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06.29 열린 모임 셀 사역2024-04-22 12:3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열린 모임 베스트 초청 사역으로 진행합니다.  

 
경배와 찬양 (WORSHOP)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사역하기 (WORK)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6월 2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81번째 강해)
제목: 포기해서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본문: 사사기 15:14-17

삼손은 동족인 유다 지파의 극단적 님비주의로 인해 블레셋에게 결박되어 넘겨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습니다. 물론 삼손은 정상적인 하나님의 사사가 아니었습니다. 삼손의 행태가 개인적으로 혹은 사사로서 올바른 방법이 아니었다하더라도 그는 지금 유다를 다스리는 블레셋에게 위해를 가하며 그들을 고통으로 빠져 들게 하는 민족적인 구원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사사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런 민족적인 해방이나 독립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당시 자기들이 차지하고 있는 가장 넓은 땅에서 자기들의 부를 어느 정도 유지하며 적당한 조공만 블레셋에게 바치면 지금의 부족하지 않은 자신만의 이익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의 극단적인 님비에 위협을 가하는 일이 일어나자 그 위해의 제일 원인이 삼손인 것을 알고 그를 체포하여 넘기라는 블레셋의 협박에 굴복하여 에담에 은신하고 있는 삼손에게 찾아가 그의 신변을 확보하여 블레셋에게 넘기게 된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새 밧줄 둘로 삼손을 결박했습니다. “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넘겨 줄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밧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삿 15:13)” 사사기 기자가 이 부분을 세밀하게 기록한 이유는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묶인 결박이 풀려지는 기적은 삼손 스스로가 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였기에 가능했던 일임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새 밧줄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묶인 삼손이 블레셋에게 넘겨지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어디에서 그런 괴력이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자기들의 일 년 농사를 망치고 자기 동족들의 상당수를 도륙했던 분명히 상대하기 어려운 괴력을 가진 삼손이 새 밧줄에 묶여 독 안에 든 쥐처럼 자기들의 수중에 들어온 것을 보고 블레셋 공동체는 기뻐하며 환호를 합니다. 이제는 원수를 갚을 수 있겠다는 기쁨이 그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사사기 15:14절에서,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이제는 마음대로 삼손을 요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삼손에게 위해를 가할 목적으로 그에게 접근을 하는 순간 갑자기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자 그를 결박한 단단한 새 밧줄이 불에 탄 삼처럼 힘이 없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를 결박한 밧줄은 그에게 무용지물과 같이 별 볼일이 없는 무력한 도구가 되어 버렸고 동시에 삼손은 밧줄이 풀리자 그의 주변에 있었던 나귀의 새 턱뼈를 집어 들어 그것을 무기삼아 순식간에 블레셋 진영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삼손의 용맹이 본문 15절과 같았습니다.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 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로 1,000명 이상을 처지 할 정도의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삼손의 무기였던 나귀의 새 턱뼈는 그 턱뼈의 주인공인 나귀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뼈는 죽은 지 오래된 시체에서 거둬들인 뼈이어야 단단하고 날카롭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집어든 나귀의 턱뼈는 새 것으로 물렁물렁하여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사사기 기자는 턱뼈로 블레셋 사람 1,000명 이상을 죽인 놀라운 일은 삼손의 개인적인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대목으로 하나님이 지금 삼손의 일에 개입하고 계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가지고 있었던 힘의 원천은 그의 머리카락이 길어서 괴력을 소유한 것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삼손은 이렇게 자기에게 임한 위기를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극복한 뒤에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자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의 지명까지 바꾸는 일을 합니다.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그가 말을 마치고 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본문 16-17절)
사사기 13장부터 지금까지 삼손 사사의 행적들은 철저히 부정적이며 실패한 사사의 보고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추포되어 블레셋에게 넘겨져 이방의 땅에서 죽음을 당할 위기에 봉착했지만 그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초인적인 힘을 얻어 그를 묶고 있었던 새 밧줄은 전혀 의미가 없는 무력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야훼의 영이 그를 덮쳤다. 그러자 그의 팔을 동여맸던 밧줄은 불에 탄 삼 오라기처럼 툭툭 끊어져 나갔다.”(14절 하반절, 공동번역)
여호와의 영의 능력 때문에 자기의 생명이 촌각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삼손을 구원하심과 동시에 적들을 궤멸시키셨습니다. 이런 상황에 정상적인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16절에 기록된 삼손의 노래를 보면 승리의 주체가 자기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어느 한 곳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있는 구절은 보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손의 무기만 보더라도 나귀의 턱뼈는 나실인에게 금한 부정한 것으로 삼손이 손을 대서는 안 되는 시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또 다시 자기에게 금한 율례를 범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짧은 단락만 보더라도 삼손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렇게 지속하여 당신을 실망시키는 삼손을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에 담긴 레마의 은혜입니다.
* 아버지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나실인으로 부르셨습니다. 한나가 자식을 주시면 그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 경우와는 아주 상반되는 경우입니다. 마노아나 그의 아내가 아들을 주면 나실인으로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임신하지 못하는 마노아의 아내를 직접 택하셔서 그녀에게 아들을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나실인으로 정했으니 그렇게 키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든 프로젝트를 계획하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작품에 대하여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이 하는 일이 마땅치 않으셨지만 하나님은 그를 책임지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위시하여 하나님은 삼손을 당신의 도구로 만들어 가시며 그를 돕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삼손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이 놀라운 감동의 외연을 확장하면 또 다른 감동이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하나님이 삼손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해석은 단순히 삼손에게 관계된 일인칭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본문의 삼손이 곧 ‘나’라는 해석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안내하시면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과 아버지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포기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독생하신 아들을 포기하신 이유는 당신과 나를 사랑하셔서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기에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자격도 안 되지만 은혜를 공급받는 행운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자랑할 것이 있다면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페리 노블 목사님이 쓰신‘해방’이라는 책에서 그는 마태복음 16:13-16절에 나오는 기사를 통해 베드로가 주께 답한 내용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알아도 너무나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10장만 뒤로 넘기면 어찌된 일인지 예수님을 전혀 모른다고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페리 노블이 전하고자 하는 교훈은 지식으로 알고 있는 예수님이라고 해서 내가 그와 친밀해지는 것은 별개라는 교훈을 전하고 싶었던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10장 뒤에 모른다고 말함으로 주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날 것 같았던 베드로였지만 그로부터 62장을 뒤로 넘기면 기막힌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1:15절을 보면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이상합니다. 62장 뒤에 베드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주의 미션을 다시 받은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결코 당신의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식은 포기해도 나는 포기하지 않으신 한량없는 은혜의 사랑이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을 때, 다 내려놓고 이제는 하늘소망도 없다고 자포자기하고 싶은 때 반전하십시오. 우리에게는 또 다른 6개월이 남아 있고 주님은 지난 시간 동안 나같이 형편없는 존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도 매번 그렇게 하셨던 주께서 나를 붙드실 것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낮의 해처럼 밤의 달처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들을 위해 일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