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대 날개 축제에 참석한 지체와 불참한 태신자를 포함하여 여름 식탁 공동체 나누기 상의하기 (이번 주간과 다음 주간 중에 택일하여 파스타 나누기) | 경배와 찬양 (WORSHOP) ● 예수 하나님의 공의 (복음성가) ● 내 주의 나라와 (찬송가 208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사사기 15:18-20 ● 제목 : 내 삶의 주어가 바뀌지 말아야 합니다. 1) 그토록 자기중심적이었던 삼손이 급격히 하나님께 손들었던 이유의 배경은 무엇이었는가? *본문 18절을 통해 두 가지의 상황을 말해 보자. 1) 2) |
2) 삼손이 하나님께 두 손을 들게 되면서 나타난 긍정적인 영적 변화는 무엇이었는가? *본문 18절을 중심으로 두 가지 표현해 보자. 1) 2) |
3) 2번의 2번 답에 즈음하여 내가 나의 삶에 전 영역에서 내가 주어였던 삶과 하나님께 주어의 삶이 되도록 의탁한 뒤의 삶을 반추해 보고 되새겨 보자. ● 내가 나의 삶의 주어였던 삶의 반추 ● 나의 삶의 주어가 주님으로 바뀐 뒤의 삶의 반추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두날개 축제에 참석한 베스트의 정착을 위해 ② 교회학교 여름사역을 위하여 *어린이부: 7월 25(금)~ 27(주일)까지 *학생부: 7월 28(월)~ 30(수)까지 *청년부: 8월 2(토)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수요 셀별 기도회 참석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 설교요약 (SUMMARY)2014년 7월 13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82번째 강해) 제목: 내 삶의 주어가 바뀌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사사기 15:18-20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은 나를 정확하게 인식하는 지혜입니다. 삼손은 그 동안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른 그 정체성을 잊고 살다가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자신을 드디어 발견합니다. 삼손이 레히 지방에서 블레셋 사람들의 위협 속에서도 승리하게 되었을 때 그는 도무지 무기가 될 수 없었던 나귀의 무른 턱뼈를 가지고 1,000명 이상의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하며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하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이 승리에 도취되어 자신의 승리를 자기에게 돌리는 우를 범하였고 한 술 더 떠 자기가 전쟁에서 이긴 그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지명 이름까지 바꾸는 일을 행했습니다.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처사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바로 여기까지였습니다. 승리 뒤에 오는 고갈은 마치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 숭배자들과의 단판 대결에서 승리한 뒤에 이세벨의 살해 위협을 받고 호렙산의 한 골짜기로 들어가 로뎀 나무 그늘에 앉아 극심한 영적 침체를 경험했던 것처럼 삼손에게 바로 그런 급격한 침체가 엄습한 것입니다. 차이는 엘리야는 영적인 침체였던 것에 비해 삼손은 육체적인 침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사사기 저자는 삼손에게 심각한 갈증이 임했음을 보고합니다. 이 갈증은 불과 얼마 전, 그렇게도 나귀 턱뼈를 갖고 적들을 물리치던 그런 용장 삼손의 모습과는 전혀 배치되는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나약한 인생의 삼손의 어쩔 수 없는 인성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 주는 대목이 본문 18절입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해서 블레셋의 위협에서 자기를 건져주시는 은혜를 주셨다고” 그런데 지금 자기의 신세가 얼마 전 당당하게 물리친 할례 받지 못한 블레셋 사람들의 손아귀로 다시 넘겨져서 그들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힘이 없는 가장 나약한 자로 추락하였음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약한 인간 삼손의 어쩔 수 없는 자화상이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긴 승리의 현장에서는 본인이 주어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18절에서 처음으로 삼손의 고백이 바뀌었습니다. 승리의 주체가 자기에서 주님으로 옮겨졌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분명 16절에서 ‘내가’ 가 주어였던 것이 오늘 본문인 18절에서는 ‘주께서’로 주어가 바뀌었다는 점은 삼손에게 있어서 괄목할만한 변화입니다. 삼손에게 일어난 갑작스런 변화는 하나님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죽을 것 같은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괴력과도 같은 힘이 아니고, 나귀의 턱뼈도 아니고, 여우들의 꼬리에 붙은 횃불도 아니며 오로지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임을 삼손이 드디어 인지했다는 말입니다. 그 동안에는 무시했던 바로 그 분, 내 힘으로도 얼마든지 나의 한계와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기에 의도적으로 무시했던 바로 그 분 하나님만이 나의 곤고함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주군임을 삼손이 인정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어가 바뀐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19절에서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승리하게 한 바로 그 장소, 어떤 의미에서 당신 스스로가 무시당한 그 장소였던 레히의 한 장소에 있는 우묵한 곳을 선정하셔서 그 곳을 쪼개셨습니다.(킹 제임스 버전 성경) 그리고 그곳에서 샘물이 터지게 하셨습니다. 순전히 삼손의 기도한 기도의 응답을 해 주신 것입니다. 사사기 기자는 삼손이 그 터진 샘물을 먹고 정신이 회복되어 다시 살아났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삼손의 그 현장을 사람들은 ‘엔학고레’라고 불렀는데 번역하면 ‘외치는 자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기력을 회복한 삼손은 블레셋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20년 동안 사사로 활동했음을 보고함으로 오늘 본문은 끝이 납니다. 삼손은 본인에게 절제절명의 위기가 닥치자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주어가 된 적이 없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본인 스스로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는 막다른 골목길에 다다르자 그곳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주어로 부릅니다. * 당신의 인생의 주어를 주님으로 고정시키기를 바랍니다. 환경, 여건, 상황, 분위기, 상태, 육체적인 건강의 상태, 물질적인 풍요와 곤비함, 나의 범사의 유불리에 따라 내 삶의 주어가 시시때때로 바뀌는 자가 되지 않기를 결심하십시다. 갈라디아서 6:7절에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바울은 할례를 받은 뒤에 예수의 복음을 받은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유대 율법적인 구원이라는 거짓 복음을 증거 하는 거짓 교사들로 인해 갈라디아 교회가 유린되고 있는 정황을 보고 받았습니다. 또 분명한 복음의 위력과 능력을 자기에게 소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리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거룩한 분노를 품었던 바울이 그들을 향하여 담대히 독설을 발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받은 자들이여! 복음의 힘과 능력을 과소평가 하지 말라.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며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복음의 능력을 거부하는 유대 율법적인 거짓의 무리들이여! 들으라. 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 십자가의 도를 훼손하지 말라. 가볍게 여김을 당할 이유가 없으신 주님께서 반드시 너희들이 뿌린 대로 거두실 것이다.” 우리들이 주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어를 주님 이외의 것으로 대치하지 않겠다는 것을 선포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을 사수하겠다는 선언이자 결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상황의 유불리에 따라 얼마든지 주어를 주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대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김영봉 목사님이 쓰신 ‘팔레스타인을 걷다’에 나오는 일화 가운데 예수 탄생 교회를 방문한 여인이 주님이 태어나신 자리에 그려진 별 구조물에 자신의 핸드백을 쓱쓱 문지르는 것을 보고 저자가 책에 이런 사족을 달았습니다. “그 여인은 나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쉽게 천박한 미신으로 둔갑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었다.” 머리를 주님께 숙인다고 주님이 나의 인생의 주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핸드백이 나의 인생의 주어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적어도 주님이 나의 인생의 주어가 되려면 그 사람의 머리뿐만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세속의 쓰레기 같은 핸드백조차도 그 분께 머리를 숙이고 통제를 받을 때만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흐는 유명한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에게 더 중요했던 사역은 목회와 설교 사역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제도권 교회의 허락 하에서 벨기에에 있는 프티바스메스라는 탄광촌에서 광부들에게 설교를 하는 임무를 받고 그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했지만 광부들에게 별로 큰 영향을 주지 못했고 도리어 약자들이었던 광부 노동자들에게 비난과 냉대를 받기 일쑤였습니다. 고흐가 광부 노동자에게서 ‘내가 사는 곳은 이 집이 아닌 2,000피트 밑에서 산다’는 말을 듣고 받은 영적인 충격은 그로 하여금 교회가 성도의 아픔을 제대로 갈파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복음만을 들고 전하려 했던 것을 회개하고 그 다음날부터 새벽 4시에 2,000피트 밑으로 함께 들어가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나눔과 복음을 함께 전하는 살아 있는 성자로 인정을 받으며 주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주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삼는 백성은 주님의 가르침이 삶으로 나타나는 사람입니다. 세속적인 정욕과 힘을 하나님에게서 추구하려는 자는 악한 자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그리고 맘몬을 주어로 삼는 자가 추구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주어로 삼은 자가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내 삶의 주어로 삼는 자들은 환경, 여건, 상황, 분위기, 상태, 육체적인 건강의 상태, 물질적인 풍요와 곤비함, 나의 범사의 유불리에 따라 주어를 바꾸지 않습니다. 그 어느 경우에도 내 삶의 주어의 자리는 결코 바꾸지 않습니다.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코럴릿지 교회의 담임인 매트 첸들러가 쓴 ‘I am the christian.’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세상의 흐름에 발맞추라고 외치는 교회의 리더들과 그 허튼 소리에 지친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다. ‘교회가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문화의 최신을 따라가려고 하지 말라 교회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궁극적인 열쇠는 지식이나 조직 구조의 최신의 흐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것과는 달리 21세기 교회로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구조적 변화가 아니라 영적 변화이다. 현대 교회의 주된 문제점은 문화적으로 뒤쳐진 것에 있지 않고 신학적으로 본 궤도에서 이탈했다는 데에 있다.” 세상이 주어가 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세상의 문화를 교회가 따라가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심장의 한 복판에 새겨야 하는 교훈입니다. 주님이 주어가 되어 세상을 영적으로 통치하기를 소망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어가 된 자만이 세속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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