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06.22 셀 사역2024-04-22 12:3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열린 모임 8주차 사역을 위하여 함께 나누기. (섬기고 있는 베스트 초청하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해바라기의 사랑으로)
●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15:9-13
● 제목 : 매너리즘은 재앙입니다.
1) 유다 지파가 삼손에게 찾아와서 블레셋의 볼모가 될 것을 요구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요?
● 성경적인 근거 (본문 9-10절 참고)를 중심으로  

2) 유다 지파의 영적 매너리즘을 추적해 보십시다.
● 사사 시대 초기에 유다 지파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복
● 사사 시대 후기인 삼손 시대에 나타난 유다의 영적 기상도 
● 이유  

3) 성도에게 있어서 암 덩어리 같은 영적인 매너리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들을 말해 봅시다.
● 아이든 토저 목사의 글을 참고하기
● C.S 루이스의 어록 참고하기
● 현실적인 대안을 함께 모색하기
● 하나님께 확정된 대안을 요청하기(합심기도)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7월 6일 대날개 축제를 위하여
  ② 열린 모임 8주차 사역을 위하여
  ③ 열린 모임에 초청할 베스트를 위하여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봄 열린 모임 사역하기
  ① 8주차 열린 모임: 열린 모임에 초청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6월 2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사사기 80번째 강해)
본문 : 사사기 15:9-13
제목 : 매너리즘은 재앙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힌 주체가 삼손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감히 그에게는 나아가지 못하고 대신 당시 점령하여 적지 않은 피해를 주고 있었던 유다 지파의 지역에 올라와 유다의 관할 지역이었던 레히를 짓밟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유다 지파를 유린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오랜 기간 동안 블레셋의 압제로 인해 적지 않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유다 지파는 갑작스런 블레셋의 공격을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블레셋에게 우리를 이중으로 괴롭히는 이유를 묻습니다. 블레셋이 그 이유를 유다에게 고지하면서 요구조건을 제시합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하는지라”(본문 10절 하반절)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 지파에게 자초지종을 말한 후 유다의 땅에 숨어 있는 삼손을 체포하여 우리에게 넘겨주면 우리가 그에게 원수를 갚고 너희들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게 해주겠다는 협박이자 타협안이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곧바로 블레셋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기 위해 삼손 체포조 3,000명이 결성되어 에담 바위 근처에 은신해 있는 삼손을 찾아가 삼손에게 어찌하여 우리 유다를 이렇게 곤란하게 만들었는가를 항의합니다. 너 한 사람 때문에 우리 유다가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었다고 압박을 가한 것입니다. 그러자 삼손이 변증하기를 나는 나의 아내를 죽인 내 원수를 갚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지 너희 유다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답변을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미 들을 귀를 상실한 유다 지파 사람들은 삼손에게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고 요구합니다. 너를 블레셋에게 넘겨주어야 우리들이 핍박에서 벗어날 터이니 순순히 우리들의 말을 따를 것을 종용하기에 이릅니다.
  삼손은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너서 아무리 설득을 해도 들을 수 있는 귀를 상실한 동족 유다 지파 사람들에게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한 가지를 전제하여 유다 지파 너희들의 말에 따르겠다고 제의합니다.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하매”(본문 12절 하반절) 삼손은 동족에게 나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내가 너희들의 요구 조건에 응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삼손의 이 제안을 받은 유다 지파사람들이 흔쾌히 동의를 하고 다만 삼손을 밧줄로 묶어 에담에서 체포하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그를 넘겨주게 된 것이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지금 삼손은 유다를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지배하며 고통을 주고 있는 블레셋의 곡창지대를 초토화시키고 온 사람입니다. 유다 지파 사람들이 찾아간 삼손은 원수 같은 존재요 가시 같은 대상인 블레셋을 상대로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도륙하고 피신한 같은 민족의 영웅과도 같은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유다 사람들이 3,000명이나 찾아가서 그에게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협박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가나안에 입성하여 각 지파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땅을 분배하는 데 부분적으로 성공을 하였습니다. 문제는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이스라엘의 지도자 부재로 인해 가나안 지역에 아직 완성되지 못했던 땅을 분배하는 것은 사사 시대로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 가나안의 거민들이 완전히 척결된 상태도 아니었기에 미완성된 지역을 점령하는 것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숙제요 난제였습니다.
  모세는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고 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도 없는 상태에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가나안에서 해야 할 일은 태산인데 그들이 답답한 나머지 하나님께 묻습니다. 사사기 1:1절의 시작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입니다.
  이 절제절명의 물음에 하나님께서 사사기 1:2절에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사 시대의 시대적인 배경은 통상적으로 여호수아가 죽은 시기인 주전 1170년 이후부터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가나안에 정착해서 사울을 통해 왕정 정치가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왕국시대 전까지로 봅니다. 이런 역사를 토대로 접근하면 사울이 왕으로 등극한 시기를 주전 1050년으로 볼 때 사사시대는 대체적으로 BC 1170년에서 1050년 사이이기에 약 120년이 됩니다.
  사사 시대의 초기인 1170년 경에 영적 주도권을 잡은 지파는 분명히 유다 지파입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미완성 상태인 가나안 정복의 역사 가운데 유다 지파와 함께 할 것임을 천명하셨습니다. 그런데 후기 사사로 보는 삼손의 시기가 초기 시대에 비추어 약 100여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고 가정했을 때  유다 지파는 불과 1세기 만에 처절하리만큼 변질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사 시대의 시작은 유다 지파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었지만 사사 시대의 막바지에 유다는 블레셋이 우리를 통치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도리어 삼손에게 역설하는 영적 패배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사기 1:18절을 보면, “유다가 또 가사 및 그 지역과 아스글론 및 그 지역과 에그론 및 그 지역을 점령하였고” 하나님의 응원을 받으며 가나안으로 올라간 유다가 점령한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 지역은 블레셋의 대표적인 도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100년 전에 하나님의 능력을 갖고 점령하여 하나님의 위엄과 존귀하심을 선포하던 유다가 100년의 기간 동안에 이렇게 추락한 것입니다.

  유다가 이렇게까지 된 이유는 *매너리즘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른 목회자들은 습관적 신앙(아이든 토저), 팬 같은 신앙(카일 아이들먼), 머리에만 머물러 있는 신앙(매트 첸들러), 형식적인 신앙(프랜시스 챈), 머리 굴리는 신앙(데이빗 플랫), 자기중심적인 신앙(튤리안 차비진), 대충대충의 믿음(스티븐 퍼틱), 복음상실의 믿음(티모시 켈러)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호렙산(시내산)에서 거주하고 있을 때 즉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고 내려오기까지 40일 동안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는 고라와 나단과 아비람 무리에 의해 반역에 동참하다가 모세가 하산하여 일거에 반역의 무리를 제거한 뒤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귀를 하였습니다. 심각한 내홍을 겪고 호렙에서 머문 기간도 너무 오래되자 매너리즘에 빠져 침체의 기운을 보이던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 그 장막을 떠나 이동할 것을 명령하시는 장면이 신명기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신명기 1:6-8절)

  하나님의 선포는 행진하여 가면 반드시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머물 장소에서 성막을 만들 때 반드시 명령하신 내용입니다.
  “성막에서 쓰는 모든 기구와 그 말뚝과 뜰의 포장 말뚝을 다 놋으로 할지니라”(출애굽기 27:19절)

  항상 막의 기초를 말뚝으로 고정하라고 하신 것은 이동성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40년 광야 생활은 영원히 머무는 고정성의 삶이 아니라 언제든지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움직이면 움직이는 이동성의 삶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신앙은 머묾이 아니며 고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움직임이며 역동입니다. 머물면 썩고 고정되면 악취 냄새가 납니다. 익숙해지면 병이 듭니다. 영적인 매너리즘은 성도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재앙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항상 움직임(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든 토저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반역을 몰고 온 원수는 판에 박힌 생활의 일상이다.”라고 갈파하면서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순응주의자들은 묘지에 묻혀 자는 자들이다. 그들은 아무도 성가시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만히 누워 있을 뿐이다. 공동묘지에서는 모든 일이 판에 박힌 일상을 따라간다. 묘지에 묻혀 있는 사람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는 공동묘지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계속 성장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로 우리에게 처한 상황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적은 내가 처한 상황에 만족하는 태도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에 만족할 때 무너집니다. 내가 처한 지금의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익숙함과 안일함에 젖어 있을 때입니다. 유다 지파는 가나안에 입성하여 가장 좋은 비옥한 땅을 차지했고 동시에 기업 자체도 다른 지파에 비해 넓고 풍요로웠습니다. 사사 시대조차도 비록 자기들이 차지하였던 땅을 다시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지만 그들만의 여유로운 삶의 터전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별로 불만이 없었습니다. 유대가 블레셋에게 영토의 부분을 빼앗겼다는 것은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비옥한 땅에서 자손들이 먹고 즐기는 데에 별 무리가 없었기에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익숙해 졌습니다.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것을 그들만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삼손으로 인하여 졸지에 그들만의 영역에 위해(危害)가 가해지자 발끈한 것입니다. 전혀 움직이지 않으며 무감각했던 그들이 자기들의 유익이 흔들리자 자기들을 유린한 블레셋에 대하여 항거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삼손을 찾아가서 적반하장의 참담한 요구를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종교적인 편안함에 익숙한 것은 저주이고 재앙입니다. 무감각한 습관화는 사탄의 치명적인 공격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C.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종교는 지나치지 않아야 좋은 것이야 라고 믿게만 하면 그렇게 믿는 자의 영혼은 마음을 푹 놓아도 좋아. 중용을 지키는 종교란 우리에게 무교나 마찬가지니까. 무교보다 훨씬 더 즐겁지.”라고 말했습니다.
  루이스는 이런 맥락에서 아주 날카롭게 현대 크리스천들의 나태함을 공격합니다. “적극적인 습관은 반복할수록 강화되지만 수동적인 습관은 반복할수록 약화가 되는 법이다.” 익숙함으로 인해 습관화되면 망합니다.

  신앙은 더 더욱 그렇습니다. 유다 지파 공동체가 삼손을 찾아가서 한 말을 반면교사 삼아 영적인 매너리즘을 경계합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베드로전서 4:7절)