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다시 주존심(主尊心)으로
본문: 로마서 1:1-4
서론)
한 해를 주의 은혜로 달려온 세인 교회 지체들의 수고와 분투를 주님의 이름으로 격려합니다.
매년 한 해를 마감할 때마다 뭔지 손에 잡힐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조금 더’라는 아쉬움이 밀려오는 것은 아마도 인간이 갖고 있는 불완전함과 무기력함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 이렇게 한 번 즈음은 격려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그 정도면 잘 살아낸 거라고.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主尊心이 있는 교회’라는 표어를 내걸고 달려왔습니다.
저는 主尊心이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철저한 로드십을 인정하는 마음이라고 1월 첫 주에 교우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주존심은 로드십에서 출발한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게 달려온 2019년의 52주째 되는 오늘 송년주일에 어떤 말씀으로 대미를 장식할까를 묵상하다가 ‘다시 주존심으로’ 라는 제목으로 2019년 설교를 마감하기로 했습니다.
왜?
결국 이 마음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 지녀야 하는 성도의 자존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회심 이후 바로 이 마음으로 생명을 걸고 믿음의 경주를 감당한 바울을 무대의 정중앙에 올림으로 함께 은혜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론)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히브리적인 사고를 가졌을까요?
로마서 9:1-3절은 그가 얼마나 뼛속까지 히브리 사람인지 보여주는 좋은 성서의 증거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바울이 여기에서 고백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 히브리 민족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만에 하나 내가 사랑하는 히브리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것이 전제 조건이라면 나는 예수에게서 끊어져도 괜찮다는 극단적이고 도발적인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정도의 민족정신이 있었던 자였습니다.
이 정도의 히브리적인 자존심이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러하기에 바울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로마 교회의 형제들에게 대 서사시이자 편지인 로마서를 기록하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왜일까요?
로마는 히브리적인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적대시될 수 있는 땅이었고, 야웨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방인들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적대시되어야 할 땅인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서라는 편지를 썼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독자인 저와 여러분에 시사합니다.
그 시사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로마서가 있었기에 로마 교회는 물론 오늘의 교회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누구나 인정하는 전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주전, 후 1세기에 로마는 정치적, 군사적 패권국이었고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영원한 제국이었고 강대국이었습니다.
로마가 왜 이런 강대한 제국을 형성할 수 있었을까?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인 시오미 나나미는 제 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에서 다음과 같이 명문을 남겼습니다.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투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졌던 로마인들이 이들 민족보다 뛰어났던 점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방적 성향이었다. 로마인의 진정한 자기정체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이 개방성이 아닐까 싶다.”(p,294)
시오미 나나미가 말했듯이 로마는 개방적인 나라이다 보니 그들만의 종교는 물론 그들이 점령하여 멸망시킨 헬라의 다신교도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기독교도들이 믿는 야웨 신앙도 정치체제를 뒤흔들지 않는 한 나름 개방적이었던 모드였습니다.
물론 모든 황제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바울이 제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고린도에 머물렀던 주후 56-57년까지의 시대적인 상황으로 볼 때 로마에는 이미 교회가 존재하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추측하기로는 로마에는 예루살렘에 불어 닥친 대 박해 때, 팔레스타인에서 헬라와 로마 그리고 갈라디아 지역으로 퍼져 나간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 중에 특히 로마 지역에 정착했던 성도들로 인해 복음이 들어갔을 것이며, 그들에게 이런 저런 핍박이 있기는 했지만 그곳 로마에 교회를 세운 것으로 짐작합니다.
이 로마 교회는 성도 구성 분포도가 아마도 두 종류의 계열이었을 것으로 로마서에 담겨 있는 여 내증들을 통해 추측합니다.
첫 부류는 팔레스타인에서 삶의 거처를 로마로 옮긴 유대교적인 성향이 강한 그리스도이었을 것이고, 또 다른 한 부류는 태생 자체가 로마였든지 아니면 헬라적인 지역에서 탄생했다가 대도시 로마로 이주하여 살다가 회심한 이방적인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던 시기에 로마를 통치하던 황제는 복음서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글라우디오(정확한 명칭으로는 글라우디우스 BC 10-AD 54)였습니다.
그는 재위 시절에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을 추방하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할 수 없이 이 시기에 많은 로마에 살고 있었던 유대출신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로마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이들을 비롯하여 로마에 삶의 터를 갖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어쩔 수 없이 로마에서 추방되어 다시 이방지역에서 살고 있었지만 노심초사하며 다시 로마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날이 온 것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가 사망을 하고 네로가 황제에 즉위하면서 그의 칙령이 해제되어 다시 그들은 로마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정치 역학적인 구도로 인하여 유대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서 축출되었을 때인 주후 49-54년의 기간 동안 로마의 이방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아주 자연스럽게 헤게모니를 거머쥐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로마로 돌아온 유대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빼앗긴 헤게모니를 되찾기 위해서 이방적인 그리스도인과 투쟁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로마 교회 내의 알력이 불거져 적지 않은 분열과 반목이 로마교회에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 교회는 심각한 내홍에 빠졌고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로마교회와 그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로마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대단히 선명하고, 예리한 교리 서신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로마서인 것입니다.
이렇게 대단히 중요한 로마서 집필 동기와 맞물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하는 성경적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집필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울의 개인적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의 내증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로마서 15:19-24절을 읽겠습니다.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바울의 이 선언에서 보듯이 바울의 궁극적인 선교의 땅 끝은 서바나(스페인)이었습니다.
적어도 그는 로마의 황제 앞에 서야한다는 성령의 인도함을 믿고 로마 여행을 계획했지만 그의 선교적인 사명의 끝은 서바나(스페인)이었습니다.
스페인을 영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는 대단히 중요한 선교 전략지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로마 교회의 성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 당시 대형교회였던 로마 교회의 지원을 통해 서바나 선교를 감당하려는 포석이 그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바울은 로마 교회에 공을 들였던 것입니다.
정말로 중요했던 교회인 로마 교회가 자리싸움을 하며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전혀 교회답지 않은 소모전을 벌일 때 그리스도인으로 도대체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서 1-11장에서 기독교적인 교리를 역설했고, 그 교리를 배운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12-16장을 썼습니다.
동시에 사족을 붙였습니다.
나는 너희한테 가기를 심히 원하고 또 로마 교회가 바로 서기를 강력하게 바란다고.
독일 종교 개혁의 始發者였던 루터는 그래서 자신이 쓴 로마서 주석에서 이렇게 선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야말로 신약성경의 중심이요, 가장 순수한 복음서다.”
그렇습니다.
로마서는 엄청난 책입니다.
로마서는 다시 보아도 너무 중요한 책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가 왜 이렇게 엄청난 능력을 소유한 책인가?
저는 오늘 로마서가 이런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 서신이라는 증거를 바울이 편지를 보내면서 선언한 1절 내용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1절에서 저는 바울만이 갖고 있는 주존심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1) 주존심의 기초는 예수가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심에 목을 거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호칭한 단어에서 그것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잘 아시는 것처럼 구약성경에서 약속된 ‘메시아’라는 히브리어의 헬라식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나사렛에 자라난 역사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붙인 것입니다.
너무 잘 아는 것처럼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는 존재는 세 종류가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예수에게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붙인 의미는 예수는 이 세 가지의 직을 다 갖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적인 종교적, 문화적 배경에서 이 세 가지는 대단히 중요한 권위입니다.
유대인들이 인정하는 삼중직의 권위를 갖고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역사적인 인물에게 그리스도라는 말을 붙인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요, 신앙적으로는 대단히 위험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치적인 구도에서도 어떤 의미로 보면 목을 거는 행위였습니다.
로마제국이 막강한 권세로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통치하던 시대에 그리스도는 곧 로마의 황제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황제 이외의 다른 존재에게 그리스도라는 왕의 의미를 붙인다는 것은 그 이름을 호칭한 자는 물론 그 이름이 적용된 자 모두가 반역자가 되는 것이고, 결국 그는 목숨을 유지할 수 없기에 말입니다.
이스라엘 성지 순례 기간 동안 가이사랴 빌립보를 방문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은 흔적만 볼 수 있었던 그 도시에서 일어났던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새삼 저에게 아련히 떠올른 기억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6:16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했습니다.
동시에 그리스도라고 겸손히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압권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 한 구절에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인 팩트가 숨겨져 있습니다.
주와 그리스도라는 호칭의 위험성입니다.
왜 제가 위험성이라고 표현했습니까?
가이사랴 빌립보는 헤롯 필립이 이스라엘 북방 헬몬 산 근처에 해발 약 2,400미터의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 도시는 원래 작은 마을이었는데 헤롯 필립이 로마의 황제에게 자신의 충성도를 보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도시였습니다.
해서 빌립보라는 도시 이름 앞에 가이샤라가 붙어 있는 것입니다.
피 식민의 도시에 가이샤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① 가이사의 위용에 걸맞은 대도시여야 했습니다.
② 도시의 한 복판에 로마 황제를 위한 신전이 있어야 했습니다.
③ 황제의 위상에 맞는 해발이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가이사라는 이름은 세속적인 도시의 절정이라는 말이 됩니다.
바로 이곳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신 질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것처럼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례요한, 엘리야, 그리고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 명이라고 한다는 전언을 예수께 보고한 뒤에, 베드로가 고백한 내용이 앞서 보았던 마태복음 16:16절의 고백이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
목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선언입니다.
재론하지만 ‘주’(큐리오스)는 로마의 가이사 뿐인 시대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로마의 황제에게만 붙일 수 있는 호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호칭을 예수께 드린 것입니다.
주존심이 무엇입니까?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도시에서 행한 베드로의 고백이 주존심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고백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 주존심입니다.
이 주존심 위에 예수께서 세우신 것이 교회입니다.
마태복음 16:18절을 읽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어떤 교회입니까?
부자지간에 세습하는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 까불면 나 한테 죽어! 라고 말하는 정신병자가 목사 이름으로 판 치는 그런 괴물 같은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교회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우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교회였습니다. (I will build my church.)
주존심은 예수만이 그리스도이시고 주님인 것을 믿는 기초입니다.
우리 세인 교회는 또 여전히 늘 그리고 항상 이 주존심으로 세워져 가는 2020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나는 그 분의 철저한 노예임을 인정하는 것이 주존심입니다.
본문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바울은 본서를 시작하면서 발신자인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어필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본인이 계획한 일체의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경주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힙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일체의 단체나 개인에게 적어도 자신을 밝히는 어필의 순간에 해야 하는 것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기 피력이 상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은 대단히 의아한 자기소개를 보고해 줍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당연히 생각해야 단어는 ‘종’입니다.
주후 1세기 로마에는 약 6,000만 명의 노예들이 존재했습니다.
바울이 표현한 ‘종’이라고 번역된 ‘둘로스’는 문자적인 의미가 ‘노예’입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주인들에게 억압받던 물건이었고, 부속물에 불과했습니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최근 발간한 ‘사람, 장소, 환대’에서 노예에 대한 사회학적, 인류학적인 선명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렸는데 의미 있게 읽었습니다.
“인간은 타자의 인정을 욕구한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 인간은 모든 동물에게 공통된 자기 보전의 욕구를 극복하고 이 인간적인 욕구를 따를 때, 즉 타자의 인정을 위해 생명을 걸 때 비로소 인간으로 확증한다. (중략) 최초의 인간 중 한 명은 타자에 의해 인정을 받지 않은 채 타자를 인정해야 한다. 즉 인간은 최초의 상태에서부터 필연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주인이거나 노예다.” (p,59)
그렇습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타자에게 인정받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인정을 받는 일을 저는 인간이 인간 되는 최소한의 인격적 대화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김 교수의 말을 오늘 설교에 적용한다면 노예는 타자에게 인정받지 못한 가장 불행한 인간 같은 물건 즉 무사물이라는 말이 됩니다.
얼마나 엄청난 인권 유린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어필해도 될까 말까 한 자기 소개서에 바울은 자신을 그 많고 현란한 자기 PR의 단어들을 차치하고 인간인데 인간 같지 않은 물건이라고 소개한 노예 즉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소름끼치는 대목입니다.
바울이 바보입니까?
재론하지만 당대 최고의 국가였던 로마에 살고 있던 교회 공동체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기를 인간은 인간이지만 인간으로 타자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물건이라고 말하다니!
바울은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자기를 종이라고 표현했을까요?
그는 이렇게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종은 종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주존심을 가진 성도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존감은 내가 주님의 철저한 노예라는 정체성을 갖는 것에 기초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고 주님으로 수없이 표현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주님은 당신을 스스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43-4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종으로 오신 예수님은 주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단 한 마디도 입을 열지 못하게 하는 비수를 던지셨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비극은 종놈이 주님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다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잘못 배워도 너무나 잘못 배운 것입니다.
크리스천 연합 신문 송년호에 보낸 기고문에 쓴 글의 한 부분을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유명해졌지만 아직은 먹고 살기가 어려워 개인 레슨을 하면서 생계유지를 해야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모차르트가 천재 음악가라는 소문이 자자했기에 많은 피아노를 전공하려는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와 개인 레슨을 요청했습니다. 모차르트는 개인 레슨비를 설정할 때 초보자에게는 레슨비를 저렴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반면 어느 정도 피아노를 치는 자들은 레슨비가 상대적으로 비쌌습니다. 불만을 품은 전공자가 모차르트에게 물었습니다.
“왜 우리 같은 기전공자들이 초보자들보다 더 많은 돈을 내야 합니까?”
그 때 모차르트가 반응한 말은 피아노를 전공하는 자들에게는 불문율과 같은 명언으로 남아 있습니다.
“초보자들보다 잘못 배운 자들을 바로 잡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는 아닙니다. 상당수의 기독교 신자들이 넘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자들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못 배웠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들었던 풍월로 적당히 나를 포장시키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내가 신앙생활을 했어도 몇 십 년을 했는데 내 생각을 꺾을 것 같나? 라고 반문하는 분이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배는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라 이 한 번의 예배를 통해 대박 인생을 터트릴 목적으로 예배를 보는 자가 있다면 당신은 처음부터 다시 신앙의 초보를 걸어야 하는 자입니다. 잘못 배운 왕신자보다 다시 올바른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기 위해 첫 걸음을 띠는 초보 신자가 훨씬 낫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본문 2-4절에서 이렇게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선포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복음은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성결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가 주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주존심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목숨 걸고 증언하며 사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2019년 이렇게 출발했습니다.
주존심이 있는 교회를 만들자고.
2020년이 다음 주부터 시작됩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주존심으로 여전히 무장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기를 목숨 걸고 반대하는 시대에서 예수만이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끝까지 사수하는 2020년이 또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라나타’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땅의 모든 끝 모든 족속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모든 열방이 주께 돌아와 춤 추며 경배하게 하소서
우리 주님 다시 오실 길을 만들자
십자가를 들고 땅 끝까지 우린 가리라
우리 주님 하늘 영광 온 땅 덮을 때
우린 땅 끝에서 주를 맞으리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