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일주일 동안 내 눈이 가장 많이 고정되는 것을 나누고 줄여보기를 결단하고 다음 주에 보고하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 예수 닮기를 (복음성가) ● 빛이 없어도 환하게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사사기 16:1-3 ● 제목 : 무엇을 보고 게십니까? 1) 삼손이 그 동안 경험했던 여성 편력을 추적해 봅시다. ● 첫 번째 여인 : 사사기 14장 참고 ● 두 번째 여인 : 사사기 16장 참고 ● 세 번째 여인 : 사사기 16장 참고 |
2) 가사에서 삼손이 죽음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된 물리적, 영적 이유를 되새김질하여 나누어 보자. 3)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오늘 나의 가사 여인은 무엇이고 그렇게 된 원인을 구체적으로 파악해 보자. ● 내가 보고 있는 가사 여인은 무엇인가? ● 내가 그것을 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 어떻게 이길 것인가?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두날개 축제에 참석한 베스트의 정착을 위해 ② 교회학교 여름사역을 위하여 *어린이부: 7월 25(금)~ 27(주일)까지 *학생부: 7월 28(월)~ 30(수)까지 *청년부: 8월 2(토)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수요 셀별 기도회 참석하기 ➁ 담임목사의 이슬비전도편지 태신자에게 전하기 ➂ 여름사역 지원 상의하기 ➃ 여름 음식 함께 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2014년 7월 20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83번째 강해) 제목: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본문: 사사기 16:1-3
사람이 똑같은 한 사건을 바라볼 때 그가 가지고 있는 내적인 내공에 따라 보는 시각의 결과가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성, 감성, 이성에 따라 해석의 차이는 곧바로 직결됩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아주 쉽고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참 비극적 일입니다. 생각하지 않고 무언가를 본다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감각과 말초적인 쾌락만 추구하면서 내가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볼 때 의미 없이 보는 것이 오늘날의 비극입니다. 복잡하고 힘든 세상에 살면서 골치 아픈 것을 보지 않으려는 것이 누구나의 마음에 있습니다. 무엇을 볼 때 생각하며 보아야 하고 의미 있게 보아야 하는 데 오늘 우리 시대는 보는 것을 의미 없이 보게 하는 사탄의 공격에 무방비로 당하고 있습니다. 의미 없이 보게 하는 사탄의 공격에 노출되어 당하고 있는 것도 비극이지만 또 하나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비극은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해석이 없으니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석이 없고 생각하기 싫으니까 제자들의 논문을 가로채고 심지어 대학교수의 미발표 논문을 돈 주고 사서 그것을 본인의 학위논문으로 둔갑시키는 범죄들이 대학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감각의 범죄요 비극인 것입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그는 극단의 자본주의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나타나는 부류가 있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극단의 자본주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오늘의 시대입니다. 오늘의 시대에 나타날 그가 ‘마지막 사람들’ 이라고 명명한 사람들은 “더 이상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만 둔 사람들”이라는 말이 정확할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막 살았던 시대, 누구든지 보는 대로 막 사는 시대, 육체적 감각대로 살며 동성애를 죄로 보지 않는 막 나아감 정도의 이 시대는 과연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는 사사 시대와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오늘 본문은 삼손이 가사에 내려가면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가사는 가드, 아스돗, 에스글론, 에그론과 더불어 블레셋의 5대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가사는 블레셋의 5대 도시 중에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었던 도시였습니다. 삼손의 활동 근거지는 소라와 레히였습니다. 소라나 레히에 비해 가사는 약 60-80km 정도 멀리 떨어져 있던 남부 지역이었는데 왜 삼손이 거기까지 내려갔는지에 대하여는 성경의 내증이 없어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유추가 가능합니다. 본문 1절의 정황으로 볼 때 삼손은 그가 활동했던 먼저의 지역(소라, 딤나, 레히 등등)에서 그가 이미 나실인이라는 신분으로 막 살았던 정황들로 인해 더 이상 정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분위기나 상황들이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조금은 더 자유롭게 방종할 수 있는 익명의 지역을 찾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삼손은 가사에 도착하자마자 거기에 살고 있는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습니다. 본문의 시기적인 배경이 레히에서의 회복과 승리를 경험한 뒤, 얼마만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레히에서의 영적인 정체성을 나름 회복한 삼손이었기에 가사에 이르렀을 때 그에게 맡겨진 영적인 사명인 블레셋을 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하는 관점으로 시선을 돌렸어도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무궁무진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민족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사명의 길로 눈을 돌렸으면 삼손의 인생은 정말로 엄청난 은혜를 경험한 사람으로 자리매김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가 가사에 도착하여 본 것은 ‘한 기생’이었습니다. 기생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조나’는 매춘하는 여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삼손이 그 ‘조나’ 를 보았다고 사사기 역사가는 보고합니다. 그녀를 본 삼손의 반응을 영어성경 BBE에서는 가사에 살던 여인 중에 행실이 나쁜 여인으로 번역하였는데 꼭 직업적인 여성이 아닌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모든 가사에 살고 있었던 여인들의 윤리적 상태가 성적으로 문란했음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그러했기에 삼손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그의 성적인 일탈을 가사에서 만난 한 여인과 즐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삼손이 가사에 들어와 한 행실이 좋지 않은 여인과 하룻밤을 보낸다는 사실의 첩보를 블레셋 사람들이 입수하여 자기들의 원수와 같은 대적자인 삼손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삼손이 아무리 힘이 좋은 장사라고 해도 한 여인과의 정사를 한 뒤 지쳐 있을 것을 예상한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이 깊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 새벽에 그를 급습하여 살해하기로 모의를 한 것입니다.
본문 2절입니다. “가사 사람들에게 삼손이 왔다고 알려지매 그들이 곧 그를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하며 이르기를 새벽이 되거든 그를 죽이리라 하였더라” 삼손은 바로 직전 ‘엔학고레’의 은혜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옛 구태의 죄를 다시 짓고 있는 것이 본문의 기사입니다. 나실인으로서 감히 할 수 없는 죄를 삼손은 반복적으로 자행했습니다. 이제는 장소도 먼 길로 옮겨 또 같은 죄를 자행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이제 하나님도 끈을 놓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본문 2절에 기록된 대로 이제는 블레셋의 사람들에 의해 마땅히 그의 생명을 취하게 해도 하나님은 할 말이 있으셨고 또 하나님은 비난당하지 않는 것이 자명합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충분히 추측 가능한 것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이 삼손을 또 다시 보호하신 사실입니다. 본문 3절에 “삼손이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가지고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삼손은 새벽이 되면 죽을 가능성이 많았는데 잠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밤이 절반 즈음 지날 때에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가사 성의 수중에 들어가서 성문을 지탱하는 문짝과 문설주를 그의 힘으로 떼어내어 그의 동선을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사에서 헤브론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거리적으로 삼손이 이동한 이동거리는 직선으로는 64.4㎞이고 높이는 약 914m 즉 약 1,000m의 해발을 넘는 엄청난 거리를 맨 손이 아니라 문짝과 문설주를 이고 이동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적인 증거들을 인용한다면 삼손이 이동한 거리를 추적할 때 당시 삼손은 블레셋의 삼엄했던 초소 6개를 통과해야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삼손이 가사에서 헤브론까지의 탈출 여정 역시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하심과 도우심이 전제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삼손은 삶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극적인 은혜, 극적인 도우심, 극적인 역전승을 하나님이 거두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지막 인생이 비참한 삶으로 마감해야 했던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 정말로 볼 것을 보지 않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삼손이 보지 말아야 했던 것은 기생이었습니다. 삼손은 딤나의 여인과, 가사의 기생, 그리고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를 보았습니다. 나실인으로서 보지 말아야 할 포도주와, 죽은 동물의 시체에서 나오는 꿀을 보았습니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육체적인 정욕입니다. 그는 결코 보아서는 안 되는 것들을 보면서 살았습니다. 삼손이 보았던 것은 하나님을 대치하는 육체적인 정욕들이었습니다. 삼손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앉아놓고 보았던 우리의 육체의 정욕은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내십시오. 성도에게 있어서 가사에 살고 있었던 기생은 무엇입니까? 젊은이 여러분! 니콜라스 카가 말한 일체의 인터넷 네트워크가 여러분의 기생입니까? 지금 그것을 보고 있습니까? 영적으로 살고 싶다면 ON 스위치에서 OFF 스위치로 절반을 시도하십시오. 장년 성도 여러분! 죽고 못 사는 물질이라는 맘몬을 오늘도 하나님보다 더 많이 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분명히 선포하지만 그 물질이라는 맘몬을 놓지 않고 보고 있는 그 때의 모든 시간 안에서는 결코 여러분은 영적으로 승리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맘몬이 여러분을 죽이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남성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자리에 이 땅에서의 안주함과 편리함과 넉넉함이라는 기생을 앉혀 놓고 있습니까? 우리가 추구하는 이 땅에서의 안주함과 편안함과 넉넉함에 여러분의 초점을 빼앗겼다면 돌이키십시오. 그것들은 반드시 들의 풀과 같이 시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바울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14;17) 미국 뉴스프링 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는 페리 노블은 12세부터 시작하여 6년 동안 포르노그래피의 노예로 살았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살면서도 전혀 죄책감이나 죄의식이 없었고 포르노를 보는 것이 일상이며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지내다가 포르노를 단절하고 끊게 된 것이 누가 가르쳐 주어서가 아니라고 아주 단순하게 그러나 진솔하게 고백하기를 “내가 포르노를 끊게 된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보면서부터였다고.”답했습니다. 포르노를 본 것은 예수님을 보지 않았을 때였지만 예수님을 보면서부터 포르노를 당연히 보지 않았다는 말이 너무 극명하게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복음에 묻힌 자의 교훈입니다. 에콰도르 아우카 족에게 순교당한 순교자 짐 엘리옷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그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았습니다. 이 땅에서 썩어질 것을 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청파 교회 김기석 목사의 기도문인 ‘내 영혼의 작은 흔들림’에 이런 기도가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 며칠 전 분주한 일상에 짓눌린 채로 살다가 문득 하늘을 외롭게 했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어 보았습니다. (중략) 주님은 상속자를 주시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미더워하지 않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을 쳐다보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고단한 일상에만 몰두하고 있는 우리의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주님의 눈으로 삶과 역사를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 하늘을, 하나님을, 하늘 은총을 바라보는 세인지체들이 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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