령께서 기름 부으시는 지성이 있는 교회’
교우들은 이 표어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표어의 진의가 어떤 무게를 갖고 있는지를 아는 담임목사는 대단히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표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제를 2020년 세인 공동체의 목표로 세운 이유는 단 한 가지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슨 전개인가?
궁금하실 교우들이 있을 줄 압니다.
성령께서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교회적인 용어로 많이 사용하는 상용어이기에 혼돈스럽지는 않겠지만 문제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문구일 것입니다.
성령이 기름을 부어야 지성이 있는 교회가 된다는 의미 말입니다.
저는 이 문제 제기에 답하기 위해 오늘부터 3주 동안 주일 낮 예배 설교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적인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교우들과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2020년 세인 교회가 세운 표어에 대한 실질적인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령이 인도하시는 이끄심을 기대하며 부족한 지성에 대한 견인하심을 요청할 것입니다.
본론)
우리 교회 금년 주제절인 오늘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사도 요한을 통하여 분명히 강조하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락방에서 행하셨던 설교 즉 다락방 강화(講話)의 한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진행된 세족 목요일 강화에서 대단히 주목해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오심이라는 화두였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역을 마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되면 내 역할을 대신 할 성령의 임재를 약속합니다.
요한복음 14:16-18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주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너희에게 올 것이라고.
그 보혜사는 너희들과 함께 할 것이고, 너희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요한복음 14:26절은 이렇게 제자들과 오늘 성경을 읽는 우리들을 위로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들을 가르쳐 주시는 영이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것들을 생각나게 해 주시는 영이라고 확언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26절은 성령 하나님이 오시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사역을 이어 받아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구원 사역에 대한 계승은 물론 연속적인 사역의 계승이 이어질 것을 보고합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그런 뒤에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결정적으로 선포하십니다.
다시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의 별칭을 제자들에게 14:16절과 15:26절에 이어 본문에서도 다시 사용하시며 성령 하나님의 정체를 알려줍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진리의 성령”이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진리’(알레데이아스)는 ‘기독교의 본질 혹은 사실’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내주하심과 일하심은 한 가지의 공통분모를 유지하신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의 필요충족 조건이 바로 ‘본질’이라는 점에서 엇나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결코 성령 하나님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고, 세상에서 선포하셨던 본질의 내용에서 빗나가는 일을 허용하지 않으시는 영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3주에 걸쳐서 교우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그 첫 번째의 본질적 내용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 사도행전적인 역동이 일어나는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 테마를 말씀드리면 제일 먼저 저에게 떠오르는 슬로건이 있는데 ‘ACTS 29’입니다.
이 슬로건을 쉬운 말로 풀자면 ‘사도행전 29장을 쓰자.’ 정도가 될 것입니다.
참 멋있는 슬로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유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점을 저는 지적하고 싶습니다.
사도행전적인 역동적인 역사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이미 전제하거나 학습되어 있는 상태는 거의 대부분 기적이나 신유에 관련하여 말한다는 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도행전에 소개하고 있는 사역 중에 상당수 사도들이 일으켰던 기적이나 이적 혹은 병 고침의 역사라는 블랙홀에 이미 우리들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광의(廣義)의 측면에서 접근하면 제 스스로가 보수적인 목회관을 갖고 있어서 그런지 부정할 수 없는 대목이라는 점에 저 역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진리의 성령께서 기름을 부으셔서 성령 하나님의 역동이 충만한 교회를 지성적인 교회라고 정의한 이유는 전혀 다른 스펙트럼 때문입니다.
어떤 스펙트럼일까요?
그것은 성령 하나님을 내가 조작하여 일하게 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전적으로 일하시도록 그 분의 인격적인 활동의 여백을 만드는 교회라는 해석입니다.
어렵지요?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누가복음 7:36-50절의 세계로 교우들을 초청하겠습니다.
성경의 이 단락은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바리새인의 집에서 발생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기사입니다.
예수께서 시몬의 초대에 응하셔서 그의 집에 들어가 식탁 공동체에 참여하셨습니다.
바로 그 때 그 동네에서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시몬의 집에 들이닥칩니다.
그녀는 시몬의 집에 들어와서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는 자기의 머리털로 닦고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신 뒤에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고 누가는 보고합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이 일의 후폭풍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제일 먼저 민감하게 반응한 자는 시몬이었습니다.
시몬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한 것은 사실은 예우 차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바리새인들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행하는 예수의 행동에 대하여 책잡기 위해 초청한 식탁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죄를 지은 여인(아마도 창녀라고 해석하는 것은 당시 기득권층의 해석이지만 나는 그녀가 남성적인 가부장적 사회에서 경제적인 자립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성적인 매매자로 설 수 밖에 없었던 피해 여성이라고 해석한다.) 한 명이 감히 종교적인 기득권의 수호자로 등극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올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갖고 들어와 돌발적인 행동을 한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7:37-38절입니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적어도 이 여인이 행한 일이 불결한 행동이며 율법에 저촉된 행동이라는 사실을 예수라는 존재가 캐치하지 못했다고 시몬과 그의 집을 둘러싼 또 다른 바리새인들은 확신했습니다.
이것은 바리새파들의 눈엣가시거리인 예수 공격의 좋은 먹잇감이 된 셈입니다.
해서 시몬은 득의양양하게 이렇게 예수님을 향하여 비아냥댑니다.
누가복음 7:39절을 읽겠습니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시몬의 나쁜 저의를 보셨던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이렇게 직격하셨습니다.
“채주에게 채무자가가 둘이 있었는데 한 명은 500데나리온을, 또 한 명은 50 데나리온을 빚진 자다. 헌데 채주는 그들 둘 다가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동시에 그들에게 탕감의 은혜를 베풀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채주에게 고마워하며 감사(사랑)하겠느냐?”
시몬은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렇게 교훈하셨습니다.
“시몬아, 너는 네 집에 들어올 때 가장 기본적으로 대우해야 하는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손님을 환대한다는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 반대로 나에게 눈물로 발을 씻었고, 머리털로 닦았고, 발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나를 너보다 더 사랑한 것이다. 이 여인의 죄는 사해졌다.”
이 기사의 마지막 보고를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 7:49-50절입니다.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기막힌 누가의 세심하고도 의도 있는 필채입니다.
시몬과 같은 배를 탄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더욱 경계했고, 예수는 여인의 영혼을 향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했다는 말로 결론을 맺은 것입니다.
나는 오늘 설교자로서 이 예수의 기사를 통해 신년 감사주일에 세인교회에 선포하시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를 들추어 내보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적인 역동이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교회와 신앙인의 자세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원하셨던 것은 은혜를 사람의 잣대로 재단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간의 얄팍한 지식으로 제한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였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영역의 여백을 인위적인 수단으로 제한하지 말라는 선전포고였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일하는 방법은 성령 하나님이 선택하십니다.
사도행적인 역동은 인간이 경험했던 경험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이자 캐리그마 신학자라고 평가하는 칼 바르트는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아주 의미 있는 갈파를 내놓았습니다.
“그 분은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과 우리가 신으로 인해 경험하고, 느끼고, 기도하는 그 모든 것들과도 다르다. 그 분은 모든 인간적 불안에 대한 무제한적인 중지이자 모든 인간적 안식에 대한 무제약적인 전진이다.”(프랑크 엘레, “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새물결플러스 간,p,68. 재인용)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인해 해석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유한한 인간에 의해서 좌지우지 될 정도로 더 작은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절대로 해석될 수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무한의 존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내 감정의 표현대로 내 맘대로 움직이는 로봇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팀 켈러 목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맘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하나님으로 만든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훔친 자”라고.
이제 오늘 설교에 적용하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을 대하는 교회와 성도의 반응은 역시 동일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의 전인격적인 방법으로 일하실 수 있는 믿음의 여백을 우리는 반드시 내드려야 합니다.
그 내드림이 있을 때 사도행적인 역동은 오늘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도 여전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하나님의 역동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도록 내 여백을 내 드리는 것이 무엇일까요?
본문을 다시 읽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렇습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역동하시도록 내 믿음의 여백을 내어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님은 아주 소상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 하나님의 특징이 등장합니다.
주님이 보내신 성령 하나님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분은 오직 들은 것만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할에 대하여 기막히게 해석한 글 중에 이재철 목사의 해석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도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진리 가운데 있다는 것 즉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이재철, “회복의 신앙”, 홍성사,p,109)
저는 이 목사의 해석을 다음과 같이 재해석합니다.
※ 성령이 기름 부으시는 교회와 성도가 성령 하나님께 내드릴 여백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신앙이라고.
그렇습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가 말을 많이 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듣는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엘리야에게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일하심은 불도, 폭풍도, 지진도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에게 조명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말씀하심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9:11-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주목할 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던 이유가 세밀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에 100% 동의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기름 붓는 지성이 있는 교회는 가볍게 말하는 교회가 아니라 듣는 교회이며 듣는 성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캘커타의 성녀인 테레사 수녀에게 찾아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수녀님,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기도의 효용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는 자의 비소 섞인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가 이렇게 그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말하시지 않고 잘 들으십니다. 듣는 게 말씀하시는 거지요.”
이 말을 이해하려면 성령이 기름 부으신 지성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얄팍한 겉멋 든 신앙으로는 결코 이해하지 못합니다.
얼마나 이 시대가 비극인지 아십니까?
들을 말이 없고 할 말만 난무하니까 이제 불특정의 다수가 진정성이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닌 펭수의 말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펭수의 말에 열광하는 오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사로서 유구무언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나는 우리 세인교회가 지성적인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지성이 있는 교회가 아닌 성령께서 기름 부으시는 지성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려면
① 성령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의 인격적 방법으로 일하실 수 있는 믿음의 여백을 남겨 두고 그 분께 그 여백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② 그 여백은 성령 하나님이 여전히 말씀하시는 말씀을 잘 듣는 여백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세인교회는 사도행전적인 역동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지성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
크고 크도다 크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