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2일 대림절 네 번째 주일 설교 제목: 비정상을 정상으로 본문: 마가복음 12:1-12 서론) 오늘은 대림절의 마지막 절기인 4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난 3주 동안 대림절의 키워드를 살펴보았습니다. ‘자기 비움’ ‘올곧음’ 그리고 ‘이루심’에 대한 영적 의미를 부여하신 사건이 이 땅에 아기 예수께서 오신 사건이며 대림절은 우리도 그런 삶을 살기로 결단하며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임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그 4번째의 시간으로 또 다른 키워드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정상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의 의미를 아주 중요한 팩트로 설명하자면 저는 마땅히 비정상적인 세속의 영역을 정상으로 바로 잡기 위한 행보였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성육신은 정상화라는 키워드를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때 모 전직 대통령이 화두로 끄집어냈던 상용어가 있었습니다. ‘비정상의 정상화’였습니다. 그런데 이 화두가 가졌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비정상의 정상화’ 자체가 ‘비정상’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을 드리려는 것은 이런 말장난의 정상화가 아닌 성경이 제시하는 정상화입니다. 이 의미를 설명 드림에 있어서 본문은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주는 텍스트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 11:15-18절에 기록된 소위 말하는 성전 청결 사건 이후의 후폭풍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제도권 종교의 수뇌부들은 종교적인 권력을 빌미로 안락함의 극치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 본산인 산헤드린 공회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성전 청결 사건에 대하여 대단히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마가복음 11:27-28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산헤드린 공의회를 조직하여 막강한 종교 권력을 무기로 무소불위 힘을 휘두르며 호의호식하던 유대 종교 수뇌부는 자신들의 위치를 흔들려는 예수에 대하여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11:27절을 보니까 ‘성전을 거니실 때’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목숨을 건 혁명 같은 사역을 행하신 뒤에도 그 살벌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다시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셨습니다. 반면, 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 무리들은 산헤드린 종교 공의회에서 대책회의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성전에 들어온 예수님을 향하여 종교적 권위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2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판에는 ‘권위’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실상 더 많이 우리들에게 익숙해져 있는 단어는 개역 성경에 번역된 ‘권세’일 것입니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산헤드린 종교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었던 종교적인 힘을 ‘권세’로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헬라어 ‘엑수시아’를 ‘권세’ 번역한 것은 종교권력자들의 보기 좋은 악한 해석입니다. ‘엑수시아’의 참된 의미는 종교가 미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종교가 타자에게 선한 영향을 주는 공동체가 되어야지 타자를 짓누르는 힘과 권력의 시녀이자 도구로 변질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종교가 타락을 하고 변질 될 때 종교는 나쁜 정도가 아닌 위험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기석 목사가 ‘흔들리며 걷는 길’에서 이렇게 갈파했던 글을 저는 심장에 새겨놓았습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종교처럼 추한 것은 없다. 추하기만 하면 그래도 다행이다. 추할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p,55) 본인들의 힘과 권력을 유지하려는 데에 목을 걸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던 저의가 무엇이었습니까? ‘무슨 권세로 이런 일(성전 청결 사건)을 하는가?’ 에 대하여 주님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요한의 세례 행함을 갖고 그들의 공격에 방어합니다. 마가복음 11:30-32절을 읽어 드립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무슨 말입니까? 요단 강가에서 요한이 사람들에게 주고 있는 세례의 권위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정곡을 찌르시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났다고 하면 종교지도자들은 매우 곤란해집니다. 아시는 것처럼 세례요한은 그들이 예수님만큼이나 요주의 인물로 경계했던 자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자였습니다. 그런 자가 베푼 세례를 하늘의 것이라고 말하면 종교지도자들이 그동안 보여 왔던 행보는 하늘의 권세를 무시했던 일이 되는 셈이 됩니다. 이들의 난처함은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사람에게서 난 것이라고 할 때는 세례 요한을 따르는 자들의 반발이 눈에 보일 정도로 엄청날 것에 대한 예민함이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또 다른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이 세례 요한을 생각하는 절대적 신뢰는 당시 요한보다 늦게 현장에 뛰어든 예수보다 더한 존재로 여겼기에 자신들이 따르는 주군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유대 종교 수뇌부는 할 수 없이 군색한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러자 주님은 나도 너희들에게 내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답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하시며 보기 좋은 1:0의 승리를 거두십니다. 이윽고 주님께서는 이제 오늘 본문을 하나의 비유로 대신하며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결정적 비수를 날리셨습니다. 본문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었다. 정성스럽게 만든 포도원에 울타리를 치고 즙 타는 틀을 만들고 망대까지 지었다. 그런 뒤에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때가 되어 돌아와 농부들에게 포도원의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부리던 한 종을 보냈다. 그런데 농부들은 소출커녕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 포도원 주인은 할 수 없이 다른 종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처음 보낸 종보다 더 심하게 린치를 가해서 돌려보냈다. 포도원 주인은 인내를 하면서 세 번째로 다른 종들을 보냈는데 그 종들 중에 몇 몇은 역시 린치를 당하고 심지어 이번에는 그 어떤 몇 몇 종은 죽임까지 당했다. 인내하던 주인이 생각했다. 이제 남은 사람은 단 한 사람, 포도원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인데 적어도 내 아들은 그들이 존중해 주겠지! 라고 생각해서 보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의 아들이 온 것을 알았던 악한 농부들은 존중은 고사하고 상속자가 왔으니 그를 죽여 아예 이 포도원을 빼앗아 버리자는 마음으로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으로 내던져 시체를 훼손하는 악행까지 감행했다. 사정이 여기에 이르자 인내의 한계를 느낀 포도원 주인은 직접 농장을 방문해서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그 농장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이 내용이 오늘 본문의 비유입니다. 주님은 본문의 비유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대단히 중요하고 비장하기까지 한 마지막 한 마디를 사족처럼 덧붙이면서 종교지도자들을 압박하셨습니다. 주님은 시편 118:22-23절에 기록된 인용문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0-11절입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이 죽여 시체를 훼손까지 한 그 버려진 돌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은 머릿돌이 되게 하심으로 가장 중요한 구원사의 주체로 아들을 사용하실 것이라는 천명을 밝히신 것입니다. 더 오싹한 비수는 그 아들을 버린 자들이 바로 너희들 유대 종교 지도자들임을 직격하신 점입니다. 이제 본문 마지막 12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이 경고성 메시지를 주님이 던지자 예수를 눈에 가시처럼 여겨 그를 죽이고자 마음을 먹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억울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많은 것을 보고 훗날을 도모하며 물러갔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마지막 메시지입니다.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비유를 제가 신학적인 교훈을 얻기 위해 해석하겠습니다. 가장 복음적아고 통상적인 해석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포도원을 만든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포도원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통상적으로 이스라엘 선민 신앙공동체를 말합니다. 농부들은 누구입니까? 그 선민 공동체를 이끌어가도록 세움 받은 유대 기득권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주인의 명령으로 소출의 얼마를 얻기 위해 포도원 농장에 찾아갔다가 변을 당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이요, 신약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아들은 누구입니까? 재론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적용하면 비유의 스토리가 해석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아름다운 선민 공동체 이스라엘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동체를 통해 그들에게 아름다운 열매라는 영광을 얻기 위해 종교지도자들을 세웠습니다. 세우신 주님은 그들에게 열매를 맺는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로 귀하게 성장시켜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잘 성장하도록 일을 위임받은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름다운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격하는 우상 공동체로 변질시키는 악한 농부들이 그들은 종교적인 교리를 만들어 종교의 철옹성을 만들었고 급기야 그것을 이용하여 기득권을 갖고 호의호식하는 직업적이고 상업적인 타락한 종교인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다시 설 것을 기대하면서 구약에서는 그것을 가르치는 수많은 당신의 종들인 선지자,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그렇게 그들을 파송하셨건만 도리어 사악한 선민공동체의 지도자들은 그들을 죽이며 하나님의 뜻을 묵살했습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던 하나님은 이제는 마지막으로 큰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들인 예수를 포도원인 이스라엘 공동체에 보내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적어도 내 아들의 말을 들을 것이라는 순진한 마음으로. 그런데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사악한 유대 신앙공동체의 기득권 종교지도자들은 아예 그 예수를 죽이기로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죽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들 예수를 영접하지 않고 그를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절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여서 아예 밖으로 내던져 버릴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확인사살을 할 것에 대한 천명이었습니다. 이러한 비극을 경험하실 것을 안 하나님은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아들을 죽이고, 보낸 선지자들을 멸시한 자들을 진멸하시는 프로젝트를 반드시 실천하실 것이라는 메시지를 마가를 통해 본문에서 던지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 메시지의 압권은 촛대를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서 다른 신앙공동체로 넘길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 9절을 다시 봅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다른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본문의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해석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계획하신 이방 구원으로 확산될 교회 공동체임을 주장합니다. 여기까지의 해석을 통해 잊어서는 안 되는 대림절 4번째 주일에 주시는 영적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어떤 부분입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① 한 종을 보냈습니다. (2절) ②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4절) ③ 또 다른 종들을 보냈습니다. (5절) ④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습니다. (6절) 여러분은 포도원 주인이 행한 스토리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상당히 많은 분들이 이런 생각을 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주인이 인내하면서 참으셨던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위해 그렇게 참으셨다고. 원론적으로 틀리지 않는 이해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대림 절기에 맞게 다른 각도의 해석을 해보려고 합니다. 한 종을 보냈습니다. 악한 농부들이 그를 때려서 보냈습니다. 비정상적인 행위였습니다.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낼 정도로 더 큰 타격을 주고 그도 돌려보냈습니다. 조금 더 강해진 비정상적인 행위였습니다. 또 다른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두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들 중에 일부는 죽였고, 또 다른 종들의 일부는 타격해서 보냈습니다. 조금 더 강력해진 비정상적인 행위였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아들을 보냈습니다. 결정적으로 주인의 유산을 상속받을 자인 아들을 악한 농부들은 가장 질 나쁜 방법으로 그를 살해했습니다. 아들을 죽인 사건을 이렇게 해석하겠습니다. ※ 비정상을 정상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가장 악한 비정상적인 행위라고. 여기까지만 보면 참 우울합니다. 대단히 참담합니다. 절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다행스럽고 다행스럽습니다. 본문 9절을 다시 읽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주인의 최종적 결단입니다. 앞에서 말한 권세의 의미가 아닌 주군으로서의 권위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 비정상을 정상으로 둔갑시키기 위한 가장 악한 비정상적인 행위를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로 다시 최종적인 정상으로 돌려놓으신 일하심이라고. 우리는 아들을 보낸 포도원 주인이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들을 보내는 희생을 했기에 하나님은 비정상적인 악함의 실태를 정상적인 상황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희생을 전제한 구속사의 과정이 바로 이 땅에 주님이 오신 사건이며 동시에 그 사랑의 의미를 심비에 새기는 절기가 대림절기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구약의 내증을 하나 소개하고 오늘 설교를 정리하겠습니다. 여호수아 7:16-18절을 봅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아이 성 전투에서 참패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심각한 영적 멘붕에 빠졌을 때 하나님이 계획하신 메시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아이 성 전투 패배의 원인을 제비뽑기를 통해 규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대로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제비뽑기를 행하였습니다. 제비뽑기 결과 아이 전투를 패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 뽑히게 됩니다. 그 과정을 여호수아서 역사서 기자는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유다 지파가 뽑혔고 이후에 세라 족속이 선정되었고, 세라 족속 중에 남자 중에 삽디가 뽑혔고, 결국은 삽디의 아들인 갈미가 그리고 그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는 사명자 반에서 이 사건의 의미를 이렇게 적시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말씀으로 범죄자가 아간임을 밝히지 않으시고, 많은 시간과 번거로움을 필요로 하는 제비뽑기를 동원하셨는가? 그것은 패역한 범죄자 아간에게 베푸신 마지막 회개의 기회였다.” (이재철, “사명자반”, p,241) 이 글을 처음 접했을 때, 이 목사께서 주석한 내용을 대단히 감동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내용을 오늘 설교에 인용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엉클어져 있고, 비뚤어져 있으며, 망신창이가 된 이 땅의 수없이 많은 비정상의 질곡들을 다시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해 여러 가지의 방법을 동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양심에 희망을 걸어보시기도 했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율법을 제정해 보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이집트의 바로와 같이 강퍅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거부하기 십상이었습니다. 아픈 마음이 있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비정상으로 망가진 이 땅의 비극을 다시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해서 급기야 아들을 보내시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 아들을 보내시기로 결심한 것은 곧 아들을 죽이시기로 결심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대림 절기는 하나님의 그 절박했던 심정을 성찰하는 기간이자 숙고의 절기인 것입니다. 더불어 성탄절은 주님의 그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내 구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이 비정상화로 변질된 내 자아와 세계를 하나님의 원래의 형상으로 돌이키겠다는 선언의 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차례를 설교를 통해 밝힌 것처럼 성탄은 페루의 참여 시인인 세사르 바예호가 쓴 ‘같은 이야기’에서 말한 그 고백이 내 고백이 되어야 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 내가 나쁘다는 걸 모두들 압니다. 그렇지만 그 시작이나 끝은 모르지요. 어쨌든,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하략)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아주 아픈 날. 결론) 이제 저는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앞 설교에서 주님은 교회 공동체에게 이 땅의 수많은 비정상적인 것들을 정상화시키는 일을 맡기셨다고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로 염려하고 또 염려하는 것은 그렇게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택한 교회 공동체가 다시 유대 종교 공동체를 방불 하는 집단으로 변질되었고, 또 되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우리 세인교회가 개척이 된지 이제 꼭 11년이 되어 갑니다. 제천이 무 연고지였기에 저에게는 대단히 불리한 여러 가지 인생의 상황적인 악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세인 교회를 개척하기로 마음먹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몇 몇 지체들이 갖고 있었던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향한 간절한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지체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천에도 건강한 교회 공동체 하나 즈음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교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제가 힘닿는 대로 동역하겠습니다.” 또 어느 지체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나는 제천이라는 도시에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은 그런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교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성실하게 섬기겠습니다. 약 40여 명의 개척 동역자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목사님이 제천에서 보여준 지난 5년 동안의 캐리그마를 신뢰합니다. 그것 하나면 족합니다. 우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이제는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하고 계셔서 안심이 되는 제가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장로님 한 분께서 거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 하나님이 부르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가 직접 목사님과 함께 하는 개척 멤버는 되지 못하지만 저에게는 정말로 사랑하는 딸이 있습니다. 제 딸을 하나님의 딸로 성장하게 해 주십시오. 그게 저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어떤 권사님이 사임을 발표하고 이사를 준비하는 사택에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의 영적 권위를 신뢰하며 지난 5년 동안 목사님과 함께 달려왔습니다. 그 지난 5년은 평생 잊지 못할 5년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목사님과 정말로 함께 하고 싶은데 아시다시피 제 큰 아들이 성결교회 목사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아픈 마음으로 목사님을 보내지만, 제 둘째 아들 가정을 보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로 서게 해 주십시오.” 작년에 하나님이 부르신 정말로 사랑했던 동생 같았던 집사가 개척 시에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어머님의 결단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그 결단이 다른 사람이 아닌 이강덕 목사님과의 동행이라 행복합니다. 저는 서울에 떨어져 있지만 계속해서 목사님을 응원합니다.” 근래에 우리 교회를 자발적으로 찾아 나온 교우 중 한 분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천에 세인 교회가 있는 것이 얼마나 저에게는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너무 힘들었던 제천에서의 교회 유리시간을 멈추게 해준 세인 교회를 발견해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저는 세인 교회를 사랑합니다.” 세인교회는 가볍게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세인교회는 신이 아픈 것을 가슴에 새기면서 지난 11년을 달려왔습니다. 세인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엄청난 메가 교회를 만들어 종교적인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며 교회만의 안락함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인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적으로 둔갑하여 마치 그것이 상식인양 변질된 괴물들과 투쟁하는 군사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종교 지도자들의 관계를 이렇게 기막힌 성찰로 갈파했습니다. “예수는 진리로 권위를 삼았지만,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권위를 진리로 삼았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들이여! 저는 제 임기 동안 권위가 마치 진리인양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으로 호도하는 일체의 것과 싸워나갈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저를 목사 만든 하나님의 이유이며 하나님의 미션임을 믿기에 타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림절은 비정상적인 일체의 일들을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나는 비정상적인 교회의 일체를 예수라는 진리로 권위를 다시 정상적으로 회복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교회가 세인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예수 하나님의 공의
예수 하나님의 공의 주 독생자 그의 나라 임하시네 예수 제물이 되신 주 영광 중에 그의 나라 임하시네 주의 나라 영원하며 주의 영광 무궁하리 왕의 위엄과 능력이 이제 임하였으니 예수 하나님의 사랑 지혜와 말씀으로 나타났네 예수 거룩한 하나님 영광 중에 그의 나라 임하시네 주의 나라 영원하며 주의 영광 무궁하리 왕의 위엄과 능력이 이제 임하였으니 주의 주권과 주의 통치와 주의 나라 힘과 권세 임하리 예수 하나님의 공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